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의 LP여행] 불루벨즈(下)

60년대는 경제개발 열풍으로 온 나라가 장밋빛 미래를 꿈꾸는 밝은 분위기에 빠져 있었다. 불루벨즈는 쟈니 브라더스, 봉봉 사중창단과 함께 남성 4중창단 ‘트로이카’ 시대를 구축하며 밝고 흥겨운 노래들로 당시의 들뜬 분위기에 기름을 부었다.

하지만 한국보컬그룹사에 복잡하게 올라 있는 멤버들의 교체와 이동은 태생기부터 지금까지 어김없이 이어져 오고 있다. 정확한 계보의 판독을 불가능하게 하는 이 부끄러운 사실에 자유로운 그룹은 하나도 없다. 최초의 남성 보컬 그룹 불루벨즈도 예외는 아니어서 딱 한번 멤버교체의 아픔을 겪었다.

절정의 인기를 구가했던 1968년 7월, 베이스를 맡았던 현양이 멤버들과의 이견으로 탈퇴했다. 다행히도 KBS 전국 아마추어 콩쿠르에서 최우수상을 받은 재주꾼 장세용이 새롭게 가세, 팀을 유지할 수 있었다. 기존 멤버들보다 5살이나 어렸던 막내 장세용은 ‘성향’이라는 예명으로 활동하던 작곡자이기도 했다.

그가 참가하면서 팀 분위기는 오히려 음악적으로 탄탄해졌다. ‘부두’, ‘심야의 나그네’, ‘이별의 카니발’ 등 성향의 창작곡 6곡과 황우루가 편곡한 ‘마리아 엘레나’ 등 6곡의 외국 곡을 수록한 불루벨즈의 두 번째 독집음반 <매혹의 하머니-그랜드>가 1970년 10월에 발표됐다. 멤버 교체의 아픔을 딛고 팀을 재정비한 불루벨즈에게 팬들은 변치 않는 애정을 보여주었다.

활력을 되찾은 불루벨즈는 MBC TV의 ‘쇼11’, KBS TV의 ‘즐거운 주말’과 KBS 라디오의 ‘3천만의 합창’ 등에 출연하며 국민노래운동을 주도했다. 1970년 서울신문 주최 문화대상에서는 중창부문 수상으로 정상의 인기를 재확인했다.

이들은 당시 최고의 야간업소 ‘월드컵’을 주무대로 활동하며 1972년 세 번째 독집 음반 을 발표하는 등 활발한 음반발표와 방송활동을 벌였다.

재미있는 것은 별명이다. 이들은 서로를 별명으로 불렀는데, 리더인 박일호는 호주머니 사정은 생각지도 않고 술판을 잘 벌인다고 ‘심청애비’, 김천악은 얼굴이 넓다고 ‘바둑판’, 서양훈은 얼굴이 검다는 이유로 코미디언 구봉서가 ‘오이지’라고 붙여주었다. 막내 장세용은 익살스럽게 노래를 잘 부르고 멤버 중 가장 미남이라는 이유로 따르는 여고생 팬들이 많아 ‘오빠’로 통했다.

데뷔 18년째인 1975년 8월, 온갖 어려움 속에서도 한 가족처럼 팀을 지켜왔던 멤버들에게도 헤어져야 할 시간이 닥쳐왔다. “한때 정상을 누비던 우리가 그룹이라는 한계 때문에 수입이 적어 다른 가수들의 백 코러스로 전락한 것이 해체의 주된 이유다.

또한 멤버 대부분이 중년의 나이로 접어든지라 자녀의 교육문제도 또 다른 이유라 할 수 있다”고 서양훈이 고백했다. 당시 한국일보에서 발간한 여성지 ‘주간여성’과의 인터뷰에서였다.

팀 해체 후 사업등 각자의 길을 걷던 멤버들은 3년 후인 1978년 말, 데뷔 20주년 기념음반제작을 위해 다시 모였다. 자신들의 히트곡들과 안치행이 작곡해 최헌이 히트시킨 ‘오동잎’ ‘앵두’ 등을 장세용이 편곡한 음반을 취입해 변함 없는 우정을 과시했다. 이후 재기의 움직임을 보이던 중 서양훈은 미국으로 이민을 떠났다.

1985년 서양훈 대신 탈퇴했던 현양이 다시 가세해 KBS TV 나이트쇼에 출연하며 활동을 재개했다. 팀 해체 13년 만인 1987년 2월에는 ‘내인생 후회는 없지만’ ‘가을과 겨울사이에’ 등 신곡 앨범을 발표해 건재함을 보여주었다. 이후 90년대 초까지 각자의 일을 하면서 KBS ‘가요무대’에서 흘러간 선배가수들의 노래를 부르며 프로그램 진행을 도왔다.

팀 해체 후 리더 박일호는 가수분과위원장과 연예협회 이사장을 거쳐 연예전문회사인 일호기획을 운영했고, 주간연예스포츠지 부사장을 역임했다. 김천악은 대구에서 부친의 가업을 이어받아 건설 및 무역회사인 화신기업을 경영했고 장세용은 미아리에서 살롱을 운영하면서 작곡가겸 가수로 음악활동을 계속했다.

박일호의 뒤를 이어 가수분과위원장을 지낸 서양훈은 무교동에 ‘카네기 살롱’을 운영하다 미국으로 이민을 떠났다. 탈퇴했다 합류한 현양은 한국 보일러 부사장, 대원주택 전무, 레저산업 사업가 등으로 왕성한 사회활동을 펼쳤다. 그는 1995년 지병인 심장병으로 멤버들 중 가장 먼저 60세의 나이에 세상을 등졌다.

한국남성보컬그룹의 창시자인 블루벨즈는 이 땅에 새롭고 풍성한 남성 화음의 음악 양식을 도입했다. 그들은 ‘멜로톤 쿼텟’, ‘쟈니 브라더스’, ‘봉봉사중창단’ 등 수많은 보컬 팀들의 탄생에 밑거름이 되었던 온전한 의미의 첫 보컬그룹이었다.

또한 30년에 가까운 긴 세월동안 장수를 한 유일한 보컬그룹이었다. 그들이 뿌리내린 기름진 음악적 토양은 대중에겐 풍성한 음악적 즐거움을 안겨주는 동시에 가요계의 발전 또한 일궈냈다. 우리나라에도 대중음악 명예의 전당이 건립된다면 불루벨즈도 반드시 한자리를 차지해야만 되는 선구자다.

최규성 가요칼럼니스트

입력시간 2003/01/07 1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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