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금] "재벌들 1,000억원어치는 있을 것"

인터뷰/ '묻지마 채권' 브로커 김학수씨

첫 마디가 “요즘 모처럼 신이 난다” 였다. 비록 ‘끝물’이긴 하지만 사자와 팔자 주문이 몰려드는 폼새가 ‘전성기’ 못지않단다. 버스회사 경리직 생활을 때려 치우고 명동에서 소문난 채권 브로커로 자리잡은 지 6년째.

김학수(41)씨는 최근에 금융파생상품을 거래하는 새 회사를 차렸다며 ㈜푸드빌 대표이사라는 직함이 새겨진 명함을 건넨다.

가장 궁금한 건 “누가?” 였다. 김씨는 숱한 거래를 성사시켜 놓고서도 “모른다”고 했다. 처음엔 시치미를 떼는구나 생각했지만 아니었다. “괜히 ‘묻지마 채권’이라고 불리겠습니까? 우리는 거래를 연결시켜 주고 수수료만 받으면 되는 거잖아요. 신상은 알려고 하지 않는 것이 이 세계의 불문율입니다.” 그냥 설만 무성하다고 했다. A기업 회장이라느니, B기업 대주주 사모님이라느니… .

전주가 누구인지도 모르는데 거래는 어떻게 이뤄질까. “알음알음 소개를 통해 이뤄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란다. “그들끼리는 정보 교류가 빠르잖아요. 누구는 어떤 방식으로 증여세를 면제 받았는데 어느 곳을 찾아가니까 알선해 주더라 하는 식이죠.” 양복을 말끔하게 빼 입고 007가방을 든 채 김씨를 찾아오는 이들은 대부분 비서나 회계사 등으로 자신을 소개할 뿐, 명함을 건네는 법은 없다. 도대체 어떤 회장님인지 모르겠지만, 한결같이 “회장님께서 좀 물건을 구입해달라고 해서”라는 말로 ‘접선’을 시작한다.

“전성기는 1999년, 2000년 무렵이었어요. 거래 규모가 100억원은 훌쩍 넘는 ‘큰 손’들이 대거 몰려 들었죠.” 2년여간 거래가 뜸하다 다시 활기를 띠기 시작한 것은 지난해 말부터.

“상속이나 증여 수단으로 쓸 부분을 남겨두고 나머지를 팔겠다는 사람들이 생겨난 거고 만기를 몇 개월 앞둔 막판에 수요도 몰리기 시작한 거죠. 어쩌면 지금 무기명 채권을 사겠다는 사람들은 잔챙이에 불과할 수도 있습니다.” 상위 5대 재벌쯤 되면 모르긴 몰라도 무기명 채권을 200억원 어치 이상, 많게는 1,000억원 어치 까지도 보유하고 있을 거라고도 했다.

정치판이 많이 깨끗해지기는 했지만 여전히 정치자금의 수단으로도 무기명 채권이 활용되는 것 같다는 게 김씨의 생각이다. “어느 기업이건 정치인에게 돈을 건네려면 출처를 밝히지 않아도 되는 자금이 필요하잖아요. 무기명 채권은 그래서 한때 정치자금 용으로 각광을 받았죠. 아마 지금도 그런 식의 거래가 종종 일어날 겁니다.”

거래를 성사시킬 경우 수수료로 받는 금액은 액면가 1만원 짜리 한 장 당 50원 가량. 10억원 어치 거래를 성사시키면 수수료 수입이 500만원은 족히 된다. 최근에도 20억원 짜리 거래를 성사시켰다는 얘길 듣고 “한 달은 놀아도 되겠다”고 했더니 고개를 설레설레 젓는다.

“지금이 대목이잖아요. 제대로 한 건 해야지요. 사자는 물량과 팔자는 물량이 100억원 어치 정도 대기하고 있는데 조건이 조금씩 맞지 않아 체결을 못시키고 있어요.” 말 속에 조급함이 묻어났다.

명동 일대에 김씨처럼 막판 대목에 ‘한 건’을 노리고 분주히 움직이는 이들은 적게는 수십명에서 많게는 100여명. 묻지마 채권을 향한 부자들의 돈 러시에 편승해 ‘고물’을 챙기려는 브로커들의 경쟁도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다.

이영태 기자

입력시간 2003/01/30 14:28


이영태 ytle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