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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의 LP 여행] 은희(下)

인기와 염문을 먹고 자란 신델렐라

단순하고 쉬운 멜로디에 애절하게 여성적인 매력을 발산한 은희의 '꽃반지 끼고'는 김세환의 '오솔길'을 누르고 빅 히트를 터뜨렸다. 가히 폭발적이었다. 1970년대 초반은 포크 음반의 경우 5천장만 팔려도 큰 사건이었던 시절.

그러나 은희의 첫 독집 음반은 7만장 이상이 팔려 나가며 일약 스타의 디딤대가 됐다. 출연 업소였던 극장식 클럽 '라스베가스'는 6만원이던 개런티를 27만원으로 올려 주었고 지방공연은 "보수가 적다"는 이유로 거절할 만큼 그녀는 톱 클래스 가수로 대접 받았다.

이에 한국연예개발협회는 주목받던 트로트 가수 이현과 함께 은희를 '10월의 가수'로 선정, 인기 가도에 가속을 붙였다. 순식간에 인기 가수로 떠오른 은희는 이때부터 눈 수술을 하는 등 본격적인 연예 활동을 시작했다.

'황금알을 낳는 거위'에 비유될 만큼 은희는 모든 음반회사의 영입대상 1순위에 올랐다. 법정 사건으로 까지 비화된 '스카웃 사건'은 대표적 예다. 1년 반 동안 월 1만원(당시 쌀 한 가마 값)씩 개런티를 주기로 하고 전속계약을 맺었던 우주 프로덕션의 황우루는 신인 가수 은희를 과소 평가했다.

그는 음반이 예상치 못했던 빅 히트를 기록했음에도 추가 보너스를 일절 주지 않았다. 불만을 느끼고 있던 그녀에게 지구 레코드는 거금 100만원을 들여 이중 계약을 맺는 스카웃 전을 펼쳤다.

이에 '50배의 위약금을 물게 하겠다'며 격분한 황우루와 지구레코드 간에 맞고소 시비가 빚어지자 이번엔 오아시스에서 '120만원을 주겠다'며 뛰어들면서 사태는 점입가경으로 치달았다. 삼파전 최후의 승자는 계약금 130만원을 제시한 지구레코드. 둥지를 옮긴 은희는 곧 이어 작곡가 홍현걸과 함께 '꿈길'이라는 지구레코드 전속 기념 음반과 캐롤집 '화이트 크리스마스'를 연속으로 발표했다.

그녀의 히트 퍼레이드는 그칠 줄 몰랐다. 1971년 말, 은희는 시각장애인 가수 이용복과 함께 MBC 10대 가수상에서 여자 신인가수상을 수상한 데 이어, 무궁화 인기상과 광주기독교방송의 신인상 등 서울과 지방의 언론사가 수여하는 신인상을 휩쓸어 버렸다.

하늘을 찌르듯 치솟는 인기로 모든 야간업소의 구애가 물밀 듯이 밀려왔다. 불발로 그치기는 했지만 영화 출연 제의도 들어왔었다.

주간한국 연예기자 출신인 한국영상자료원 이사장 정홍택씨는 "데뷔시절 은희는 그야말로 상큼했다. 큰 눈망울로 항상 웃고 있는 모습에 노래까지 '꽃반지 끼고'였으니 자신의 이미지와 딱 맞아떨어졌다. 사방에서 출연 교섭이 밀려들 만큼 인기가 대단했다.

또한 돈이 생기면 우선 기타부터 살 정도로 기타 사랑도 유별났다. 작은 키에 높은 구두를 신은 채 커다란 기타 케이스를 옆구리에 끼고 뒤뚱뒤뚱 명동을 휘젓던 다니던 모습이 기억난다"고 회상했다. 하지만 1972년 초 KBS라디오의 신년 특집 프로에 서유석과 함께 출연해 "트로트 가수도 가수냐"는 튀는 발언으로 물의를 빚기도 했다.

이처럼 그녀는 앳되고 여린 목소리와는 달리 당차고 자기 주장이 강했던 여성이었다.

'트로트 가요 시비' 이후 가요계의 신데렐라 은희는 온갖 루머에 시달려야 했다. 방송국에 근무하는 A라는 30대 청년과의 염문설도 그 중 하나였다. 또 "미국 콜롬비아대학에 유학중인 한 살 연하의 강호동을 ‘호’라는 애칭으로 부르며 애인으로 사귀고 있다"는 소문이 악의적인 동거설로 확산돼 당시 모든 주간지의 지면을 뜨겁게 달궜다.

뒤이어 72년 3월, 4년 전에 저질렀던 '여군 탈영병'문제가 발각되어 군 관계 기관에 끌려가 조사를 받기도 했다. 높은 인기는 끝임 없는 구설수라는 가혹한 대가를 요구했다.

하지만 1972년 8월 평양 남북 적십자회담장에서 남과 북의 대표단장이 손을 맞잡고 데뷔 곡 '사랑해'를 부르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이념과 사상의 색깔이 없이 화합을 이끌어내는 긍정적인 내용을 담은 '사랑해'는 자연스럽게 남북회담장에서 합창되었다. 분단 이후 처음 있는 사건이었다.

이후 '사랑해'는 불멸의 국민 가요로 자리잡게 되었다. 용기를 얻은 은희는 72년 말, 20일간의 일본 공연을 치러냈다. 이와 함께 변혁과 '사랑의 자장가', 박춘석과 '호반의 메아리', 정민섭과 '쌍 뚜아 마미', 남국인과 '꿈속의 소녀', 이민우와 '잊을 수밖에' 등 여러 작곡가들의 곡을 받아 음반으로 발표하며 정상의 인기를 회복하려 했지만 데뷔 때의 폭발적인 인기를 얻지는 못했다.

은희는 1974년 결혼 후 1976년 미국으로 이민을 떠났다. 적극적인 성격의 그녀는 평범한 주부의 길보다는 뉴욕 주립대에서 패션 공부와 더불어 문신 제거 등 특수 미용술을 배우며 자기 개발을 꾀했다.

1985년, 10년 만에 제주도로 돌아와 제주시 중앙로에 개업한 미용실 ‘백악관’은 새출발의 시험대였다. 사업 경험을 쌓아가던 1988년 강남구 신사동에 국내 최초의 토털 코디네이션 업소인 '스톤 아일랜드'를 개업하며 사업가로 일신했다.

지난 1991년에는 매장의 지하에 '돌 섬 사랑'이란 사진 전시장을 마련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현재는 제주의 전통 옷감인 갈옷을 독점 개발하여 서울 인사동에 '봅데강'이라는 의상 스튜디오를 성공적으로 운영하고 있다.

하지만 노래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 그녀는 1996년 KBS TV의 '빅쇼'를 통해 20여 년 만의 재기를 이뤄냈다. 이어 2002년 7월 31일에는 MBC FM 라디오 '즐거운 오후 두시'에 김세환, 양희은과 함께 출연하는 등 적극적이진 않지만 가수의 끈을 결코 놓지 않고 있다.

입력시간 2003/01/24 1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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