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북을 접으며] 웬 내각제?

최근 정치권에서는 내각제 개헌 이야기가 한창이다. 민주당 한화갑 대표가 1월13일 “이제 내각제를 논의할 단계가 됐다”고 언급하자 하루 뒤인 14일 한나라당 이강두 의원은 “내각제 개헌 추진을 검토할 방침”이라고 화답했다.

이에 앞서 1월3일에는 한나라당 이규택 총무가 “내년 총선이후 내각제 개헌을 추진하자”고 제안한 바 있다. 여야 중진의원들이 모처럼 사이좋게 한 목소리를 내고 있다. 내각제가 당론인 자민련도 당연히 쌍수를 들고 환영이다.

물론 제왕적 대통령제의 폐해와 대선과정에서 나타난 이분법적 국론분열 현상을 감안하면 내각제 개헌도 진지하게 고려해볼 시점이긴 하다. 노무현 당선자도 ‘분권형 대통령제’와 ‘책임총리제’를 언급하며 1인 보스식 권력집중 현상을 타파할 뜻을 비치기도 했다.

하지만 문제는 내각제 애드벌룬에 가리워져 있는 어두운 그림자이다. 민주당 한 대표가 누구인가. 자당 후보를 뽑아놓고도 적극 지지를 외면한 채 소속 의원들의 탈당 행렬을 제지하지 않았다고 해서 신실세인 ‘탈레반’들에게 퇴출 압력까지 받는 터이다. 대선패배의 무력감에 시달리는 한나라당과 존립의미가 상실되고 있는 자민련은 굳이 언급할 필요도 없다.

이들에게는 대통령제의 폐해에 앞서 향후 5년간 버텨야할 ‘권력의 음지생활’이 더욱 두려운 현안일 뿐이다.

깊숙이 들어가면 더 노골적이다. 민주당 정균환 총무는 “분권형 대통령제는 사실상 내각제 초기단계이다. 이제 그 길 밖에 없지 않느냐”고 한 대표의 발언에 무게를 실었다.

한나라당 중진 의원은 “앞으로 또 5년을 어떻게 야당으로 보내느냐”며 “내각제가 되면 원내 1당인 한나라당이 집권한 것과 같은 효과를 낼 수 있다”고 시커먼 속내를 드러냈다.

이에 대해 민주당 신 주류들은 “노 정권이 출범도 하기 전에 내각제를 거론하는 것은 낡은 정치인들의 정치생명 연장 행위”라고 비난했고, 한나라당도 개혁파 모임인 ‘국민속으로’를 “구 정치인들의 추악한 몸부림”이라고 못박았다.

그러나 이런 반대의 목소리 속에서도 여야 중진의원들은 ‘생존’을 위한 정략적인 내각제 불씨를 계속 키워갈 전망이다.

내각제 주창자들에게 묻고 싶다. 한나라당은 이회창 후보가 이겼다고 해도 지금처럼 내각제 얘기를 꺼냈을 건지, 민주당 중진들도 자신들이 추종하는 인사가 당선됐더라도 내각제를 들고 나왔을 건지 말이다. 이런 작태를 보면 왜 대선에서 패배했는지, 왜 당내에서 퇴출 대상으로 지목받고 있는지 이해가 가는 측면도 있다.

염영남 기자

입력시간 2003/01/23 14:36


염영남 liberty@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