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의 눈] 40대의 살사예찬

약간은 허름한 지하 계단을 내려가면 가슴을 파고드는 라틴풍 리듬을 만난다. 강남구 압구정동에 있는 살사클럽 라살사. CF나 영화, 뮤직 비디오에서 본 살사댄스의 관능적이고 끈적끈적한 무대를 기대했다면 조금 실망스럽다.

원초적인 본능을 자극하는 빠른 리듬에 몸을 맡긴 젊은 남녀들이 방문자를 유혹하듯 플로어 위에 넘실대지만 ‘육체의 향연’과는 거리가 있다. 쉴새없이 엉켰다 떨어지고, 마주잡은 상대의 팔 안으로 들어가 턴을 한 뒤 잽싸게 빠져 나오는 몸은 어느새 땀으로 흥건히 젖는다.

40대 후반의 나이에 현란하기까지 한 살사댄스를 체험했다면 나름대로 행운아에 속할 것이다. 그것도 전화위복으로 이뤄졌으니 행운이 겹쳤다. 눈길을 끌었던 ‘라틴댄스클럽’동호회 기사(주간한국 1957호)에 문제가 생겨 해명차 회원들을 만났다가 ‘죽이 맞아’ 자리를 살사클럽으로 옮긴 것이다.

스페인어로 ‘양념 소스’란 뜻의 살사는 빠르고 정열적이다. 1950~60년대 미국으로 건너온 쿠바인들이 재즈와 솔 등에 카리브해 특유의 리듬을 입혀 살사음악을 만들고 그 리듬에 맞는 춤을 개발했다고 한다. 상체와 따로 노는 엉덩이 율동이 특징인데, 라틴댄스중에서는 쉽고 흥겨워 남미의 마을 축제나 파티에 빠지지 않는 여덟 박자의 대중적인 춤이다. 90년대 들어 힙합이나 하우스 계통의 라 인디아, 마크 앤터니 등이 신선한 이미지로 살사 팬들을 유혹하면서 세계적인 살사 붐에 불을 붙였다.

살사댄스는 그 이미지만으로도 관능이나 섹스와 어느 정도 통한다. 남녀가 어느 순간 코가 서로 맞닿을 듯이 몸을 밀착시켜 엉덩이를 흔드는 장면에선 더욱 그렇다. 그러나 그게 전부는 아니다. 호흡이 잘 맞는 남녀의 춤추는 장면을 보고 있노라면 우선 아름답다. 잦은 턴 동작은 현란함과 화려함의 극치를 보여준다.

한국에 상륙한 것은 4~5년 전이다. 1989년인가, 아슬아슬한 스커트 차림의 여성이 허연 허벅지를 상대 남자의 허리에 댄 영화포스터에 끌려 본 영화 ‘살사댄싱’이 개인적으론 살사와의 첫 만남이지만, 슈오 마사유키 감독의 영화 ‘쉘 위 댄스’가 빅 히트를 치면서 살사댄스가 우리 사회에 뿌리를 내렸다.

이제는 플로어를 갖춘 라틴 바가 전국 20여 곳에 이르고 인터넷에는 30~40개의 살사 동호회가 올라 있다. 동호인도 50여 모임에 5만여명이다.

살사댄스의 첫 체험은 시작부터 끝까지 쑥스럽고 어색하기만 했다. 매주 수요일에 열리는 기초 강좌에 모인 20대 젊은 남녀 40여명과 함께 베이직(기본) 스텝을 배우는데, 발은 엉키고 팔은 제멋대로였다. 엉키는 스텝은 도우미들의 “그게 아니고” 라는 설명을 불렀지만, 나중엔 억지로 흉내만 내도 “잘 한다”는 칭찬이 따랐다. 그게 초보자의 ‘기 살려주기’라는 건 끝나고서야 알았다.

파트너와 손을 잡고 호흡을 맞춰보는 것으로 2시간 강좌는 끝났다. 아직도 애띤 여성과 손을 잡는 게 못내 쑥스러워 “빼 달라”고 간청했더니 “그렇게 하면 절대로 배우지 못 한다”며 억지로 손을 잡아준다. 순간 지겹도록 매스게임 연습을 하던 초등학교 시절이 생각날 건 또 뭔가? 여자 아이와 손을 바로 잡기 싫어서 조그만 나뭇가지를 내밀고, 그 끝을 잡고 운동장을 돌던 매스게임 연습이었다. 손만 잡으면 스텝이 엉켜 서로 눈을 흘기던 30여년전의 기억이 여전히 콤플렉스로 살아있는지 파트너의 발과 부딪칠 때마다 화들짝 놀란다.

노래와 춤이 우리 시대의 저항 문화코드로 각광 받은 때가 있었다. 70~80년대의 민주화 시위 현장에서 노래패와 춤은 지친 육체에 생명수와 같았다. 고고에서 디스코, 막춤에 이르기까지 즐기는 춤이 없지도 않았지만 그건 허수아비 같은 공허한 몸놀림으로 치부됐다.

그러나 이젠 TV만 켜면 연체동물처럼 온 몸을 꼬는 춤 ‘선수’들이 수없이 나오고, 대학가엔 댄스 동아리가 최고의 인기를 끄는 등 춤의 문화코드가 달라졌다. 그 차이를 TV화면이 아닌 플로어 위에서 확인하는 40대의 심정은 뭐랄까, 서글프다.

아직도 희망은 사라지지 않았다. ‘쉘 위 댄스’의 주인공으로 나오는 중년 남자 스가야마처럼 라틴댄스에 푹 빠져 삶의 활력을 되찾을 수 있지 않을까. 일레인, 세리김과 함께 ‘살사 1세대’로 꼽히는 i센터(www.isenter.com) 대표 살사홍(본명 홍인수)은 “40대 중반에도 충분히 배워 즐길 수 있다”고 했다.

살사는 다른 댄스보다 칼로리 소비가 많아 건강에도 좋단다. 문제는 스텝과 동작을 몸에 익히기까지 그 인고의 세월을 어떻게 견디느냐에 달렸다. 커다란 벽 거울 앞에서 어색한 첫 스텝을 떼는 용기와 반복 노력이 필요하다.

‘일자’로 통하는 지루박에 카바레가 아직도 중년의 탈선 문화처럼 남아 있는 우리 사회. 살사댄스가 중년의 목을 조였던 부정적인 ‘춤 문화'를 털어내고 건강한 육체에 남미 특유의 정열과 낭만, 리듬을 싣는 건전한 레크리에이션이라면 도전해 볼 만하지 않는가?

이진희 부장

입력시간 2003/02/25 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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