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분권시대] 권력지도가 바뀐다

정권 향배 따라 엇갈리는 명암, 지역간 부침 확연해져

지방 분권화 시대에 따른 지역별 부침에 따라 정치 권력도 일대 변화를 예고하고 있다. 출신 지역의 강성(强盛) 여부가 정치 생명을 좌우하는 잣대로 여겨지면서 ‘정치 1번지’의 무게 중심도 빠르게 이동하고 있다.

정확히 말하면 새 대통령의 출신지나 대통령 당선에 기여한 권역이 신흥 정치 명문가로 거듭나고 있다. 더구나 지역 중심의 보스 정치가 청산되고 호남 중심의 정당에서 영남 후보가 선출되는 새로운 시대 상황은 정치권의 지역별 순위도를 완전히 다시 그려내고 있다.

사실 지역구 의원의 경우 해당 지역의 흥망(興亡)만큼 중요한 요소는 없다. 지역이 부강해져야 지역은 물론 중앙에서의 입김도 세지고, 그에 따라 굵직 굵직한 사업을 유치할 수 있게 되는 상호 연쇄적인 결과로 이어진다.

정권이 있는 곳에 부(富)가 쌓이고 부는 곧 표로 연결돼 당연히 해당 지역 정치인에게는 다선(多選)의 기틀이 마련된다. 하지만 오래도록 지속된 대구 출신 대통령들의 정권에서 부산과 호남, 다시 부산 출신 대통령 시대로 바뀌게 되자 전통적인 정치 중심지로 대변되던 곳이 서자 취급을 받고, 소외돼 온 지역 출신 인사가 각광을 받는 등 권역별 서열이 재조정되고 있다.


뜨는 釜山, 지는 大邱, 강보합세 湖南

박정희-전두환-노태우 정권으로 이어지던 군부독재 시절에는 대통령들의 고향인 대구가 정치의 중심으로 인식됐다. 대구 출신 인사들은 각 정권에서 주요 보직을 차지했고 덩달아 경북 지역도 TK란 카테고리 속에 진골(眞骨) 대접을 받았다.

30여년 지속돼 온 ‘대구 천하’는 YS 정권 때는 부산에 밀렸고, 호남위주의 현 DJ 정권에서는 찬밥 신세를 면치 못했다. 여기에다 이번 대선에서 대구는 노무현 당선자 진영에서 볼 때 가장 지지율이 낮게 나온 적군의 심장부. 향후 5년도 이전의 10년처럼 가장 별볼일 없는 지역으로 소외될 전망이다.

실제 1987년 제13대 대선 이후 대구ㆍ경북지역 출신 인사들은 대권 유력 후보 명단에 아예 오르지도 못했다. 비주류 생활 15년을 지낸 뒤에야 한나라당 강재섭 박근혜 의원 등을 통해 재기를 노려야 할 형편이다.

대구 중심의 정치가 중앙무대에서 사라지면서 부산이 ‘제2의 대구’를 꿈꾸고 있다. YS에 이은 노 당선자의 출현으로 벌써부터 부산 인맥들이 사회 각계에서 들썩일 조짐을 보이고 있다. PK 출신이면서도 대선 득표율이 낮았기 때문에 고향의 지지기반을 공고히 해야하는 노 당선자의 정치적 입장을 감안하면 PK 출신 인사의 몸값은 더욱 상한가를 칠 것으로 보인다.

노 당선자 체제 이후 단행된 4명의 장관급 인사에서 부산 출신의 문재인 변호사가 청와대 민정수석으로 내정된 것도 이와 맥이 닿아있다.

김대중 대통령 시대를 겪으면서 5년간의 꿀맛 기간을 맛본 호남지역은 비록 부산 정권의 출범이지만 호남을 텃밭으로 하는 민주당의 재집권이기에 소외감은 덜하다. 더구나 90%가 넘는 지지율에 대한 은덕(?)을 나몰라라 할 수 없는 입장에서 호남출신은 상대적으로 강ㆍ보합세를 유지할 것으로 보인다. 핵심 보직인 청와대 인사보좌관에도 광주출신의 정찬용씨가 내정됐다.


떠오르는 신 정치1번지 大田

1993년 대전 엑스포가 개최되면서 대전은 일순간에 비약적인 성장을 거듭했다. 관선 충남지사였던 심대평 현 지사가 노태우 정권시절 “충청 민심을 얻어야 영남 정권이란 비난을 피할 수 있다”는 명분을 앞세워 엑스포를 대전에 유치하는데 결정적 공을 세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덕에 대전은 광역시로 가는 계기를 만들며 중앙의 이목을 집중시켰고 심 지사는 민선 지사 3선에 성공했다.

‘충청민심 끌어안기’를 노린 이런 정치적 결정이 차기 정부에서도 재현될 예정이다. 노 당선자가 행정수도 충청지역 이전 공약을 내세우면서 대전지역은 ‘한국의 워싱턴 DC’로 주목받고 있다. 지금은 충청지역 의석 배분이 자민련과 한나라당, 민주당으로 갈려 있지만 내년 총선에도 이런 구도가 계속 유지될 것으로 보는 이는 적다.

수도 이전 공약을 완수케 하기 위해서라도 노 당선자 지지 후보들의 약진이 예상된다. 자연스레 중앙의 정치 무대에서도 대통령의 제 1 공약을 위한 충청 출신 인사들의 목소리가 거세질 전망이다.

인천ㆍ경기 등 수도권도 차기 정부의 주요 전략지역. 이번 대선에서도 득표율이 높았지만 원내 제1당이란 목표달성을 위해서라도 반드시 붙잡아야 하는 효자 지역이다. 지역 개발을 앞세워 당근성 정책들이 지속적으로 개발될 것으로 보인다. 문희상 비서실장 내정자 역시 경기 의정부 지역구 의원이다.


정치가 살아야 모든 게 산다?

정치권력의 지역간 이동은 경제적인 변화 외에도 사회 문화적으로도 각종 차별화를 가져왔다. 심지어 홍수 등의 천재(天災)도 영남 정권에서는 호남에서, 호남 정권에서는 반대로 영남에서 피해가 극심했다는 말이 나돌 정도다.

여기에는 해당 정권의 중심 지역에서 건설 공사가 활발히 진행되다 보니 하천 준설공사가 많아져 수해의 피해가 줄어들고, 상대 지역은 공사빈도가 적어 피해가 커졌다는 그럴 듯한 가설까지 덧붙어 유포되기도 했다. 천재 이동설은 지어낸 말이겠지만 지역 경제 구도에는 분명 정치 권력의 향방이 가장 큰 요인으로 작용해왔다.

TK정권 시절 포항과 울산, 구미 등의 대단위 공업 단지가 조성되면서 지역 경제력이 커졌던 반면 정권이 PK와 호남으로 넘어 가면서 대구 섬유단지가 허덕이고 있는 현상 등은 자연스런 경제흐름에 따른 부산물로만 치부하기에 애매한 구석이 있다.

또 현 정권에서 진행된 각종 엑스포 등의 대규모 국제 박람회가 호남과 경기 지역에 집중된 것도 정권변화와 관련성이 있다는 관측이다.

노무현 정권은 경상도 출신에 호남민심을 자본으로 하면서 충청과 수도권에 러브 콜을 보내고 있는 ‘전국구형 정권’인 셈이다. 위정자가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이전 정권의 후진적 정치행태와는 다른 정치를 펼칠 수 있다.

염영남 기자

입력시간 2003/02/17 10:58


염영남 liberty@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