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의 LP 여행] 봉봉4중창단

'건전가요'로 쌓은 10년 아성

1960년대는 보컬그룹 전성시대였다. 봉봉사중창단은 불루벨즈, 멜로톤 쿼텟, 쟈니 브라더스에 이어 4번째로 탄생한 남성 4중창단이었다.

그들이 남긴 히트곡 <육군 김일병> <사랑을 하면 예뻐져요> <꽃집의 아가씨> <부라보 해병대> 등은 60년대 대표곡으로 우리 가요사에 기록되어 있다. 상복이 많았던 이들은 60~70년대에 노래뿐 아니라 연주하는 보컬그룹으로도 명성을 날렸다. 힘차고 코믹한 노래들로 밝은 사회 분위기를 조성에도 크게 기여했다.

또 미국의 유명 남성 보컬 그룹 ‘밀즈 브라더스’의 음악을 좋아해 한국의 밀즈 브라더스로 불리기도 했다.

1963년 7월에 결성된 봉봉의 오리지널 멤버는 예그린 악단이 해체되며 한국민속가극단에 함께 입단했던 김성진, 이계현, 김유생(작사자로 지웅이란 예명을 사용했다), 현삼열 등 4명. 리더는 멜로디를 맡은 건국대 출신 김성진이었고 이계현은 테너, 현삼열은 바리톤, 고려대 출신 김유생이 베이스를 담당했다.

이들은 워커힐 호텔에 전속돼 ‘뮤지컬 춘향’에 함께 출연한 인연으로 보컬 그룹 결성의 뜻을 모았다고 한다.

첫 음반은 가요계 최고 엘리트 4인방으로 구성된 한국 최초의 노래동아리 ‘포 클로버스’와 함께 발표했다. 이때 표기는 ‘본본 사중창단’이었는데, 사실은 프랑스어로 ‘좋다’는 의미의 ‘봉봉(BONBON)’을 영어식으로 잘못 쓴 것이다. 직접 악기를 다뤘던 봉봉의 첫 히트곡은 팀의 이미지를 살린 <좋아요 좋아요>. 하지만 전주 부문의 표절로 방송금지곡이 됐다.

이후 봉봉은 부라보 해병대, 육군 김일병, 사랑을 하면 예뻐져요, 꽃집의 아가씨 등 밝고 건전한 노래들로 공보부의 무궁화가요대상, 동양방송의 방송가요대상, KBS의 고운노래대상, 서울신문의 한국문화대상 등 숱한 가요 관련 상들을 휩쓸었다.

봉봉에겐 68년 김유생, 현삼열의 탈퇴 선언으로 첫 시련이 다가왔다. 고 신익희 선생의 외손으로 국회의원 신하균의 비서로 일하다 가수가 되었던 김유생은 한 곳에 오래 머물러 있지 못하는 자유분방한 성품이었다.

실제로 그는 지웅이라는 예명의 작사가로, 연예전문지 ‘팝스 코리아나’의 기자뿐만 아니라 DBS의 ‘다같이 노래하자’ 등 몇 몇 방송 프로의 MC 등 1인 다역의 재주꾼이었다. 그는 탈퇴 후 일간스포츠 연예담당기자로 활약하기도 했다. 현삼열은 북창동에 작은 오퍼상을 개업해 사업가로 변신했다. 그래서 1968년 12월 TBC TV의 음악프로 ‘OB 카비벌’은 1기 봉봉사중창단의 마지막 무대가 되었다.

두 사람의 빈자리는 경희대 음대 출신인 윤준과 윤명현이 메웠다. 비록 신인들이었지만 예그린 악단 출신 윤준과 KBS 합창단 출신 윤명현은 모두 기타 연주에 출중한 재능을 갖고 있었다.

이들의 가세로 2기 봉봉사중창단은 테너 3명에 베이스 1명으로 보컬의 구성뿐만 아니라 연주를 하는 보컬 그룹으로 거듭나며 외국 그룹 ‘포 씨즌스’의 음악을 표방하며 품격 있는 외국가요를 선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수입을 4등분으로 나눠야 했던 보컬그룹의 한계는 부업을 가져야만 했다. 60년 말 이들이 받았던 1회 출연료는 TV 8,400원, 라디오 4,000원, 밤무대 쇼는 2~3만원 선이었다. 신세기, 아세아, 대한 등 여러 음반회사에서 음반이 출시된 것은 비용문제 때문으로 음반회사들이 전속계약을 기피했기 때문이었다.

이들은 TBC TV ‘백화 가요쇼’와 ‘봉봉 오늘도 한 곡’ ‘회전목마’ 등 라디오 프로를 위주로 활동을 했다.

보컬 그룹들의 아성이 흔들리며 새롭게 전성시대를 맞이한 록 그룹은 자극을 주었다. 69년부터 전자오르간, 전자기타 등을 구입해 일렉트릭 보컬그룹으로 다시 한번 옛 영화를 위해 절치부심했다. 70년 TV나 라디오 등 방송에서는 기존의 스타일을 고수했지만 일반무대에서는 일렉트릭 록그룹 봉봉으로 변신했다.

선명회 어린이 합창단 출신의 이명선을 여성 보컬로 스카웃하고 이계현이 하몬드 오르간을, 리더 김성진은 리드 기타, 윤명현은 리듬기타와 드럼, 윤준은 베이스 기타를 치며 비틀즈의 ‘에스터데이’ ‘미셸’ 등 외국 록 계열의 레퍼토리들을 하루 5시간씩 맹연습해 선보였다.

하지만 시류에 편승한 음악적 변신은 곧 한계를 드러냈다. 73년부터 사실상 활동중단 상태에 빠지며 해체설이 난무하더니 74년 12월 결국 해체를 선언했다.

그후 리더 이성진은 작곡가로 변신을 꾀했다. 그는 홍민의 대표 곡 ‘고별’을 편곡하고 신인가수 한국일에게 ‘회상’, 하남석에게 ‘밤에 떠난 여인’을 주면서 작곡가로 제법 각광을 받기도 했다. 유준은 복음 가수로 독립해 ‘가난한 마음’이란 노래로 가요차트의 정상을 밟았다.

이계현과 윤명현은 제과점 사업과 고교 음악교사로 변신, 가요계를 떠나 버렸다.

MBC TV <토요일 토요일밤에>는 이들의 고별 무대이자 화려했던 남성보컬그룹의 퇴진 무대였다. 얼마 전에는 김상배, 현웅, 조항조, 편승엽이 MBC TV 가요프로에 출연 스스로 ‘신 봉봉사중창단’이라 부르며 사라진 남성 보컬그룹 봉봉에 대한 존경심을 표시하기도 했다.

최규성 가요칼럼니스트

입력시간 2003/01/10 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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