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식의 문화읽기] 웃음의 탈 계몽화

어쩌다보니 서로 마음이 통해버린 모 방송국 피디 L과 ‘개그콘서트’(이하 개콘)에 대한 이야기를 자못 진지하게 나누게 되었다. “개그콘서트가 왜 인기가 있는 걸까요?” 편집이 코앞에 다가왔는데 기본적인 인터뷰도 안 따놓은 게 틀림없다. 덩치만큼이나 무지막지한 질문이다.

“전통적인 코미디보다는 확실히 짧고, 그래서 코너의 이동이 빠르기 때문에, 관객들에게 지속적으로 신선한 긴장감을 부여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인터넷에 비유하자면 웹페이지들을 옮겨다니는 웹서핑의 느낌과 유사하다고 할 수 있겠지요.

무엇보다 중요한 사실은 무대에서 펼쳐지는 공연이라서 관객의 기대지평과 연기자의 플롯이 양방향적인 소통을 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개콘만큼 관객의 기대지평을 의식적으로 활용하는 코미디는 없었으니까요.”

이만하면 제법 그럴듯한 답변이 아니겠는가. 이쯤에서 끝내고 밥이나 먹으러 갔으면 좋겠는데, 그 인간이 다시 묻는다.

“젊은 친구들은 좋아하지만 나이든 기성세대는 개콘의 웃음으로부터 소외당한다는 반응도 많아요. 쉽게 말하면 웃기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왜 웃는지도 알 수 없다는 거죠. 개콘이 전통적인 코미디와 다른 점은 뭘까요?” 방송장이다운 날카로운 지적이긴 하지만, 석사논문 한 편은 써야 할 질문이다. 돌을 쥐어짠다. 이럴 땐 질문을 내 맘대로 바꿔 대답하는 게 상책이다.

“전통적인 코미디는 관객의 허리가 구부러질 정도의 폭소를 염두에 두었다는 생각이에요. 그래서 때리고 쓰러지고 하는 슬랩스틱(slapstick) 코미디적인 요소도 강했구요. 개콘의 경우는, 물론 폭소가 터져 나오면 좋기야 하겠지만, 그냥 가볍게 ‘하하’ 웃거나 아니면 ‘피식~’하는 정도의 웃음을 목표로 하는 것 같아요.

폭소나 홍소(哄笑)가 아니라, 웃음의 무게중심이 조소나 냉소와 같은 코웃음 정도로 바뀐 것이라고도 하겠는데요. 웃음의 코드가 달라졌다고 할 수 있겠죠.”

거짓말도 하면 늘어난다고 하더니, 평소에 생각하지도 않았던 말들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늘어놓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불길하다. L 피디는 뭔가에 필(feel)이 꽂힌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이었다. “바로 그거예요. 젊은 세대들이 선호하는 웃음의 코드가 가벼움에 있다는 거죠. 별다른 의미도 없어 보이는 개그에 열광하는 젊은이들을 보면, 그 배후에는 어떤 심리적인 요인들이 있을 것도 같은데요.”

강적이다. 이제는 가벼움의 미학을 둘러싼 사회심리학적인 측면까지 치고 들어오고 있지 않은가. “가벼운 냉소 또는 조소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두 가지의 측면을 지적해야 할 것 같아요. 하나는 코미디의 중심이 액션(action)에서 언어유희(pun)의 차원으로 이동했다는 것이구요. 다른 하나는 언어유희가 말의 표층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이지요.

예를 들자면, 지나가던 나그네가 밥 한끼를 청합니다. 여주인이 ‘사흘된 밥이라도 괜찮겠는지요’라고 묻습니다. 나그네가 반색을 하며 좋다고 하자, 여주인은 표정을 바꾸어 ‘그러면 사흘 뒤에 오시지요’라고 말합니다. 일반적으로 사흘된 밥은 형편없는 식사에 대한 겸양의 표현이지요.

하지만 개그는 말 그대로 또는 글자 그대로의 표면적인 의미에만 충실함으로써 웃음을 만들어 냅니다. 이러한 방식의 말장난이 실패할 때에는 ‘썰렁하다’는 표현을, 성공할 때에는 ‘쿨(cool)하다’는 표현을 쓰는 것이겠지요. 언어의 표면적인 층위를 따라 흘러가는 유희적 상상력이 가벼운 냉소를 가능하게 하는 가장 중요한 기제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학술용어가 여과 없이 튀어나오는 걸 보면 통제력을 상실한 모양이다. 그런데도 여전히 L 피디는 뭔가 더 이야기할 게 있을 것 같다는 능글맞은 표정을 짓고 있다. 이쯤 되면 어떻게든 마무리를 지어야 한다.

“언어의 표층적 의미를 강조하는 개그는, 배울만한 가치가 있거나 인생에 도움이 될 만한 메시지를 담고 있지 않습니다. 심하게 말하면, 개콘에는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기성세대들이 거북해 하는 이유이자, 젊은이들이 좋아하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탈(脫)계몽화된 웃음, 내지는 계몽의 기획이 막을 내린 다음에 놓여진 웃음이라는 생각입니다. 달리 말하자면, 사회와 학교를 통해서 학습한 의미와 지식에 대한 불신을 담고있는 웃음일 수도 있겠습니다.”

그 이후로도 몇 가지 질문이 더 있었지만 뭐라고 답을 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날 우리는 동석한 방송작가 K와 함께 밤늦게까지 술을 마시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웃음의 코드가 바뀌었다는 사실을 알려준 L 피디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김동식 문화평론가

입력시간 2003/02/25 11:19


주간한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