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여자가 사는 법] 건축가 김수경

고정관념을 깬 자리에 초록빛 꿈을 짓는 '쟁이'

서울 강남 빌딩가 대로변에서 한 블록 들어간 곳에 자리한 김수경(29ㆍ신 서울건축 사무소 공동운영자)씨의 사무실은 5층 건물 위를 증축한 공간이다. 주변 건물들에 비해 높지 않은 건물의 옥상 임에도 한 쪽 벽면으로 난 커다란 창은 시야가 툭 트여 시원하고 개방적인 인상을 준다. 기존의 옥상 바닥 면이었을 창 앞은 알맞은 정도의 여유면적을 주어 한결 안정감 있는 실내 공간을 연출하고 있었다.

“ 저 건물은 뭐죠?” 저 멀리 뾰족탑을 머리에 이고 있는 건물 하나가 생경한 중세교회 같은 풍모를 하고 주변의 건물들을 밀쳐내며 솟아있었다. “교회 건물이에요. 저 건물 앞에 가면 우리나라 같지 않아요, 너무 으리으리해서. 여기서 이렇게 봐도 이상해요. 딴 나라 같아요.”

전문직 종사자로 일에서 만큼은 남에게 크게 뒤지지 않는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그녀의 눈에 이상해 보이는 것은 주변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서있는 교회 건물만이 아니다. 나이가 어려보이고 여자라는 이유로 업무상 찾아간 관공서에서 담당 공무원으로부터 다짜고짜 반말세례에다 괜한 트집까지 잡히는 일 역시 그녀는 이해할 수 없다.

“대체 왜 저 사람이 내게 막 대하는 거지?” 이런 경우 제대로 된 해명을 받아내고서야 일을 마무리 짓는 건축기사 김수경은 자신이 나고 자란 땅에서 한 분야의 전문인으로 경력을 쌓아가는 과정에서 이처럼 선뜻 납득할 수 없는 일을 드물지 않게 만난다고 한다.


지키고 싶은 상식과 횡행하는 비상식

건축관련 공무원들에게서 부당한 대접을 받을 때면 “나를 전문직 종사자로 보는 게 아니라 여자로 보는구나”라는 생각이 들 수 밖에 없다. 이럴 때면 전문인의 자격으로 일과 자신이 배운 상식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다.

“처음부터 어려웠던 건 아니에요. 아버지께서 무학으로 고생하시며 일구어 오신 게 건축 쪽이고, 다른 형제들 역시 건축 쪽의 일을 하고 있어 자연스럽게 저도 이쪽을 택하게 되었어요. 졸업하고 처음 아버지 사무실에서 일을 시작했을 때는 아버지께서 오랫동안 일해오신 지역이라 아버지에 대한 인지도도 있고, 제가 가족이라는 사실을 다 알고 있어서 참 편하게 일을 했어요. 그런데 거길 나와서 스스로 하려고 하니까 굉장히 힘들어지는 거예요.”

일반적으로 업무경력 7년차면 각 부서의 당당한 실무진으로 해당 업무의 중추적인 역할을 맡아 한다는 것은 상식이다. 그리고 그가 아무리 젊어 보인다 해도 엄연한 해당 업무 담당자로서 예를 갖추는 것 역시 상식이다.

“가장 어려운 것은 역시 접대예요. 관공서 직원들 대부분이 남자들이니까 그걸 해야 하는데, 그걸 할 수가 없는 거예요. 사소하게 돈 봉투 하나를 건네는 일에도 제가 알지 못하는 타이밍이라는 것이 있는 모양인데, 그 사람들은 그걸 상식이라고 하겠죠. 또 여자(그것도 젊은 여자)가 남자에게 돈 봉투를 건네는 일은 상상하기 어려운 거죠. 그래서 어려운 거예요.”

받고 싶은 것이 있다면 그만큼 남에게 해주라, 열심히 하기만 하면 뭐든지 할 수 있다는 그녀의 상식은 그녀가 알지 못하는 상식에 의해 일순간 무참하게 깨어지곤 한다.

“설계 자체는 여자라서 문제될 게 하나도 없어요. 현장 업무 쪽으로 가게 되면 여자들이 좀 가리는 게 있을 수 있지만, 반드시 해야 될 일이라고 판단되면 당연히 하죠. 그러니까 제가 아직 젊어서인지 모르지만 건축업계에서 전문인으로 성장하는 데 여자라서 불가능한 것은 없는 거죠.

다만, 대학에서는 우리가 순수하게 ‘건축’에 대해서만 배웠는데, 현실에 맞닥뜨려서는 너무나 다른 것을 많이 보게 되는 거예요. 비상식적이고, 안 좋은 것들이요. 그러다 보면 사람이 닳아진다고 할까, 제 자신이 그렇게 되고 싶지는 않은데. 얼마 전에도 한번 돈을 줄 뻔한 적이 있었어요. 그런데 정말 내키지 않았어요. 이렇게는 하지 말자 싶어서 그만뒀어요. 말이 되는 것, 그게 상식이잖아요.”

말이 되는 상식을 지키는 일은 부동산 경기가 경직되는 요즘 같은 때 그녀의 사무실을 더 어렵게 하는 요인이 되기도 하지만 그녀는 자신과 자신의 일을 위해서도 소통 가능한 상식은 지켜져야 한다고 믿고있다.

“원래 우리나라 고유의 건축물은 참 훌륭해요. 더할 나위 없을 정도로요. 지금 과도기에 있는 것 같기는 한데, 현재 도시를 이루고 있는 건축물들은 우리 고유의 색깔이 없어요. 과거와 현재, 내 것과 남의 것이 빠르게 섞이면서 어우러짐을 찾지 못하고 있는 거죠. 주거 공간 역시 마찬가지죠. 무조건 큰 것을 찾는 소비자들이 많은 한 아름다운 주거 공간을 꿈꾸기 어려워요.

아파트로 대표되는 주거 공간은 사람이 들어가서 살 건축물이면서도 거기에 돈이 개입되기 때문에 더 어려운데, 그래도 소비자가 불만을 품으면 나아질 수 있어요. 주택이란 것이 적어도 20~30년 이상이 지나야 얼마나 우리 상황에 맞게 잘 지어진 것인지 검증받을 수 있는데, 늘 싸게 빨리만 지어서는 어렵죠. 사람들이 생각이 차츰 바뀌어가니까요.”

젊은 건축가의 가장 큰 꿈은 무엇일까. 무엇보다 자신만의 공간을 만드는 일이 아닐까. “제일 크면서 작은 소망이죠. ‘내 집’을 만드는 거. 동물을 좋아하니까 넓은 공간이었으면 좋겠어요. 한적한 곳에요. 그리고 제가 작업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고 싶고, 여력이 된다면 주변의 사람들과 함께 어울려 살 수 있는 공간을 만드는 거예요.”

그녀의 집엔 늘 사람이 있다.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만들어내고, 움직이며, 소통하는 사람이 머물기에 적절한 공간, 상식적으로 집은 그런 공간이라는 것. 건축가의 집이니까 당연히 크고, 화려하고, 독특하다 못해 특이할 거라는 상식이 들어설 자리가 그녀에겐 없다. 혼자 불거지기 보다는 이웃 사람들과 자연스레 어우러질 수 있는 공간이 바로 그녀가 소망하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깨고 싶은 상식과 벗어나고픈 편견

흔히 말하는 적령기를 맞은 그녀와 가족들의 중요한 관심사의 하나일 법한 결혼이 그녀에겐 ‘맘대로 되는 일’이 아니다. 혼자 살아보고 싶은 꿈을 이루기 위해 작년 독립한 그녀가 집에 가기 두려운 한 가지 이유가 바로 결혼에 관한 가족들의 의도적인 화제 편중 때문이다.

“왜들 그러시는지…. 내년이 서른인데…. 지나고 보니 좀 방황을 하긴 했더라구요. 하지만 마음대로 되는 건 아닌 것 같아요. 언제라도 좋은 사람이 생기면 하겠죠. 음, 말하자면 저는 고정관념이나 편견 같은 상식을 깨면서 살고 싶어요. 최대한.”

문학가들에 있어 흔히 문체는 그 작가의 성품이며 삶의 양식과 닮아있다고 한다. 건축가에 있어 그의 집 역시 삶의 정수를 모아 놓은 것일 지 모른다. 독자들은 그녀의 집에 대한 소망을 들었을 때 이미 어딘가 예상치 못한 구석이 있음을 눈치 챘을 것이다.

“사실 처음 인터뷰 요청을 받은 뒤 많이 망설였어요. 제가 아직 어떤 분야에서 특별한 업적을 이룬 것도 아니고, 무슨 특별한 일을 하는 것도 아니잖아요. 어느 한 분야에만 매달리는 쪽이기 보다, 저는 이런 저런 관심사가 많아서 이게 잘 안 될 때는 저거에 열중하고, 또 그게 잘 안 되면 또 다른 것을 하고 그러거든요.”

그녀 말대로 한 때 ‘너무 좋아 푹 빠졌던 건축’ 외에도 그녀가 좋아하는 것들이 많기도 하지만 그녀는 그 모든 것을 정말 열심히 한다.

“예전엔 하고 싶은 일이 너무 많았는데, 이제는 정리를 좀 했어요.(웃음) 음악, 미술을 워낙 좋아해서 이것저것 해요. 사실 원래 미술을 하고 싶었는데 제대로 못하다가 얼마 전부터 도자기를 시작했어요. 시립미술관에서 배워요. 드럼은 대학을 졸업하면서 시작했는데 많이 늦은 거죠.

한 동안 열심히 했고 밴드도 하고 자작곡을 들고 대학가 카페에서 공연도 했어요. 최근에 멤버가 교체되면서 팀 이름도 아직 못 정했지만 몇 달 후면 새롭게 의기투합한 멤버들과 다시 공연을 할 거예요.”

이런, 그녀는 정말 욕심이 많다! 이쯤 되면 음악인으로서의 미래도 따로 있을 법하다. “아, 당연히 있죠. 계속 노래 만들어 공연하고, 취입도 해보고 싶고, 공중파도 타고 싶고, 음악인으로 할 수 있는 것은 다 해보고 싶어요!”

그녀는 필자의 고정관념을 여지없이 깨고 건축기사이면서 동시에 가수로서의 미래를 그려냈다. 그렇다면 그녀에게 건축은 무엇일까. “그건 제가 살아가는 동안 가장 큰 축이 되는 한 가지죠. 아시다시피 우리나라에서 자기가 좋아하는 음악을 해서 밥을 먹고 살기는 어려우니까요.”

결국 그녀에게 있어, 건축은 가장 좋아하는 일 중의 하나이면서 동시에 그녀의 삶을 지탱시켜주는 가장 강력한 ‘도구’인 것이다.

그녀는 힘이 센 사람처럼 보이지 않는다. 다만 실타래에서 실이 풀리 듯 자신의 내부에서 일어나는 욕구에 호응하며, 자기 삶을 위한 다양한 도구들을 잘 갈고 닦아 유효적절하게 사용할 뿐이다. 그녀의 사무실을 나와 나선형 계단을 걸어 내려오는 내내 그녀의 박꽃처럼 희고 깨끗한 웃음이 어른거렸다.

양 은 주 자유기고가

입력시간 2003/02/19 1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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