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팬 클럽 정치시대] 제2, 제3의 '노사모' 결성 붐

'대박'에 자극, 정치인들 너도나도 팬 클럽 조성

정치인도 이젠 팬 클럽(fan club)시대다.

인기 연예인이나 예술가, 스포츠 스타 등을 중심으로 조성되던 팬 클럽이 활동무대를 정계(政界)로 옮겨가고 있다. 팬 클럽이란 특정 대중 스타를 좋아하는 사람들끼리 자발적으로 사이버 공간 등을 통해 모임을 갖다가 방송출연이나 라이브 공연 등이 있으면 몰려가 열광적인 환호와 지지를 보내는 집단 정도로 인식돼 있다.

팬 클럽의 규모나 활성도는 그 스타의 인기를 측정하는 바로미터로 여겨지고 있어 대중 스타들은 저마다 팬 클럽 유지와 확대를 위해 많은 공을 들이고 있다.

그런 팬 클럽이 ‘득표가 생명’인 민선 정치인 주변에도 비슷한 형태로 조성되고 있다. 정치인 팬 클럽은 구성단계에서 활동 범위, 성격까지 연예인 팬 클럽과 별반 다를 게 없다. 다만 추종하는 대상이 대중 연예ㆍ스포츠스타가 아닌 대중 정치인일 뿐이다.

노무현 정권 출범의 1등 공신이 된 노사모(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가 사실상 정치인 팬 클럽의 효시. 이회창 한나라당 전 총재와 정몽준 국민통합21 대표도 12ㆍ19 대선기간에 ‘창사랑’ ‘몽사모’ 등의 조직을 가동했지만 자발적인 시민 모임이라기보다는 정당 혹은 개인이 주도하는 사조직 성격이 짙었다.

현재 8만여명의 회원을 갖고 있는 노사모의 대성공에 따라 야망을 가진 젊은 정치인들을 중심으로 제2 제3의 노사모가 결성되고 있다. 특히 대선 기간에 노사모의 활동을 직접 목격한 민주당 정동영 추미애 의원 등이 정치에 뜻을 두거나 이해득실을 따지는 후원회 모임을 해체, 혹은 개편해 동호회로, 나아가서는 팬 클럽으로 외연을 확장하며 결속력을 다져나가고 있다.

공연장이나 운동장에서 좋아하는 스타를 향해 열광하던 ‘오빠부대’나 ‘박수부대’가 팬 클럽으로 조직화 했듯이 정치인 팬클럽도 이젠 후원회 모임이란 사조직에서 한단계 진보해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모임으로 변신 중이다.

특히 연예인 팬 클럽 규모가 크면 클수록 음반판매량이나 각종 인기도 조사에서 상위에 오르는 지위를 누릴 수 있는 것처럼, 또 노사모의 활약에서 보듯 정치인 팬 클럽이 실제 득표와 정치자금 확보에 결정적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유명 정치인들은 저마다 팬 클럽 결성 및 확대에 힘을 쏟고 있다.


소장파 정치인 중심으로 활발한 결성

말 그대로 ‘대박’을 터뜨린 노사모의 신선한 활동은 일선 정치인들에게도 선행지표로 다가왔다. 내년 총선과 또 다른 정치적 꿈을 위해 대선이후 각자 팬 클럽 조성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 것. 아직은 인터넷상의 동호인 모임 성격에 그치고 있지만 내년 총선에서는 이들이 또다시 장외로 나와 선거운동을 주도할 가능성이 높다.

민주당 추미애 의원을 따르는 공식 모임으로 ‘아름다운사람 추미애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인 회원수 540명의 ‘추사모’가 있다. 하지만 추사모 외에 인터넷상에 추 의원을 지지하는 홈페이지들이 곳곳에 있어 이들을 하나로 묶자는 취지로 ‘추단협(추미애팬클럽 단일화 추진협의회)’을 조성하자는 주장도 있다. 추사모 대신 ‘추팬(秋 fan)’으로 개명하자는 의견도 있다.

민주당 정동영 의원에게는 ‘정사모(정동영과 함께 하는 사람들의 모임)’가 유지되고 있지만 다른 이름으로의 개명을 위해 자체적으로 새 이름을 공모 중이다. 이는 정사모가 노사모와 이름이 비슷하고 너무 노사모를 추종하는 듯한 냄새가 강하다는 것.

또 정사모의 명칭이 상투적인 데다 흡인력이 없으며 정 의원을 대표하는 이미지가 약하다는 이유에서 개명을 추진중이다. 정동영 의원 공식 홈페이지에는 현재 ‘춘하추동’ ‘영패밀리’ ‘정사단’ ‘정정당당’ 등이 정사모의 후속 이름으로 거론되고 있다.

민주당 최고위원 중에서는 김근태 의원이 앞서 나가고 있다. 인터넷상의 지지자 모임인 ‘GT클럽’을 결성해 지역별 소모임도 별도 개최하고 있으며, 한나라당 박근혜 의원 중심의 ‘GH클럽’은 네티즌 공간의 팬 클럽으로 향후 오프라인에서의 활동도 염두에 두고 있다.

출발은 거창했지만 자생력이 없어 소멸된 정치인 팬 클럽도 부지기수다. 먼저 국민통합21 정몽준 대표는 ‘정사랑’ ‘몽사랑’ 등의 지지자 모임이 있었지만 후보 사퇴이후 뚜렷한 활동 없이 휴업상태며, 같은 당 소속 김민석 전 의원도 지난해 서울시장 선거를 앞두고 결성된 ‘민사랑’이 지난해 말 기준으로 1,334명의 회원수를 확보했지만 역시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고 있다.

민주당 이상수 사무총장 지지자 모임인 ‘코이모(코끼리 이상수 의원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도 지난해 초 이후 활동이 중단된 상태. 이 총장은 “내년 선거를 앞두고 지역구인 서울 중랑구를 중심으로 다시 활동하게 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다만 1만8,000여명의 회원수를 확보하고 있는 한나라당 이회창 전 총재 중심의 ‘창사랑’은 선거 패배이후에도 인터넷 상에서 연일 수작업 개표 등을 요구하며 토론과 비판, 자기 반성 등의 글을 꾸준히 올리고 있다.

전문가들은 “정치인 팬 클럽은 연예인 팬 클럽과 달리 평소에는 자발적 참여도가 떨어지고 인터넷 상에서 토론하거나 자기 주장을 담은 글을 띄우는 수준에 불과하지만 막상 선거전에 돌입하면 유세현장과 각자의 공간에서 득표운동 선봉에 서는 폭발력을 갖고 있다”고 보고 있다. 따라서 노무현 정권의 앞날을 사실상 가름하는 내년 총선에서 제2, 제3의 노사모를 지향하는 각 정치인 팬 클럽간의 일대 격돌이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노사모의 앞날은?

노사모는 우리 정치사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단순한 지지자 모임이던 인터넷 상의 네티즌 동호회에서 출발, 전국적으로 지부가 결성되고 실제 선거운동에서는 장외로 나와 핵심적인 역할을 도맡았다. 정당중심의 무거운 관료식 체제에서 벗어나 일반 유권자들이 주(主)가 된 새로운 선거운동 방식에 많은 이들이 자발적 가입을 서둘렀고 또 지지와 성원을 보냈다.

노사모의 정치색에 대해 한 회원은 “노사모는 분명 팬 클럽이다. 좋아하는 가수를 인기 1위로 만들기 위해 편지도 쓰고 음반도 사면서 홍보하지 않는가. 우리도 그렇게 한 것일 뿐”이라고 자기 정의를 하고 있다.

기존의 혈연 지연 학연과 관계없이 자생적으로 조직된 팬 클럽으로 나이 성별 계급도 초월했으며, 정치 선진화의 발목을 잡아온 지역주의의 벽도 뛰어넘은 시민 결사체이다. 이들은 인터넷 공간에서 뛰어나와 정치현장에서 노란 풍선과 돼지저금통을 들고 직접 선거운동 전면에 섰다. 직접민주주의, 시민참여 정치의 새장을 연 장본인들인 점은 분명하다.

하지만 선거는 끝났고 노사모의 앞날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노사모는 선거가 끝난 12월21일 민주당사에서 회원들 연석회의를 갖고 향후 진로를 회원 총의에 따르기로 결정했다. ▶노사모 해체 ▶현체제 유지 ▶개명 뒤 적절한 개편 ▶시민단체와의 연대 통한 확대 재편 등 크게 네가지 틀 안에서 노 당선자의 임기시작 이전에 투표로 정하기로 했다.

이에 따라 노사모 홈페이지에는 회원간 연일 공방이 계속되고 있다. 한 회원은 “노사모 자체가 대통령에게 부담이고 본래 순수한 취지를 훼손할 우려가 있어 해체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반면, 다른 회원은 “노무현을 사랑하는 마음을 감시의 눈으로 바꿔 비판적 견제자가 돼야 한다”는 반론도 있다.

국민대통합을 부르짖으며 자신들의 지지자를 대통령으로 올려놓는데 최대 공헌을 한 노사모. 어떤 결정을 하던 간에 그들은 이번 대선의 일등 공신이자 최대 수혜자, 정치사를 바꿔 놓은 개혁세력의 주체로 당당히 자리매김했다.


무조건적 지지의 부작용도 경계해야

노사모 같은 정치인 팬 클럽의 활성화를 놓고 우려와 경계의 시선도 엄존하고 있다. 연예인 팬 클럽은 무조건적인 지지를 담보하면서 출발한다. 라이벌에 대한 사이버 테러도 마다하지 않는다. 비판은 없이 광신적 지지만 존재할 뿐이다.

물론 10대 청소년 위주의 연예인 팬 클럽과 이들 정치인 팬 클럽은 회원 수준도 연령대도 지향하는 바도 다르다. 하지만 대리만족을 바탕에 둔 보상심리가 배어 있는 점은 동일선상에 있다.

과거 군사독재의 획일화에 대해 민주화 세력들은 민주주의의 다양성을 배척하는 극악행위라고 비난했다. 비판을 수용하지 않는 집단일수록 절대 부패한다는 논리를 내세웠다. 하지만 그들 민주화 세력들도 두번에 걸친 집권과정에서 역시 독재정권의 획일성을 답습하며 부정과 부패 테두리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가장 미워하는 존재에게서 가장 미운 부분을 닮아간 것이다.

정치인 팬 클럽을 놓고 경계하는 시선도 그런 맥락이다. 자기 격리와 배타적 집단 분극화가 가장 절실한 곳이 팬 클럽이란 테두리이다. 찬반토론의 양극화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스스로를 정의로 규정하는 오만과 편견은 분명 시민참여정치 실현이란 대 명제의 이면에 존재하는 어두운 그림자로 존재하고 있다.

연예인 팬 클럽은 인기가 시들해지면 자연 해체되고 스스로 또 다른 연예인을 찾아가 조성된다. 조용필에서 서태지로, 김건모에서 장나라로 옮아가면 된다. 그러나 정치인 팬 클럽은 상황이 다르다. 한 정치인을 지지했다가 그가 실정을 거듭하면 다른 정치인으로 지지를 선회한다고 가정하자. 남는 것은 잘못된 선택에 따른 피폐한 국가 경제요, 궁핍해지는 전 국민적 삶이다.

노사모를 비롯한 노 당선자 측근들은 이번 대선을 국민대통합의 승리이고 정의로운 국민선택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선거는 끝났지만 국민 평가는 아직 출발선에도 서지 않았다. 건전한 비판을 수용하는 팬 클럽 문화가 성숙돼야 선진 정치를 구현할 수 있다. 승리에 대한 평가 여부는 후사가들이 할 몫이다.

염영남 기자

입력시간 2003/01/10 09:59


염영남 liberty@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