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 미국이민 100년- 그 아픔과 삶의 기록


■ 하와이 한인 이민 1세 웨인 패터슨 지음/ 정대화 옮김/ 들녘 펴냄

1902년 12월 22일 제물포항을 출항한 미국 증기선 게일릭(Gaelic)호는 태평양을 가로질러 이듬해 1월 13일 새벽 하와이 호놀룰루 항에 도착했다. 이 배의 3등석에 있던 56명의 남자와 21명의 여성, 25명의 어린이 등 총 102명의 한인들은 환호성을 터뜨렸다.

대한제국의 혼란과 조선팔도를 강타한 기근에 진저리를 친 터라 이역만리 미지의 땅에 대한 걱정을 접어둘 수 있었다. 더구나 하와이에는 과일과 음식이 넘쳐 나고 옷들이 나무에 걸려 있어 따기만 하면 될 정도로 풍요롭고 미국 본토는 길이 황금으로 되어 있다고 하지 않던가.

한인 이민사 전문가인 웨인 패터슨 미국 세인트노버트대 동양사학과 교수가 쓴 <하와이 한인 이민 1세-그들 삶의 애환과 승리(1903-1973)>는 102명을 시작으로 1905년까지 하와이로 떠난 7,000명의 한인 이민 1세들의 70년에 걸친 삶을 추적했다. 1998년에 출간한 <아메리카로 가는 길-한일 하와이 이민사(1896~1910)>의 속편 격이다.

102명 선발대가 부딪힌 하와이 농장의 현실은 전혀 딴판이었다. 언제나 먹을 것이 부족했고 한인들은 노예노동에 시달려야 했다. 열악하고 말조차 통하지 않는 환경에서 삶의 터전을 일궈야 했던 이민 1세의 애환과 고난을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하지만 한인들은 좌절하지 않고 일어섰다. 먼저 들어온 중국인이나 일본인들보다 기업가로 변신했고, 일제에 반대하는 독립운동과 민족운동의 중심이 됐다. 저자는 3가지 관점에서 해석했다. 우선 경제적인 면에서 1세들은 다른 나라 이민자에 비해 도시 출신이 많고 교육열이 높아 재빨리 농장을 버리고 도시, 특히 호놀룰루로 나가서 세탁 재봉 등 자영업을 했다.

정치적으로는 독립운동이 활성화됐는데 1913년 이후 이승만의 외교적 노선과 박용만의 군사적 노선으로 양분됐다. 사회적으로는 선교사의 지도에 잘 따르는 등 새로운 환경에 빨리 적응했다. 그러나 이 같은 개방성은 세대간의 긴장을 조성하기도 했다.

한인들이 뿌리를 내리는 데 ‘사진신부(Pictue Bride)’가 큰 공을 세웠다. 신부감이 워낙 부족해 이민 1세의 생활이 안정돼갈 1910년 무렵부터 결혼문제가 이민사회의 가장 큰 문제로 떠올랐다. ‘사진신부’는 중매쟁이가 건네준 남편감의 사진만을 들고 하와이로 시집온 여자들을 가리키는 말로 1910년부터 24년까지 951명의 신부들이 하와이로 시집갔다.

김경철 차장

입력시간 2003/01/21 1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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