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의 눈] 사고의 전환이 필요하다

강철왕 카네기가 남긴 일화 중에는 오늘날에도 음미해볼 만한 것들이 많다. 예를 하나만 들어보자. 처음으로 거대한 평로(平爐)를 갖춘 홈스테드 제강소를 세운 카네기는 시험을 거쳐 새 직원을 뽑기로 했다. 그런데 그가 낸 문제는 의외로 아주 간단했다. 물품 포장의 끈을 풀라는 것이었는데 응시자들의 대응은 제각각이었다. 끈을 손으로 차근차근 푸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칼로 싹둑 잘라버리는 응시자도 나왔다. 어떤 이는 문제를 낸 속뜻을 헤아리기 위해 머리를 싸매기도 했다.

결과는 단칼에 끈을 잘라낸 응시자의 합격이었다. 나중에 카네기는 단순한 지식보다는 고정 관념을 깨는 사고의 유연성을 테스트해 본 것이라고 했다.

중국의 편년체(編年體) 역사서 ‘자치통감(資治通鑑)’을 펴낸 송나라의 대학자 사마광 (司馬光)이 어렸을 적의 일이다. 그는 어른들이 모두 일하러 나간 사이에 물이 가득 찬 커다란 독 위에 올라가 노는 동네 아이들을 보고 있었다.

한 아이가 발을 잘못 디뎌 독 속에 빠지고 말았다. 같이 놀던 아이들은 어쩔 줄 몰라 “사람 살려요. 독 속에 빠졌어요”라고 소리쳤다.

그러나 마을 어른들은 모두 일터로 나간 뒤라 구해 줄 사람이 없었다. 그 때 어린 사마광은 큰 돌을 집어 독을 힘껏 내리쳤다. 독이 깨지면서 쏟아지는 물과 함께 아이도 밖으로 빠져 나왔다. 독 속에 빠진 아이를 구하려면 독 위로 올라가야 한다는 고정 관념을 깬 것이다.

한 수학 선생이 어느 날 칠판에다 선을 그은 뒤 학생들에게 “이 선을 건드리지 말고 조금 더 짧게 만들어 보라”는 질문을 냈다. 학생들은 고민을 거듭했으나 묘안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 때 한 학생이 벌떡 일어나 칠판에 그려진 선 밑에 길게 선 하나를 더 그었다. 누가 보아도 처음 선은 (상대적으로) 짧아져 있었다.

고대 그리스에 유명한 애꾸눈 장군이 있었다. 그는 죽기 전에 자신의 초상화를 남기고 싶어 유명 화가들을 불러모았다. 어떤 화가는 애꾸 눈 그대로, 어떤 화가는 양쪽 눈이 성한 상태로 초상화를 그려 바쳤다.

그러나 모두 장군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 때 이름 없는 화가 한명이 나서더니 성한 눈이 보이는 장군의 옆 모습을 그려 바쳤다. 장군이 흡족해 한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우리 주변에는 이런 예가 수없이 많다. 앞으로도 끝없이 나올 것이다. 문제는 어떤 사안을 바라보는 우리의 눈이다. 고정 관념에만 사로잡히지 않고 발상의 전환을 한다면 불가능한 것으로 여겨졌던 문제들이 의외로 쉽게 풀리기 마련이다.

요즘 정치권을 뜨겁게 달구고 있는 정부의 대북 비밀송금 의혹사건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싶다. 김대중 대통령은 “현단계에서 국익은 남북 관계를 지속적으로 발전시켜 통일을 앞당기는 것”이라고 전제한 뒤 대북 뒷거래의 진상을 낱낱이 밝히는 것은 국익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입장이다

또 대북 비밀지원은 대통령의 통치권 행사에 포함된다고 했다. 그러나 한나라당은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특검제 도입을 통해 대북 뒷거래의 진상을 가려야 한다고 맞서고 있다. 노무현 대통령 당선자는 그 중간쯤에 서서 사태의 흐름을 지켜보고 있다.

독일의 통일 경험과 노하우를 남북 관계에 대입시켜 대국민 설득에 나선 양측의 주장은 듣기에 따라 논리적인 측면도 있다. 동독의 문을 연 것은 서독의 돈이고, 그 돈이 결국 통일비용이었다는 여권의 논리는 억지가 아니다.

남북관계 개선과 한반도 평화를 위해서는 비밀 협상이 불가피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뒷거래도 필요하다. 모두 평화통일이라는 대명제 앞에서 당위성을 갖는다. 그러나 국익과 (노벨평화상이라는 대통령의) 사익은 구별돼야 한다는 야권의 주장도 타당하다.

햇볕정책의 좌초를 막기 위해서라도 국익과 사익은 가려져야 하고, 향후 대북 거래의 정상화를 위해 이미 불거진 비밀 뒷거래의 진상을 규명하는 작업은 중요하다.

딱한 것은 김 대통령의 태도다. 정부가 불가피하게 북한에 돈을 줘야 할 상황이었다면 뒤늦게라도 자금 제공 사실을 밝히고 국민의 동의를 구했어야 했다. 지난해 대북 뒷거래 의혹이 처음으로 제기됐을 때 “단연코 한 푼도 주지 않았다”는 망발(박지원 청와대 비서실장)만은 최소한 하지 말았어야 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제는 시간이 흐를수록 대북 뒷거래 의혹은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남북관계는 물론, 당사자간의 이해관계도 더욱 복잡하게 얽혀가는 상황이다. 이럴 때는 하나하나 순서대로 풀기 보다는 단칼에 싹둑 잘라버리는 사고의 전환이, 돌로 독을 내리치는 사마광의 용기가 필요하다. 노무현 당선자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닌가 한다.

이진희 부장

입력시간 2003/02/11 15:05


주간한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