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느긋한 극장가 순례로 '도심 설 연휴 즐기기'

설 연휴는 짧지만 영화는 많다. 굵직한 영화 4편의 흥행 대결 현장을 소개한다.


클래식
낯간지러운, 그러나 낯뜨겁지 않은

‘창 밖을 봐. 바람에 나뭇가지가 살며시 흔들리면 네가 사랑하는 사람이 널 사랑하고 있는 거야.’ 우아, 이렇게 촌스러울 수가. 그러나 아직 끝난 게 아니다. ‘귀를 기울여봐. 가슴이 뛰는 소리가 들리면 네가 사랑하는 사람이 널 사랑하고 있는 거야…’

‘엽기적인 그녀’로 500만 명의 관객 몰이에 성공했던 곽재용 감독이 이번에는 손예진, 조승우, 조인성 주연의 멜로 영화 ‘클래식’을 내놓았다. 정확히 말하면 ‘클래식-유치 버전’쯤이라 불러도 좋을 만큼 영화는 고답적인 사랑의 밀어와 상황 설정으로 반 이상을 채운다. 그러나 기묘한 것은 이 유치함이 어느새 ‘눈물’과 바뀌어 있다는 것이다.

연극반 선배를 사랑하는 지혜(손예진)는 엄마의 옛날 편지를 읽으며 엄마의 첫 사랑의 비밀을 알게 된다. 60년대 방학 때 시골에 내려갔다 만난 고교생 준하(조승우)와 주희(손예진). 그러나 공화당 의원의 딸이었던 병약한 주희는 준하의 단짝 태수와 집안끼리 정혼한 사이.

이쯤 되면 ‘소나기’의 고교생판? 준하와 주희의 안타까운 사랑, 준하와 태수의 우정이 겹쳐지며 ‘선한 사람’들의 가슴 아픈 이야기가 흘러간다. 여기에 연극반 선배 상민(조인성)을 남모르게 사랑하는 지혜의 이야기가 날실과 씨실로 교차되며 관객은 안타까운 사랑 두 편을 동시에 보게 된다.

재미있는 것은 영화 곳곳의 ‘낯간지러움’이 감독의 노련한 연출력으로 ‘낯뜨거움’으로 변질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여기에 월남전에 파병된 준하의 안타까운 이야기까지 겹치며 유치함과 순박함으로 무장했던 60년대의 사랑, 닿을 수 있어도 손 뻗지 못하는 소심한 이 시대의 사랑은 ‘나도 저럴 때가 있었던가’하는 회상과 바람으로 치환된다.

흥행 예감/★★★★☆ 남자 친구를 동반한 10대 후반, 20대 여성 팬들로부터 폭발적 인기를 얻을 수. 남성 관객들은 ‘대패’(닭살 제거용) 준비 필수.


캐치 미 이프 유 캔
나 좀 잡아달라구

‘캐치 미 이프 유 캔’, 우리말로는 ‘나 잡아봐라’. FBI 사상 최연소 지명수배자라는 ‘명예’를 안았던 희대의 사기꾼 프랭크 아비그네일 주니어(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첫 사기를 시작한 16세부터 전세계에서 250만 달러를 사기치는 과정을 경쾌한 터치로 담았다.

‘디어 헌터’에서 초점 잃은 눈빛으로 러시안 룰렛을 하던 크리스토퍼 월켄이 같은 이름의 아버지로, 그를 뒤쫓는 굼뜬 FBI 수사관으로 톰 행크스가 열연했다.

영화는 디카프리오가 입은 오렌지 빛 스웨터처럼 밝고 경쾌하다. 전학 간 학교에서 대리교사 행세를 하며 아이들에게 숙제를 내주는 것은 물론 야외 학습까지 제안, 사기꾼으로서의 싹수를 일찌감치 과시했던 프랭크는 어머니가 사업에 실패한 아버지 곁을 떠나자 가출해 사기꾼이라는 전문직업인으로 변신했다.

팬암 항공기 조종사, 하버드 의대를 수석 졸업한 의사를 거쳐 심지어 변호사 시험에까지 합격하는 프랭크의 사기술은 허술한 베테랑 칼 핸러티의 ‘조연’으로 더욱 빛을 발하게 된다. 호텔 방을 덮쳐 프랭크와 맞닥뜨린 칼, 그러나 프랭크의 능숙한 말장난에 속아 그를 놓쳐버린 칼이 없었더라면, 프랭크의 사기는 예술적 경지를 이루는 데 실패하고 말았을 것.

그러나 프랭크와 칼의 관계는 스티븐 스필버그의 ‘가족주의’의 거대한 상징이다. 크리스마스 날, 프랭크가 칼의 사무실로 전화를 걸자 칼은 말한다.

“난 너를 알아. 너는 전화할 데가 없었던거야” 아버지가 점점 초라해지면서, 프랭크가 아무리 돈을 많이 번다 해도 그들의 깨진 가정이 회복될 가능성이 점점 적어지면서, 칼은 이제 프랭크의 새로운 아버지로서의 기능을 하게 된다. 그를 검거하고, 프랑스 감옥에서 빼내와 좀 더 안전한 감옥으로 옮기고, FBI에 직장을 알선해 주고.

그러므로 ‘캐치 미 이프 유 캔’은 ‘제발 나 좀 잡아줘’라고 외치는, 여린 소년의 하소연일 수도 있다. 아무리 40년 전이라지만 세상이 그토록 어리숙하고 착하기만 했다는 발상에는 이견이 있을 수 있겠지만, 마음이 선한 미남의 사기극이 유쾌한 것만은 부인할 수 없다.

흥행예감/ ★★★☆ 디카프리오 열성 팬이 아니라도 드라마의 매력이 짭짤하다. 그저 생수 한 병이면 충분.


영웅
황제 암살을 둘러싼 ‘사건과 실화’

장이모 감독 최초의 무협 영화로 중국에서 이미 800만명이 넘는 관객을 모은 초대형 무협 영화. 춘추전국시대, 후에 시황제가 될 영정과 영정을 노리는 자격을 모두 처치했다고 주장하는 지방관리 무명(리롄제)과의 설전이 영화의 기본 구성이다.

화자에 따라 사건이 다르게 구성되는 일본 구로자와 아키라 감독의 ‘라쇼몽’과 같은 구도이다. 무명은 장천(견자단), 파검(량차오웨이)과 비설(린칭샤)을 격파한 사연을 이야기하며, 아무도 근접할 수 없었던 왕의 면전 ‘10보’의 거리까지 도달하게 된다.

그러면 무협은 언제 보여 주는가. 리롄제와 영정의 진술을 통해 붉은 색, 초록색, 흰색을 배경으로 무용과 같은 무술을 선보인다. 파검과 비설은 사랑을 하면서도, 혁명의 방식에 대해서는 큰 차이를 보이는 인물. 영정과 파검의 엇갈린 진술을 통해 드러나는 사건의 진상은 결국 왕을 노리는 또 다른 암살 사건이 진행되고 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영화의 압권은 무명과 장천이 검과 창으로 벌이는 대결과 천하의 절경이 비친 호수 위에서 벌어지는 물 위를 걷는 일합 장면. 천하의 고수들이 펼치는 싸움은 ‘와호장룡’의 대나무 숲 위의 싸움 만큼이나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그러나 ‘영웅’은 진짜 무협 팬들에게는 ‘폼만 있고 심심한’ 영화로 비쳐질 가능성도 적지 않다. 무명의 ‘10보 필살 기법’이 살짝 맛만 보여줄 뿐 정작 실전을 피하는 구도는 ‘대단한 한 판’을 기대하는 무협 팬들에게는 감질 나는 설정이기 때문이다.

천하의 싸움꾼들이 스스로 검을 거두게 하는 이유가 바로 ‘천하’, 즉 시황제가 이룰 천하통일에 대한 염원 때문이라는, 그래서 비록 학정의 정치를 펴는 군주라 할지라도 그런 왕이 이룰 미래 때문에 시해 시도를 멈춰야 한다는 전체주의적 결론은 무협의 진정한 매력을 반감시킨다.

흥행예감/★★★☆ ‘볼 영화가 없다’는 핑계로 극장을 외면했던 남성 관객이 오랜만에 극장을 찾게 될 듯. 동반 여성 관객은 팝콘 필참.


이중간첩
이중 간첩의 이중 고통

1980년, 동 베를린을 통해 위장 귀순해 남한 정보기관에서 일하고 있는 북한 대남사업부 출신 인민군 소좌 림병호(한석규). 서울 표준 말씨를 구사하고 있지만 그의 속은 변하지 않았다. FM 음악 프로그램을 통해 전달되는 지령.

그는 연락책인 고정 간첩인 아나운서 윤수미(고소영)와 접선한다. 정보부 상관 백승철(천호진)을 통해 자연스럽게 그녀를 소개받고, 교회에 나가지만 둘 사이에 뜨거운 애정은 없다. 림병호를 사랑하는 윤수미가 지령을 전달하지 않으며 그는 배신자로 몰리고, 마침내 윤수미를 처치해야 하는 상황이 된다.

‘이중간첩’이 보이는 80년대 남한은 유학생을 잡아다 빨갱이를 만들고(‘인혁당 사건’), 사건을 완결짓기 위해 림병호마저 희생양으로 삼으려 한다. 그래서 림병호에게 절박한 것은 사랑이 아니라 생존 그 자체였다.

잿빛 화면 만큼이나 영화는 무겁다. ‘쉬리’처럼 격렬한 총 싸움도, ‘공동경비구역 JSA’처럼 송강호의 유머도 없다. 암울했던 80년대 남과 북의 현실처럼 영화는 현실의 무게에 짓눌려 버린다.

흥행예감/★★☆ 웃음이 없으면 눈물이라도 터져야 할 텐데 아무것도 터지지 않아 당황스러울 영화. 오징어나 쥐포, 어렵다면 찐계란이라도 준비하자.

박은주 기자

입력시간 2003/01/30 15:28


박은주 jup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