[대통령家와 혼맥] 가문의 영광인가?

권력핵심과 인맥맺기에 혈안. "청탁 걸리면 패가망신" 盧 엄중경고

노무현 대통령 당선자는 2002년 12월26일 민주당 당직자 연수에서 정권운영 방침의 일단을 밝혔다. “청탁하다 걸리면 패가망신한다”가 노 당선자 발언의 요체. 그는 대선기간에 다짐해온 ‘깨끗한 한국 건설’의 구체적 프로그램의 하나로 인사ㆍ이권 청탁의 근절책을 가장 먼저 제시했다.

그의 발언을 조금 더 들어보자. “김대중 대통령 당선 후 힘이 없던 나에게도 청탁이 밀려왔다. 당직자 여러분은 앞으로 (청탁 받으면) ‘당신 그러다 걸리면 밑져야 본전이 아니고 반드시 손해볼 것’임을 경고해 달라. 걸리면 패가망신, 그렇게 경고해라. 내 친인척들에게도 지금 전화가 엄청나게 온다고 한다. 여기에 줄 대다 걸리면 철저히 조사하겠다.”

노 당선자가 이처럼 단호하면서도 과격한 용어를 동원해 청탁방지를 주문한 것은 일단 집안 단속의 성격이 짙다. ‘연고주의와 정실주의 문화를 청산하고 상식과 원칙의 사회를 만들겠다’는 대국민 약속을 지키려면 집권 여당인 민주당부터 달라져야 한다는 것이다.

또 대선 승리 직후 노 당선자 주변에 온갖 청탁이 들끓을 조짐을 보인 것도 그가 ‘패가망신’이란 격한 표현을 구사하게 된 계기가 됐다. 한 측근은 “일부 공무원은 당선자의 먼 인척에게까지 인사 청탁을 했고, 측근과 주요 당직자들에겐 ‘인수위에 꼭 들어가게 해달라’는 민원이 집중됐다”고 전했다.

또 하나의 이유는 발언 전날 연세대 동문회관에서 열린 아들 건호씨의 결혼식. 양가 400명씩 초청장을 발송하고 600여석의 좌석을 마련했지만 결혼식에 온 인사는 1,000여명을 넘었다. 식장에 들어가지 못한 하객들은 별도로 대형 TV 4대를 설치한 피로연장에서 혼례장면을 지켜봐야 했고, 상당수가 노 당선자 부부의 눈도장을 찍기 위해 악수행렬에 동참했던 것.

이에 따라 노 당선자가 ‘사태가 더 악화되기 전에 차단하자’며 작심한 듯 하다.

청탁 문화는 권력 집중화에서 비롯된다. 가장 힘센 곳에 가장 많은 청탁이 집중되고, 가장 힘센 인사의 측근들로부터 청탁이 시작된다. 그 중에서도 가장 큰 연고는 혈연. 대통령의 친ㆍ인척은 물론 결혼으로 연결된 사돈인맥은 이 시대의 또 다른 권력 중추로 인식되곤 했다.


역대 대통령 혼맥, 재벌가가 으뜸

역대 대통령의 혼맥을 되짚어보면 재벌가(家)와 혼인을 맺은 경우가 많다. 이들은 혼맥을 바탕으로 서로의 안위를 보장받으며 추가로 권력과 금력을 양산했다. 이 같은 권력과 금력과의 만남은 고 박정희 대통령부터 시작된다.

고 박 대통령의 둘째 딸 서영씨는 유찬우 풍산금속 회장의 장남과 결혼식을 올렸다. 절대권력과 인연을 맺은 첫 재벌가로 기록됐지만 6개월만에 파경에 이르러 득보다 실이 더 많았던 편. 고 육영수 여사의 오빠인 육인수씨도 공화당 공천으로 국회의원이 됐다.

최규하 전 대통령에 이어 집권한 전두환 전 대통령도 유력 집안과 혼맥을 이어갔다. 차남인 재용씨는 박태준 전 총리(당시 포항제철 회장)의 4녀 경아씨와 혼인을 맺었다.

이후 재용씨는 결혼 2년반만에 이혼한 뒤 공무원 출신의 최성대씨 딸 정애씨와 재혼했다. 3남 재만씨는 이희상 한국제분 사장 딸인 윤혜씨와 혼인을 맺었는데, 이 결혼으로 전 전 대통령은 노태우ㆍ이회창씨와 사돈의 사돈관계가 된다.

이희상 사장이 노 전 대통령의 사돈인 신명수 신동방그룹 회장 조카인 기철씨를 사위로 맞았고, 신 회장의 동서인 이봉서 전 상공부장관은 딸인 원영씨를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 아들 정연씨에게 시집보낸 것이다. 전두환-노태우-이회창 3인은 결국 신명수-이봉서씨를 연결고리로 ‘사돈의 8촌’ 식의 관계로 엮인 셈이다.

또 딸인 효선씨는 윤상현 한나라당 이회창 정책특보와 가약을 맺었고 부친인 윤광순씨는 대한투자신탁 사장까지 오르게 된다.


두 자녀 모두 재벌가와 가약맺은 노 전 대통령

두명의 자녀를 임기 중에 모두 재벌가로 혼인을 맺게 해 가장 탄탄한 사돈을 확보한 대통령은 역시 노태우씨. 딸 소영씨를 고 최종현 SK그룹 회장 장남인 최태원 SK㈜ 회장에게 보낸 데 이어 아들인 재현씨도 신동방그룹 신명수 회장 딸인 정화씨와 혼인을 맺게 해 화제가 됐다.

이들 대기업은 사돈인 노 전 대통령의 비자금을 관리했다는 의혹에 휩싸이며 눈총을 받기도 했지만, 이동통신사업과 동방페레그린증권 설립허가를 따내기도 했다. 당사자들은 오비이락(烏飛梨落)이라고 주장하고 있으나 음으로 양으로 영향을 미쳤다는 점은 부인하기 어렵다.

또 김옥숙씨의 오빠인 김복동 전 의원(작고)은 매제의 대통령 임기중 막강 실세로 자리잡았고, 사촌동생 박철언 전 의원도 노태우 정권의 황태자로 불릴 정도로 위세가 대단했다. 노 대통령 동서인 금진호 전 상공부장관도 경제계 막후 실세로 입지를 굳건히 했다.

이어 권좌에 오른 김영삼 전 대통령과 김대중 대통령은 전임자와는 조금 성격이 다르다. 권력기관의 집중 감시를 받는 야당 정치인 생활을 오래 한 탓에 혼맥은 그리 보잘 것 없는 편이다.

또 사돈을 맺은 시기가 대부분 탄압받던 야당 정치인 시절이라 전ㆍ현직 임기 중이던 전ㆍ노 두 전직 대통령과는 무게부터가 다르다.

‘소통령’으로 불린 YS의 차남 현철씨의 부인은 롯데물산 대표이던 김웅세씨의 딸 정현씨. 하지만 정치적으로는 장인과 서로 견제하는 위치에 서는 등 YS의 임기 내내 불편한 관계를 유지했다. 김씨는 YS의 집권이 끝난 뒤 자리에서 물러났다. 장남 은철씨와 세 딸은 비교적 평범한 집안과 혼인을 맺었고 두 딸은 미국에서 거주하고 있다.

김대중 대통령의 사돈인맥도 평균치. 김홍일 의원 부인 혜라씨의 부친은 윤경빈 전 광복회장. 대통령 사돈이라 광복회장에 올랐다면서 한동안 잡음이 끊이지 않았다. 차남 홍업씨는 신헌수 전 감사원 감사위원의 딸이 부인이며, 3남 홍걸씨도 작고한 임정상씨의 딸 미경씨와 부부생활을 하고 있다. 사돈들은 별다른 사회활동은 않고 있다.


노 당선자는 평범한 집안과 사돈 맺어

12월25일 결혼한 노건호씨의 장인은 농협조합장을 지낸 배병렬씨이고 부인은 연세대 후배인 정민씨이다. 대통령 당선자의 사돈쪽으로는 1995년부터 2002년 6월까지 부산 강서구청장을 역임한 배응기씨가 먼 인척 뻘로 유일한 정ㆍ관계 인물이다.

배응기씨는 무소속으로 두번 구청장에 올랐으나 6ㆍ13 지방선거에서 한나라당 후보에게 패한 뒤 노 후보 대통령 만들기에 앞장섰다.

노 당선자의 딸인 정연씨는 2002년 3월 사법연수원에 입소한 곽상언씨(31)와 2003년 2월 사법연수원 강당에서 혼례를 치를 예정이다. 곽씨는 서울 신목고와 서울대 국제경제학과를 졸업했고, 첫 사돈 댁네와 마찬가지로 지극히 평범한 집안의 외아들이다.

현재 홀어머니와 여동생과 함께 살고 있으며 가정형편이 유복하지 않아 학창시절부터 아르바이트로 학비와 용돈을 조달했다고 한다.

노 당선자는 건호씨의 결혼을 앞두고 “대통령에 당선되던 떨어지던 조촐한 혼례를 치르겠다”고 누누이 밝힌 바 있다. 하지만 막상 당선 후의 상황은 당연히 예상과 달랐다. 물론 초청장 지참자만 참석을 허용했고 당내 의원들에게 조차 수행하는 의원들에게만 초청 비표를 돌렸으나 몇몇 의원들 및 각계 인사들이 눈에 띄었다.

노 당선자는 자식들과 예비사위ㆍ며느리에게 “특권과 반칙이 아닌 떳떳하고 평범한 길을 걸으라”고 주문하고 있다. 서민 출신 대통령으로서 특권을 거부하는 보통 집안처럼 인식해 달라는 얘기다. 하지만 현실은 그리 녹록치 않다.

역대 대통령의 경우 사돈 댁은 임기중에 화려한 시절을 담보받곤 했다. 기업가의 경우 보이지 않는 혜택을 받았고 정치 입문의 꿈을 키운 사례도 있었다. 갖은 청탁 유혹에 시달리기도 했으며, 본인 스스로가 입신의 기회로 삼으려 했던 경우도 있었다. 이들이 얼마만큼 주변의 검은 뒷거래에 깨끗하게 처신하느냐 여부가 ‘친ㆍ인척 비리없는 노무현 정권’을 탄생시키는 열쇠가 된다.

염영남 기자

입력시간 2003/01/07 12:52


염영남 liberty@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