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귀·글귀 트이니까 세상 사는 맛이 새록 새록"

만학의 열기로 가득찬 양원주부학교

오전 10시. 복도를 지나 계단 밑으로 책 읽는 소리가 내려온다. 이 소리를 따라 계단을 올라도 어느 교실에서 나오는 소리인지 분간하기 어렵다. 이는 좁은 복도를 따라 다닥다닥 붙어있는 교실 탓이다. 그렇기에 잠시라도 한눈을 팔게되면 어느새 옆 교실에서 흘러 들어오는 소리에 진도를 놓치기 십상이란다.

하지만, 이런 열악한 교육 환경일지라도 만학으로 열심인 그녀들은 이곳(양원주부학교)을 ‘천국’이라 부른다.

이런 늦깎이 학생들은 주로 40, 50대의 여성들이다. 나라살림 한창 어렵던 시절, 허리띠 졸라매며 가족들을 위해, 자신의 배움을 포기했던 이들은 무학자, 초등학교 졸업자로 서울시에만도 100만 명이 넘는다고 한다.


배움에 맺힌 한 이곳서 풀어

“그 전에 난 바보 였나봐. 그때는 어린 마음에 그냥 밥만 먹고살면 다 되는 건 줄 알았어. 시집가서도 꾀가 없었다니까. 하루 세끼 밥 먹는 것도 고마웠고.”

1학년 7반에 재학중인 윤정희(50) 씨의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를 친다. 그도 그럴 것이 이곳의 상당수 학생들은 가난했던 시절의 기억을 갖고 있다.

지금의 교육이 필수라면, 그 시절의 교육이란 지금과는 달리 선택사항이었다. 그렇기에 여건이 허락하지 않는다면 포기하는 것이 당연한 이치로 받아들여지던 시대였다. 작은 의상실을 경영하는 이기숙(62) 씨는 ‘여자가 배워 무엇하겠냐’ 는 아버지의 말에 어렵지 않은 집안 형편에도 초등학교만 졸업했다고 한다.

그러다, 여러 사람들을 대할수록 모든 면에서 자신감을 잃어 가는 자신에 대한 회의로 이곳에 오게 되었다.

“작은 의류상을 했는데, 한글이나 한자야 모양 익혔다가, 밤새 외워서 한다지만, 영어는 그게 안 되더라구. 도무지 읽을 수가 있어야지. 그러니 물건을 만들 수도 없고, 주문을 받을 수도 없고…”

이내 속상했던 기억에 한숨을 내쉰다. 쌀가게를 경영한다는 송영숙(56) 씨도 불편함을 느꼈던 건 마찬가지.

“남편이랑 20년이 넘게 장사를 했는데, 그게, 남편 죽고 나니까 내가 딱, 벙어리 꼴이야. 사람 말귀를 못 알아들으니 주문을 받을 수가 있나, 종이에다 쓸 수가 있나.”

이런 생활 속의 불편한 사항들이 모두를 이곳에 오게 한 채찍질이다. 이렇게 기억을 더듬다 보면 눈시울이 시큰해지기 마련이다. 그러다 학교생활의 즐거움을 묻자 이내 침울했던 표정에 생기가 돈다.


“심봉사가 눈 뜨는 기분”

송영숙(56) 씨는 글을 배운 뒤로 말귀가 트여 요즘 한창 뉴스 보는 재미에 빠져 있다. “말귀만 알아듣나, 따라서 읽지, 말하지, 쓸 수 있지. 얼마나 감사한 지 몰라.”그래서 수중에 있는 작은 것 하나라도 생기면 선생님께 드리고 싶은 것이 욕심인데, 뻔한 주머니 사정에 줄게 그리 많지가 않아 죄송하다는 말도 남긴다.

이 곳 교사들의 학습방법은 자상한 반복. 아무리 사소한 것도 한번 설명하고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 한 문제를 풀더라도 무조건 두 번 세 번 반복한다. 물론 이곳도 개개인의 차이는 있겠지만, 한 번 설명한 것을 곧 바로 이해하는 학생은 없기 때문이다.

여기에 학생들이 제일 싫어하는 것은 단축수업. 선생님이 개인사정으로 단축수업이라도 할라치면, 교장실로 달려가 ‘애교성 항의’로 보충수업을 요청하는 학생들도 여럿 있다. 또한, 검정고시나 방학을 앞두고 숙제를 내주게 되면, 서투른 글씨로 공책을 매운 맨 끝장에는 ‘즐거운 숙제 끝!’ 이라며, 감사의 말을 남기는 학생들도 있다. 이는 분명, 배움에 대한 열정과 감사함에서 나온 것 일 터이다.

하지만 이런 혜택을 받을 수 있는 곳조차 극히 한정되어 있어, 많은 학생들이 지방에서 통학을 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러다 보니,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또 다시 학업을 포기하게 되는 경우가 생긴다고 한다. 원거리 통학의 가장 큰 이유는 주부학교 같은 비 학력인가 학교에는 정부의 지원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당연히 학교의 운영은 많은 부분 학교장의 사비로 충당이 된다. 그러니 누구 하나 선뜻 학교를 설립하겠다는 사람이 없다. 하지만, 양원주부학교의 이선재(66) 교장은 남들과 달리 주부학교에 대한 애착에 남다르다.

“하소연을 하고 싶을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절대 포기하지는 않습니다. 하나라도 배우겠다는 학생들의 열성을 못 본 척 할 수는 없으니까요.”

주부들의 배움에 대한 열정을 보다보면 절로 힘이 난다는 이 교장이다.


배운만큼 사회에 봉사

“우리 딸이 오늘 애를 낳거든, 그렇게 되면 배우고 싶어도 올 수가 없지. 나 배우겠다고 애를 남의 손에 맡길 수도 없고…”

여주에서 통학하는 윤정희(50)씨는 아마도 몇 달 후에는 학교에 못 나올 것 같아, 벌써부터 걱정이라며 서둘러 병원으로 향했다.

학생들 모두가 주부인지라, 부모로서 해야 할 일이 언제나 우선 된다. 자녀가 학교에서 소풍이라도 가게 되면 당연히 본인의 학교 수업은 빼먹게 되고, 집안 대소사에 치이다 며칠 학교에 가지 않으면 저만큼 달아난 진도를 어떻게 따라잡나, 하는 걱정에 밤잠을 설치기까지 한다. 하지만 그래도 가족이 우선 되어야 한다는 것이 모두의 공통된 생각이다.

효부상을 받은 송영숙(56)씨는 이젠 배움의 의미를 새롭게 두고 있다. “처음에는 못 배운 게 창피하고 불편해서 배웠는데, 이젠 그게 다가 아니야, 배우고 나니까 뭘 하겠다는 생각에 맞는 방법이 보이더라구.”

이러한 생각은 결코 송씨뿐 만이 아니다. “배운 만큼 사회에 돌려주고 싶다”는 이기숙(62)씨는 요즘 호스피스 교육까지 받고 있다. 덧붙여 이기숙씨는 여건만 허락한다면 대학까지 갈 참이라 한다.

“내가 배워야 남도 가르칠 수 있잖아. 이건 당연한 거지.”

이곳에서 배우는 하나의 지식은 나를 상품화하는 수단이 아니라, 또 다른 나를 발견하는 원동력으로 쓰이고 있다. 나를 발견하여 사회에 보답하고 가족을 돌아보는 일이다. 곧 이런 행복한 사실을 알 수 있기에 그들이 이곳을 천국이라 부르는 듯 하다. 이런 만학의 열정을 품을 수 있는 천국학교는 내년 봄을 시작으로 여러 곳에서 입학식을 갖는다.

황경란 자유기고가

입력시간 2003/01/08 1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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