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홀로 벼슬하며 그대를 생각하노라 정창권 풀어 씀/사계절 펴냄
누가 가부장의 권위가 어떻고, 남존여비가 어떠니 하면서 “그 때가 좋았다”고 ‘조선시대’를 들먹이면 그건 뭘 모르고 하는 소리다. 이 책을 읽은 여자라면 딱히 내세울 것도 없으면서 단지 남자라는 이유로 툭하면 ‘그 시절’을 읊조리는 남자에게 “조선시대에는 남녀가 평등했는 데 무슨 뚱딴지 같은 말이냐”며 쏘아붙일 게 틀림없다.
흔히들 조선시대를 엄격한 가부장적 권위주의가 여성의 삶을 극도로 옥죈 시대로 이해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17세기 이후의 조선시대에 국한된다. 성리학이 아직 확고한 지배철학으로 자리잡지 못했던 16세기의 조선시대는 고대부터 이어져 온 여권존중 전통이 남아 있었다. 당연히 일상의 생활 공간에서 남존여비 사상은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이 책은 16세기 한 양반 가정을 통해 당시 일상 생활사를 한편의 드라마같이 생생하게 보여준다. 홍문관 교리를 거쳐 사헌부 대사헌의 자리에 까지 오른 미암 유희춘(1513~1577)이 10여년 동안 관료 생활과 집안 생활의 소소한 내용을 기록한 ‘미암일기’를 토대로 당대의 여타 기록들을 덧붙였다. 미암은 일기에서 집안의 수입 과 지출, 이사, 혼례 등 각종 대소사와 신변잡기는 물론, 왕실 소식이나 사신접대 같은 역사적 사실까지 꼼꼼하게 적고 있다.
책 내용은 우리의 상식을 뛰어 넘는다. 당시에는 여성이 시집살이를 하는 게 아니라 남자가 처가살이를 했다. 아이들이 다 클 때까지 처가에 살다가 그 뒤 본가에 돌아오는 것이 보편적인 풍습이었다. 남녀가 재산을 균등하게 상속 받았고, 친정 부모의 제사도 시부모의 제사와 다를 바 없이 모시고 있다.
남편이 외도를 하거나 첩을 두게 되면 부부싸움이 크게 일어나기도 했고, 심지어는 남편을 내쫓거나 이혼을 선언하는 여성도 적지 않았다. 미암의 예를 들자면 외도와 관련해 되로 주고 말로 받는다.
미암이 혼자 서울에서 관직생활을 하는 동안 “서너 달 동안 여색을 멀리했으니 고마운 줄 알라”고 아내에게 편지를 썼더니, 아내의 답장인즉슨 “그게 무슨 자랑이냐, 자랑으로 치면 담양에서 집을 돌봐 온 내 공이 더 크다”며 오히려 나무란다.
당시 사람들은 무엇을 주로 먹고, 어떤 옷을 입었으며, 잠은 어떻게 자고, 또 무슨 생각을 주로 하고 있었을까 등 그 시대의 삶에 대한 궁금증을 이 만큼 소상하게 들려주는 책은 처음인 듯 싶다. 정치사 등 거대 담론에 편중된 연구작업과는 다른 차원에서, 개인일기 같은 문헌을 바탕으로 당시 역사적 풍경을 제대로 그려냈다는 평이다. 책장이 절로 넘어갈 만큼 재미가 넘쳐나는 것도 이 책의 미덕이다.
입력시간 2003/01/30 10:59
최성욱 feelchoi@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