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대북송금 파문, 어디까지] 비운의 현대家… 夢의 시련

2억달러 비밀지원으로 엄청난 후폭풍 앞에 선 위기의 그룹

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의 별세 2주기(3월21일)를 한 달여 앞둔 현대가에 드리워진 비운(悲運)은 과연 언제까지 계속될 것인가.


MH는 눈물, MJ는 검찰, MK는 자중

반세기동안 막혀 있던 한반도의 비무장지대(DMZ)가 열리던 2월 5일. 정몽헌 현대아산 이사회 회장(MH)은 금강산 사전답사를 떠나기 앞서 경기 하남시 창우동에 위치한 선친 고 정주영 현대 그룹 명예회장의 묘소를 방문, 시종일관 진한 눈물을 흘렸다. 그의 눈물에는 과연 무엇이 담겨 있었을까.

금강산 육로관광을 위한 동해선 임시 도로가 개통된 이날은 정 명예회장이 북한측과 대북사업 의향서를 체결한 지 14년 만이었다. 도도한 남북의 흐름을 누구도 막을 수는 없다는 가슴 벅찬 감격과 정국을 벌집 쑤셔놓은 듯 대북 비밀 지원 의혹의 실체를 놓고 여야가 첨예하게 대치하는 상황에서 정 회장은 속내 모를 회한의 눈물을 흘려야 했다.

같은 시간, 현대 중공업 최대 주주인 정몽준 의원(MJ)은 검찰로부터 소환돼 서울 서초동 서울지검에 출두했다. 현대전자 주가 조작 사건과 관련, 이익치 전 현대증권 회장과 민주노동당으로부터 고발된 ‘국민통합 21’ 대표 정 의원은 이날 9시간 여 동안 주가조작 개입 여부와 관련 자신의 입장을 진술했다.

그는 이어 8일 미국 스탠퍼드 대학 국제문제연구소 초청으로 객원 연구원 자격으로 수학하기 위해 미국으로 출국했다. 지난 대선 하루 전날 그가 보인 ‘해프닝’의 배경과 진실을 일단 가슴 속에 접은 채 당분간 미국에 머물 예정이다.

한편 최근 전국경제인 연합회 신임회장직을 고사한 정몽구 현대ㆍ기아자동차 회장(MK)도 미국내 자동차주행시험장 기공식과 시카고 모터 쇼 참관 등을 위해 10일 도미했다. 2010년 여수 세계 박람회 개최 위원장을 맡았던 정 회장은 국내 유치 실패 후 대외 활동을 가급적 멀리하며 일에만 전념하고 있다.


“더 이상 망가질 것 없다” 반발도

최근 서울 종로구 계동 현대빌딩은 침울한 분위기에서 헤어나질 못하고 있다.

현대는 현대상선의 대북 비밀지원 실체를 놓고 청와대 측이 ‘송금 내역을 모두 밝히면 현대가 망할 것’이라고 발언 한 이후, 과연 대북사업이 정상궤도에 오를 수 있을 지에 대한 우려감과 향후 특별검사제 도입 등 정치적인 폭풍우에 견뎌낼 수 있을 지에 대한 걱정에 휩싸여 있다.

하지만 지금까지 이렇게 된 이상 한편으론 ‘밝힐 것은 밝혀보자’는 반발의 속내도 숨기지 않는다.

일부에선 “더 이상 망가질 것도 없다”는 푸념 섞인 반응이다. 현대상선 등 주요 계열사들은 공식적인 반응을 자제하지만, 일부 직원들은 “돈이 대북 송금 이외의 용도로 전용된 것이 드러날까 봐 (청와대가) 겁내는 것 아니냐”는 추측성 항변까지 나올 정도다.

현대그룹의 한 임원은 “현대상선을 통해 북한에 송금했다는 본질적인 내용은 이미 상당 부분 밝혀졌다”며 “현대는 현대건설과 하이닉스반도체(옛 현대전자) 등 주요 계열사가 이미 은행관리로 넘어가 더 이상 망가질 것이 없는 상태”라고 말했다.

현대그룹은 2000년 몽구ㆍ몽헌ㆍ몽준 등 세 아들의 경영권 다툼(이른바 왕자의 난)을 계기로 3개로 쪼개졌다. 하지만 정몽헌 회장이 이끌었던 계열사들은 재무구조가 악화되기 시작, 계열사 중 가장 규모가 컸던 현대건설은 외환위기 이후 건설 경기가 침체되며 부채를 견디지 못해 2001년 5월 경영권이 채권 은행으로 넘어갔다.

또 LG반도체와 합병했던 현대전자도 세계 반도체 경기 불황으로 경영이 악화돼 2001년 5월 은행권 관리에 들어갔다. 이에 따라 현대그룹은 2001년 말 현재 재계 서열 13위로 밀려난 상태다.


대북 지원은 남북정상회담 대가?

대선을 앞두고 여야가 첨예한 대립을 보여온 현대상선의 대북 비밀 지원과 관련해 조금씩 그 실체가 벗겨지고 있다. 그러나 그 실체가 벗겨질 경우 현대로서도 정치적으로 엄청난 타격을 입을 것이라는 추측이 난무하다.

현대상선은 1월28일 감사원에 2,235억원의 사용처를 설명하며 개성공단 조성과 통신사업, 금강산 관광대가 등 대북 7대 사업에 사용했다고 밝혔다. 현대상선은 동시에 정 회장과 송호경 조선아태평화위 부위원장 사이에 체결한 기본 협약서 1부와 세부 협약서 7부를 함께 제출했다.

그러나 이 8부의 협약서 중 가장 먼저 작성한 협약서는 6ㆍ15 남북정상회담 이후인 8월에 체결된 것으로 청와대가 밝혔듯 ‘현대의 대북사업 독점 계약권료’라기 보다는 ‘남북 정상회담’ 용(用)이라는 데 더 신빙성을 높이고 있다.

김대중 대통령이 이에 대해 ‘통치행위로서 사법 심사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고 언급한 이후 정몽헌 회장은 어떠한 반응도 보이지 않고 있다.

그는 단지 “선친은 대북사업이 평화를 위한 일이라고 줄곧 생각했다”며 “앞으로도 금강산 육로관광 등 대북사업이 평화를 위한 일이 되기를 염원한다”고 만 간단히 입장을 밝혔다. 출국금지 됐다 최근 해제 조치된 그는 ‘검찰이나 특검에 소환된다면 억울하지 않겠느냐’는 질문에 “나는 둔감한 사람이다. 아직 생각해 본 적이 없다”고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그는 개성공단 착공식이 2월19일이나 20일에 열릴 예정이라며 개성공단 건설은 경제성 있는 사업으로 북한 핵 문제만 해결된다면 미국 등에서도 관심 있는 기업이 많다고 덧붙였다.

일부에서는 정회장이 최근 금강산 육로관광 사전 답사 후 귀국일정을 연기할 것으로 내다 보았으나 한 점의 의혹도 남기지 않기 위해 1박2일 일정을 마치고 곧장 귀환 함으로써 정치권의 특검이나 검찰 조사 결정여부에 따라 정 회장 스스로도 밝힐 것은 밝히겠다는 의지를 어느 정도 내비친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대북사업 독점에 적신호

그러나 대북지원을 둘러싸고 어떠한 결과가 나오더라도 30년 독점사업권을 거머쥔 현대가 대북사업을 전담하는 데에는 많은 난관이 따를 것이라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정치권의 한 관계자는 “대북사업을 둘러싸고 맺어진 현대와 김대중 정부간의 상호 협약은 정경유착의 대표적인 모델”이라며 “외환거래 및 금융실명제 위반 등 탈법적인 행위가 곳곳에서 드러난다”고 남북사업의 불투명성을 꼬집었다.

재계 관계자는 “현대가 금강산 개발 및 개성공단 조성을 위한 30년 독점사업권을 계속 짊어지고 가기에는 여러 가지 어려움이 많은 만큼, 지원자금의 투명성과 사업의 효율화를 높이기 위해서는 새로운 국내외 사업 컨소시엄이 이뤄져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고 정주영 명예회장 별세 2주기를 앞두고 정치권에서 몰려 올 폭풍 전야의 기로에선 MH, 대선 이후 자신의 거취에 고심하는 MJ, 이들의 연결선상에서 새 정권 출범 이후 적절히 ‘표정 관리’를 해야 하는 MK 등 현대 가문 3인이 내비칠 표정에 재계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장학만 기자

입력시간 2003/02/17 11:25


장학만 local@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