盧, DJ 청산 시작됐나?

현 정부와의 차별화 본격 시동, 녹록치 않은 현실에 속앓이

김대중 대통령과 노무현 대통령 당선자와의 관계가 심상찮다. 최대 현안인 대북송금 문제에서 차기 정부의 인선 및 민주당 구 주류와의 처우 등에 이르기까지 조금씩 이견의 싹이 보이고 있다. 김 대통령과 노 당선자는 ‘지는 달’과 ‘뜨는 해’와 같은 입장. 양측의 이견이라기보다 노 당선자가 점차 자기 색깔을 내보이며 현 정부와의 차별성을 과시하는 중이다.

사실 노 정권의 출범은 외형상으로는 민주당의 재집권이며 DJ 친위세력의 정권 재창출이다. 노 당선자도 선거기간 내내 햇볕정책 등 DJ정부 정책의 비판적 승계를 공언하며 개혁작업 완수를 위한 적임자임을 강조했다. 하지만 막상 당선이후 사정은 좀 달라졌다.

노 당선자 진영에서부터 민주당의 승리보다는 노무현의 승리를 내세웠고, 당내에서도 동교동계를 비롯한 지도부를 구 주류로 몰아붙이며 틈을 내주지 않고 있다. 노 당선자 진영에서는 이들 반노ㆍ비노파들에게 끔찍하게 시달렸던 악몽만 각인돼 있다. 청와대도 그리 우군(友軍)이 아니었다. 특히 박지원 비서실장에게는 앙금이 남아있는 상태다.

현 정부에 대해 별다른 빚이 없는 노 당선자 측에서 보면 DJ 정권과 빨리 단절하는 것이 ‘참여정부’의 신선한 이미지를 부각시키는데 도움이 될 거란 판단을 할 수 있고, 당내 상황도 구 주류를 물갈이 시켜야 개혁 세력들이 당권을 장악해 노 당선자의 국정운영에 힘을 실어줄 수 있다는 계산이 가능하다.

이 때문에 정치권 일각에서는 “노 당선자 측이 미묘한 현안마다 청와대와 조금씩 다른 해법을 내놓는 것은 현 정권 청산작업의 신호탄이 아니냐”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盧, 대북송금문제에서 청와대 정면 거론

김대중 대통령은 2월14일 전격적으로 청와대에서 대북송금 문제와 관련한 대국민 성명을 발표했다. 이 자리에는 실무책임을 맡았던 박지원 비서실장과 임동원 특보도 함께 했다.

이를 놓고 한나라당은 기대에 못 미치는 수준이라며 특검제를 계속 요구하고 있지만 노 당선자 측은 “그만하면 됐다”는 긍정적 평가를 내렸다. 문희상 비서실장 내정자도 “미흡, 흡족을 떠나 최종판단은 국회에서 할 것”이라며 “국민과 미래를 생각해 국회에서 초당적으로 합의해 마무리했으면 좋겠다”고 밝혔다.

언뜻 보면 청와대와 노 당선자 측이 보조를 같이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속내를 들여다보면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다.

“통치행위의 일환”이라며 줄기차게 정치적 해결을 강조하던 김 대통령이 퇴임을 불과 10여일 앞두고 급작스럽게 TV 카메라 앞에 서게 된 배경도 역시 노 당선자 측의 압박이 주효했다.

노 당선자는 “청와대가 성의를 보여야 한다”고 압박했고, 유인태 정무수석 내정자는 아예 “청와대의 무성의한 태도로 인해 특검제로 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공격하기도 했다. 김 대통령과 오랜 정치적 지기였던 김원기 민주당 고문도 성역 없는 사법처리를 운운하며 “김 대통령의 국회증언도 해결방법”이라고 직격탄을 날렸다.

‘떠오르는 해’ 측의 공세가 이 정도였으니 김 대통령의 심기도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다. 우여곡절 끝에 대국민 성명이란 강수(强手)를 두었지만 김 대통령은 그간 여러 경로를 통해 섭섭한 심정을 토로했다.

11일 청와대 국무회의에 이례적으로 불참했으며, 10일 저녁에는 민주당 한화갑 대표와 김영배 전 국민회의 총재권한대행, 이한동 전 총리 등 과거 DJP 공동정권의 대표급 인사들과 만찬을 함께하며 대북송금 파문에 대한 ‘속내’를 적지 않게 털어놓은 것으로 알려졌다.

비록 김 대통령의 성명이후 양측의 입장차가 어느 정도 좁혀지긴 했지만 아직도 꺼지지 않는 불씨가 남아 있다. 대국민 성명에서 김 대통령은 임동원 특보가 노 당선자를 만나 대북 송금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고 발표했지만 노 당선자 측의 이낙연 대변인은 “두분이(노 당선자와 임 특보) 만난 적은 있으나 설명 수준과 내용은 구체적이지 못했다”고 말했다.

유 정무수석 내정자도 “임 특보가 충분한 설명을 하지 않아 노 당선자가 별 내용을 보고받은 적이 없다고 했다”고 밝혔다. 이 문제가 특검제로 치닫게 되면 경우에 따라 노 당선자 측으로 화살이 집중되더라도 빠져나갈 구멍은 단단히 확보하고 있는 셈이다.

또 청와대의 전격적인 성명 발표도 노 당선자 측과 전혀 조율이 없었다. 이 대변인은 “나도 오늘 아침 TV자막을 통해 김 대통령의 대국민성명 발표 사실을 알았다”고 말했을 정도. 이를 놓고 노 당선자 측 관계자는 “그런 중대 사안을 발표 30분전에 알려주는 게 어디 있느냐”라며 적잖이 불쾌해 했다.


‘찬밥인사’에 민주당 구 주류 불만

노 당선자 측에서 현 정권과의 차별화를 위한 ‘줄긋기’는 각종 인사발표에서 확연히 드러났다. 청와대로 들어갈 핵심 보직에는 통추와 PK, 386사단 등 당연히 노 당선자의 측근들로 메워졌고 당내에서도 구 주류들은 차기 총선의 공천마저 불투명한 상태로 전락했다.

사무총장, 정책위의장은 물론 미국과 러시아, 영국 등으로 간 대통령 특사 일행 어디에도 구 주류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당의 한 관계자는 “동교동계 등 구 주류 중 당으로 출근하는 의원은 한화갑 대표 1명뿐”이라고 소개했다.

상층부만 그런 게 아니다. 청와대 비서실 진용이 완전 물갈이되면서 기존 직원들의 불만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한 관계자는 “여야 정권교체가 이뤄진 98년에도 김영삼 정부시절 직원 중 30% 가량은 그대로 근무했는데 한식구로 여긴 노 당선자 측은 기존 직원들을 모두 교체하려는 것 같다”고 서운함을 표시했다.

일부 하위직 직원들 사이에서는 “운전기사까지 데리고 온다는데 정권재창출인지 정권교체인지 모르겠다”고 말할 정도다.


인수위 강공에 현 정부 측 볼멘소리

김-노 갈등의 시발점은 사실 인수위의 출범이다. 인수위는 업무 개시와 함께 공적자금 부실문제 등 현 정부의 미진한 정책에 대해 정권교체 수준 이상의 맹폭을 가했다. 새 정부 출범 전에 ‘반드시 털 것은 털고 가야 한다’는 입장으로 몰아붙였다.

인수위의 한 관계자는 공적자금 문제와 관련, “우리가 정부에 요구하는 것은 부실 규모가 얼마인지, 그것이 자구노력으로 풀릴 사안인지, 새로 국민 부담을 지워야 하는 상황인지를 있는 그대로 말해 달라는 것이다”라며 “하지만 정부 측의 성의 있는 답변을 얻지 못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공적자금의 진상을 정확히 공개해 놓지 않으면 자칫 그 부담을 새 정부가 모두 떠안게 될 것이라는 점을 우려하면서 이 문제는 DJ정부의 ‘총체적인 부실’이라고 공격하고 있는 것.

이에 정부측은 “인수위가 명분에 얽매여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고 있다”며 강한 불만을 토로하고 있다. 전윤철 부총리 겸 재경부 장관도 “덮을 문제는 덮고 가야 하는 것 아니냐”며 간접 반박했다고 한다.

또 ▦경인운하 백지화 번복 ▦선거연령 조정 ▦철도 민영화 ▦이동통신 전화번호 통합여부 ▦한총련 합법화 등의 문제에서도 인수위는 우월한 지위를 앞세워 정부 측에 압력을 가했다. 당연히 그때마다 정부 측은 인수위에 끌려다녔다.

특히 DJ정부가 의욕적으로 추진했던 제2건국위 활동마저 노 당선자가 “실패한 정책”으로 규정하면서 사실상 해체의지를 밝혀 DJ 세력의 반발을 샀다.

상황이 이쯤되자 이번에는 민주당 구 주류 측이 나섰다. 한화갑 대표는 지난 7일 국회연설에서 노 당선의 개혁 추진과 관련, “현실이 감당할 수 있는 속도와 시간, 폭의 조절이 필요하며 장기적 점진적 자율적으로 추진해야 한다”며 “향후 5년간 과욕을 부리지 말고 중장기적 시각과 원칙에 입각해 지혜로운 선택과 조정을 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한 대표의 연설에 이어 같은 구 주류의 이윤수 의원은 보다 강한 톤으로 인수위를 질타했다. 10일 국회 대정부 질의에 나선 이 의원은 “인수위가 초법적 월권행위를 하고 있다”며 “마치 2개의 정부가 있는 것처럼 인수위가 권력기관으로 인식되며 혼란을 초래하고 있다”고 지적하고 나섰다. 같은 당 의원이 새 정부의 근간이 될 인수위를 공격하고 나선 것은 이전 정권에서는 전혀 볼 수 없던 모습이다.


盧 측, 마음은 굴뚝 현실은 난감

노 당선자 측의 현 정부와 차별화 시도는 역대 정권마다 행해지는 자연스런 정치행태다. 정부이양 수준인 전두환→노태우 교대 시절에도 5공청산의 갈등은 전씨의 백담사행으로 끝났다. 노태우→YS 교체때에는 역사바로세우기 차원에서 노씨가 영어의 몸이 되기도 했다. 이번 DJ→노무현 교체도 상황은 비슷하게 전개되고 있다.

노 당선자 진영에서 보면 전 정권의 청산만큼 중요한 현안도 없다. ‘3김’ 정치를 터는 길만이 구태를 벗고 새 정치 새 시대로 나가는 지름길로 인식되고 있다.

하지만 이런 당면과제에는 내년 17대 총선이란 현실이 가로막고 있다. 노 당선자 측에서 DJ 청산을 속도있게 진행할 경우 자칫 호남민심이 등을 돌리게 된다. DJ 적자인 민주당 구 주류에 대한 차별대우가 심해져 이들이 집단 탈당하거나 새로운 호남 정당을 만들고 나설 경우 내년 총선을 장담할 수 없다.

호남이 등을 돌리고 적지인 영남권이 한나라당을 계속 옹호한다고 보면 노무현 신당이 아무리 개혁성을 외치더라도 총선 참패는 불보듯 훤하다. 과거 YS는 TK의 전폭적 지지를 등에 업고 당선됐으나 PK 우위정책을 지속하다 15대 총선 때 이 지역에서 자민련에게 참패를 당했다.

노 당선자 측도 마찬가지다. “누구 덕에 당선됐느냐”란 소리가 새어 나오면 나올수록 내년 총선이 걱정되는 상황이다. 이 때문에 전 정권 청산에 대한 마음은 굴뚝같지만 현실을 감안한 속도조절론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염영남 기자

입력시간 2003/02/25 15:57


염영남 liberty@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