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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계 vs 盧, 2라운드는 전쟁이다

심상찮은 갈등 '사회주의 발언'으로 폭발

“사회주의라고 말 못할 건 또 뭡니까.”

예상과 너무 달랐다. 전국경제인연합회 김석중 상무의 ‘사회주의 발언’ 파문이 가까스로 수습된 지 불과 며칠 뒤였다. 입을 꼭 닫고 있겠지 생각하면서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전화를 걸었던 터였다.

혹시 또 ‘사고’가 나는 것은 아닌지 생각이 미치는 순간, 범 전경련 인맥으로 분류되는 이 인사는 아차 싶었던지 말문을 닫아버렸다. 재계의 속내가 이렇구나 싶었다. ^겉으로는 사과 공문을 보내는 등 허둥지둥했지만 물 밑의 불신은 한켜 한켜 쌓이고 있었다. 아니, 폭발 일보 직전이었다.

이 인사가 뒷말을 계속 이어갔다면 아마 이쯤 되지 않았을까. “기자 양반, 우리 사회가 공산주의 사회도 아니고 언로까지 차단하는 게 말이나 되오? 없는 사실을 허위로 유포한 것도 아니고 개인의 견해를 말한 것을 두고 강력히 대처하겠느니 어쩌느니 하는 것은 너무도 초법적인 행태가 아닌가 말이요. 물론 김 상무가 그런 표현을 쓰지는 않았으리라 믿고 있소.”

새 정부와 재계의 갈등이 심상찮다. 물론 충분히 예견 가능한 일이었다. 헌데 최근의 양상은 마치 외길 철로의 마주 본 열차가 브레이크 없이 가속을 내는 형국이다. 그래도 지금까지는 전초전에 불과했다. 상대방의 심기를 잔뜩 건드려놓고 반응을 지켜본 뒤 한 발 빼는 식의 고도의 신경전에 불과했다. 다소 우발적이기도 했다.

진짜 전쟁은 이제부터가 될 게 분명하다. 잠시 숨 고르기에 들어갔지만 대통령직 인수위원회가 재계를 옥죄는 구체적인 정책을 터뜨리는 순간, 정면 충돌은 불가피하다. 미국의 대 이라크 전쟁 처럼 아직 시작되지만 않았을 뿐.


준비되지 않은 펀치

첫 펀치는 인수위가 날렸다. 그것도 엄청난 파괴력이었다. “재벌의 구조조정본부(구조본) 해체를 권고하겠다.” 이 엄청난 발언에 재계는 초긴장 상태에 빠졌다. 인수위 경제분과에는 삼성 LG SK 등 재벌 구조본 측의 전화가 빗발쳤다. 진의를 확인하려는 내용이었다.

“정부가 기업의 조직까지 이래라 저래라 하는 것은 관치의 전형이다.” “구조본을 해체하면 정부가 계열사를 일일이 감시해야 하기 때문에 구조조정이 더 힘들 것이다.” 재계의 반발은 하늘을 찌를 듯 했다. 정작 진원지인 인수위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준비된 발언’이 아니었다고 했다. 발언 당사자인 경제2분과 김대환 간사도 “발언 내용이 와전됐다”며 부인했다.

사연은 이랬다. 인수위 활동이 미처 틀을 잡기도 전인 1월초. 10여명의 취재진에 둘러싸인 김 간사는 재벌 정책 방향을 묻는 기자들에게 본인의 ‘재벌관’을 장황하게 늘어놓았다.

“재벌 구조본이 과거의 기조실(기획조정실)이나 비서실처럼 총수의 전위 조직 역할을 하고 있다는 비판이 많습니다. 계열사 구조조정 역할을 하기 위해 태어났지만 기능을 다 했다고 판단되면 해체를 권고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봅니다.” 한국노총 자문위원, 참여연대 정책위원장 등 이력만을 놓고 봐도 성향을 대충은 짐작할 수 있는 그였다.

심지어 삼성가(家) 3세인 이재용 삼성전자 상무보가 신주인수권부사채(BW) 등을 이용해 재산을 편법 대물림한 과정을 신랄하게 비판하기도 했다. 인수위 주변에서는 학자로서의 소신과 인수위에서 중책을 떠맡은 공인으로서의 정체성 혼돈을 미처 정리하지 못한 데서 비롯된 사건이라는 관측이 지배적이었다.


재계 더블펀치 날린 뒤 일단 봉합

재계 반격의 선봉에는 전경련이 섰다. 재계 대변인 격인 손병두 전경련 상근부회장이 한 라디오방송 인터뷰에서 새 정부의 주요 재벌 정책을 조목조목 비판하고 나섰다. 그는 “대기업과 재벌을 구분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재벌들은 외환 위기 이후 경영 투명성과 지배구조가 크게 개선돼 과거 나쁜 이미지의 재벌은 없어졌다”고 했다.

인수위의 심기가 잔뜩 불편해 있을 즈음, 강도를 한층 높인 두번째 펀치가 이어졌다. 미 뉴욕타임스가 실은 김석중 전경련 상무의 “인수위의 목표는 사회주의”라는 내용의 인터뷰. 인수위 내부 몇몇 인사들의 반(反) 재벌 기류에 기름을 끼얹는 격이었다.

“인수위가 사회주의를 지향하면 당선자는 사회주의자란 말입니까? 재계가 걱정하는 것 같아 재벌 개혁도 장기적으로, 또 점진적으로 하겠다고 까지 밝혔는데 참 어이가 없습니다.” 당시 인수위 한 관계자는 몹시 격분해 있었다.

어차피 오래 갈 싸움은 아니었다. 인수위도 본 게임(재벌 개혁)을 앞두고 연습 경기에 정력을 낭비할 이유가 없다는 판단이었고, 재계도 괜히 앞질러 인수위의 심기를 건드려봐야 좋을 것이 없다는 계산이었다.

인수위측의 ‘합당한 조치’ 요구와 전경련의 ‘사과 공문’으로 갈등이 봉합되는 데는 불과 2~3일이 걸렸을 뿐이다.


“물러서지 않겠다" 팽팽

그렇다고 봉합을 끝으로 보는 이는 아무도 없다. 단지 서로를 향한 반목의 골이 너무 깊기 때문만은 아니다. 재벌 개혁이 재계의 생사를 좌우할 수 있는 사안인 동시에 새 정부의 성패를 가늠할 사안이기도 하다는 점이 문제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어느 쪽도 물러 설 수 없는 싸움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삼성 구조본의 한 관계자는 새 정부 공약 사항인 ‘계열분리 청구제’를 예로 들었다. “삼성이 삼성생명을 키우기 위해 얼마나 많은 공을 들였습니까. 삼성생명이나 삼성증권, 삼성카드 등 2금융권으로부터 삼성의 다른 계열사가 직접적인 도움을 받는 것은 없습니다.

허나 적어도 언젠가 ‘안전판’ 구실을 해 줄 거라는 강한 믿음이 있습니다. 이들 금융사의 지분 처분을 강제하는 제도를 순순히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심판자인가 희생양인가

결국 승자와 패자를 가리는 심판의 몫은 국민 여론에 떠맡겨질 공산이 크다. 과연 이 시점에 재벌을 죄는 것이 국가 경제를 살리는 길인지, 아니면 재계의 강변처럼 국가 경쟁력 약화만을 초래하는 것인지를 두고 치열한 논쟁이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인수위측이 ‘분배를 통한 성장’이라는 구호로 서민층의 지지를 강력히 호소하는 반면, 재계가 외국기업이나 중소기업을 끌어 들여 한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하지만 누가 승자가 되건 결국 양측 모두 피 투성이만 되고 말 것이라는 우려도 팽배하다. 한국개발연구원(KDI) 관계자는 “싸움이 단기전이 아닌 장기전으로 치달을 게 분명하다. 5년 내내 싸움만 되풀이하면 나라 경제가 어떻게 되겠느냐”고 지적했다. 어쩌면 최대의 희생양은 심판자인 국민 전체가 될 지도 모른다는 얘기다.

이영태 기자 ytlee@hk.co.kr

입력시간 2003/01/24 1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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