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의 LP 여행] 방의경(上)

통기타 소리가 요란했던 1970년대 명동에는 전설적인 남녀 포크가수가 있었다. 서울 미대의 김민기와 이름도 생소한 이화여대 미대의 방의경이 주인공이다. 방의경이 김민기와 더불어 70년대 청년 문화를 주도했던 주역임을 아는 대중은 별로 없다.

당시 그녀는 한대수, 김민기, 김의철과 같은 저항적인 창작 포크 곡을 불렀던 여대생 포크가수였다. 양희은이 부른 70년대의 대표적인 포크 곡 ‘아름다운 것들’과 김인순, 김세화가 부른 ‘하양나비’ 그리고 ‘불나무’는 대중이 기억하는 그녀의 작품들.

하지만 “데모하는 학생들이 즐겨 부른다”는 이유로 그녀의 노래들은 대부분 방송금지의 멍에를 썼다. 상업적인 활동과는 거리가 멀었기에 방의경은 철저하게 베일에 가려진 신비로운 존재로 남아 있다.

그녀는 서울 서대문에서 부유한 사업가 집안의 1남 3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1949년 9월 15일생. 부친은 서울 피스톤 자동차회사를 운영하며 한국 최초의 불자동차를 만든 발명가 방응준씨. 어머니는 고아원 아이들의 엄마로 불린 사회사업가 이정순씨다.

서너살 때부터 유행가를 앙증맞게 불렀던 방의경은 아버지 회사에서 최고 스타였다. 그리고 동네 친구들과 어울려 노는 것보다 자연을 관찰하고 주변 사람들의 삶에 관심을 보인 별난 아이였다. 창문을 열고 떨어지는 빗소리를 한참 듣다가 바람 부는 언덕에 올라 비를 맞으며 노는 막내 딸의 기이한 모습에 놀란 어머니는 서울대병원 정신클리닉에 데려가기도 했다.

미동초등학교에 들어가서도 공부보다는 멍하니 창 밖을 내다보는 이상한 아이였지만 합창단에 뽑혀 경무대(현 청와대)에서 노래를 부르는 재능을 보였다. 이대부중에 진학해서는 자연과의 대화를 글로 쓰기 시작했다.

이대부고 1학년부터 악보도 없이 자신의 노래를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그 때 그녀는 “대포를 만들라”는 군사 정권의 제안을 거부해 탄압 받는 부친의 고통을 보면서 사회에 대한 깊은 고민에 빠졌다. 당시 접한 존 바에즈, 밥 딜런의 저항적인 포크 가락이 가슴에 와 닿았다. 고 2때 오빠의 일렉트릭 기타를 처음 만졌고, 이불을 뒤집어쓰고 혼자 기타를 배웠다.

무대에 오른 것은 1968년 이화여대 장식미술과에 입학하면서부터. 교내 축제에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 방의경은 정미조와 더불어 이대 미대의 ‘노래 잘하는 쌍두마차’로 꼽혔고 학생대표로 월남 위문공연길에 오르기도 했다.

그런 어느 날 이백천과 작곡가 길옥윤이 OB맥주광고 CM송을 제의해 왔다. 이장희, 김도향과 함께 방의경은 장난삼아 1분 짜리 CM송 시험 녹음에 응했다.

대학시절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2학년 축제때, 작곡가 이봉조가 반주를 맡고 조영남이 심사위원을 했던 문리대 노래자랑대회. 대중적인 노래활동을 반대했던 아버지도 이 때 딸의 노래를 듣고 감격해 값비싼 야마하 기타 선물로 미안함을 씻었다고 한다. 반주를 맡았던 이봉조는 2옥타브를 넘나들며 맑은 음색으로 노래하는 방의경의 바이브레이션에 감탄하며 ‘하늘에서 내려준 맑은 음성’이라고 극찬했다.

이화여대 메이데이 때의 일이다. 이봉조는 과 대표로 노래를 한 방의경을 “집까지 데려다 주겠다”며 자신의 차에 태웠다. 도중에 “잠깐 들렸다 가자”고 해 따라간 곳은 나이트클럽. 그 곳에는 이봉조 악단의 전 멤버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연예인이 되는 것은 꿈도 꾸지 않은 방의경은 정중하게 집요한 이봉조의 픽업 제의를 거절했다.

작곡가 길옥윤도 비슷한 사연을 갖고 있다. 그 역시 곡을 쓸 때마다 “이 노래는 방의경 것”이라며 ‘제2의 패티 김’탄생을 꿈꿨지만 실패했다. 길옥윤이 그녀의 대타로 찾은 여가수가 한때 절정의 인기를 누렸던 혜은이라는 사실은 흥미롭다.

1969년 말 YWCA 멤버였던 방의경은 이백천이 주도한 청개구리에 자연스럽게 참여했다. 이 시절 김민기는 가깝게 지냈던 동료였다. 하지만 그녀는 김민기의 ‘귀하’라는 창작곡을 듣고 음악적 갈등을 겪었다.

“김민기의 어둡고 슬픈 스타일보다는 밝고 맑게 세상을 보게 할 수 있는 곡을 쓰고 싶었다”는 방의경은 1970년 첫 창작곡 ‘겨울’을 시작으로 30여 곡이 넘는 곡을 창작했다. “곡을 만들게 될 때 가슴이 벌렁벌렁 뛰면서 전깃줄에 감전되듯 저절로 가사와 곡이 한꺼번에 떠올랐다”

그녀는 하루에 몇 곡을 쓸 만큼 창작의 물꼬가 트였다. 1970년 초 이백천과 길옥윤이 주도한 ‘음악으로 세상을 정화하는 학생들’이라는 캠퍼스 쿠르세이더(학생 십자군)에 참여한 방의경은 김민기, 송창식 등 모든 통기타 가수들과 함께 KBS TV에 나가 한차례 합동공연을 했다.

그 해 가을, 선데이서울 심근수 기자의 요청으로 10여명의 대학가 노래 친구들이 대연각 호텔 옆에 새롭게 문을 연 음악 감상실 ‘내쉬빌’에 모여 단체 인터뷰를 했다. 내쉬빌 주인은 경기고 출신으로 정보국장의 아들이었던 이수일, 기업체 사장 아들 김무영(작고), 가난했지만 음악적 기둥이었던 김유복 등 3명이었다.

최고의 음향시설로 한국 포크의 메카를 꿈꿨던 이들은 상업적인 가수들을 배제하고 진지하게 창작곡으로 노래하는 사람들을 우대했던 한국 포크음악의 숨겨진 개척자들이다. 내쉬빌의 역사는 이들 3인방의 요청을 받아들인 방의경의 개인 리사이틀 무대로 시작되었다.

최규성 가요칼럼니스트

입력시간 2003/01/30 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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