大中華 자본을 끌어들여라

2005년 10월 '세계화상대회 서울개최'

“중국 기업인(화상ㆍ華商)들을 위한 비즈니스 네트워크의 강화(Making the Biznet for Chinese)”.

2조 달러의 유동자산을 보유한 것으로 알려진 화교 기업인들의 최대 비즈니스 행사인 제8차 세계 화상(華商)대회가 2005년 10월 서울에서 열린다.

이 대회를 추진 중인 사단법인 한국화교경제인협회(화경회)의 장경국 부회장은 2월 14일 “국내에 거주하고 있는 2만3,000여명의 화교인들이 힘을 합쳐 해외 화상들에게 우리의 변화상을 보여줄 기회”라며 “참여 기업인들이 비즈니스에 실제로 도움을 주는 프로그램을 계획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도 그럴 것이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차이나타운 건설에 실패한 한국 화교들이 세계화상대회를 연다는 것은 놀라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화상대회'란 세계 중국화교 비즈니스맨들의 상호 네트워크 강화를 통한 이익 창출과 거주 국가 경제 발전 기여를 위해 싱가포르 리콴유(李光耀) 전 총리의 제안으로 싱가포르 중화총상회의 주도로 발족했다.

이 대회는 1991년 싱가포르에서 처음 개최됐고 2년에 한 차례씩 열리고 있다. 1993년 홍콩, 95년 태국 방콕, 97년 캐나다 밴쿠버, 99년 호주 멜버른, 2001년 중국 난징(南京)에서 각각 개최됐다. 오는 7월27일에는 말레이시아 콸라룸푸르에서 열릴 예정이다.


2조달러에 달하는 거대유동자금

중국 경제의 폭발적인 성장에 따라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화상들의 중국 투자에 많은 관심이 집중되면서 화상대회는 점점 그 규모와 위상이 높아지고 있다. 실제 전세계 화교기업들이 기록하는 연 매출은 약 6,000억 달러이고, 굴리는 유동자금만도 경제대국 일본의 유동자금에 버금가는 2조 달러에 이른다.

장 부회장은 “외환위기 당시 해외화교 자본을 끌어들일 수만 있었더라도 IMF 사태와 같은 위기는 닥치지 않았을 것”이라고 화교의 힘을 강조했다.

이번 제8차 대회개최지 선정을 위한 유치 경쟁도 역대 어느 대회 보다 치열한 각축전이 벌어졌다고 한다. 장 부회장은 “유치전에서는 막판까지 우리나라의 화경회와 일본 중화총상회가 열띤 경쟁을 벌였고, 접전 끝에 서울로 결정됐다”고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세계 화상대회는 그러나 규모나 영향력에서 단순한 화교들만의 잔치는 아니다. 2001년 중국 난징 대회에서는 전 세계 약 80개국 5,000명이 참가했고 대회 개최를 위해 중국 정부는 난징 국제전시센터 건립을 비롯, 개최 경비로 약 11억 달러를 투자했다.

중국의 주룽지(朱鎔基) 총리 등 당시 최고위 정부 인사들이 참석, 직접 강연을 하는 등 최고의 국제 비즈니스 행사로 자리매김했다. 이 대회는 전 세계 화상간의 교류와 협력, 만남의 장뿐만 아니라 화상 경제권의 발전 및 세계경제문제를 다루는 포럼, 비즈니스 교류를 위한 무역 박람회 등으로 구성돼 있다.


차이나타운 건설 계기

화상대회를 유치한 한국 화교들의 다음 목표는 차이나타운(中國城) 건설이다. 화상대회와 차이나타운은 두 가지 모두 해외 화교자본의 국내 유치라는 고리로 연결돼 있다.

최근 대통령직 인수위원회에서는 경제특구인 인천 송도에 중국자본을 유치하기 위한 계획을 발표한 바 있다. 하지만 지난 2000년 인천시가 차이나타운 부지로 결정한 송도 20만평 매립지는 아직까지 투자자를 기다리며 허허 벌판 상태로 비어있는 상태다.

인천 중구청은 100년 이상의 화교정착 역사를 가진 북성동 일대를 중화가(中華街)로 지정했지만 10여 곳의 음식점을 제외하고는 차이나타운의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다. 장 부회장은 “한국내 화교들의 경제력은 미미한 상황”이라며 “해외 화교 자본을 끌어들여 한국과 화교가 함께 발전하는 데 관심이 높다”고 말했다.

110년 한국 화교역사
   


내쫓은 정책, 제한풀리며 다시 한국행

우리나라에 화교 사회가 정식으로 형성된 것은 110여년 전인 1882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임오군란 당시 중국 화상들이 처음으로 이주해 왔다.

청(淸)은 조선을 돕기 위해 3,000여 명의 군대를 파견했는데, 이때 화상 40여명이 건너와 한국 화교의 시조가 됐다. 양국간에 무역관계가 형성된 1894년부터 화교들의 정착이 시작되고 산둥반도와 인천항 사이에 정기적으로 배가 운항되면서 왕래가 빈번해졌다.

인천시 선린동 일대의 5,000평 부지에 중국 조계지가 세워지고 중국의 건축 방식을 본뜬 건물이 늘어나면서 최초의 차이나타운이 형성됐다. 서울과 인천을 근거지로 직물과 잡화, 피혁, 서구 상품을 수입해 팔고, 조선 토산품을 반출하는 상인들이 주류를 이뤘다.

조계 지역이 설립되면서 1883년 48명이던 화교 수가 1년 후에는 5배에 가까운 235명으로 늘었고 1890년에는 약 1,000명에 달했다. 1920년대 10년 동안 화교의 경제력은 막강했다.

서울과 인천에 흩어져 있던 화상들은 비단, 옷감, 면화, 양식, 고추, 마늘 등 각종 토산품을 중국에서 대량으로 수입, 한국의 전역으로 판매했다. 1923년 조선총독부의 통계에 따르면 서울, 인천에 거주한 화교 수는 6,000명에 이르렀고, 40년간 중국으로 보낸 돈은 1,000만엔에 달했다.

해방 후 정치적 혼란기가 화상들의 전성기. 기존의 무역망을 활용한 화상 무역은 1946년 전체 수입총액의 82%, 48년에도 절반이상(52.5%)를 차지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화교사회의 호황은 1948년 한국정부가 수립되면서 막을 내리기 시작한다. 한국정부의 각종 제한과 차별 대우로 화교사회는 점차 위축됐다.

특히 1948년 수립된 이승만 정권이 외국인의 입국을 허용하지 않음으로써 화교의 한국 유입은 종식됐다. 또 1949년 중국대륙에 들어선 모택동 정권은 이주억제책을 실시해 1년에 한번 있던 한국 화교의 고향방문도 끊어졌다. 화교 무역의 배경이던 중국과의 교역이 불가능해지자 화교들은 토착화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길을 가시밭길이었다. 자유당 정부가 한국전쟁 직전 전국에 내린 창고 봉쇄령으로 화상은 큰 타격을 입었고, 두 번의 화폐개혁으로 장롱에 든 현금은 휴지조각으로 변하고 말았다.

1961년 ‘외국인 토지소유 금지법’에 따라 토지를 소유한 외국인은 정부의 승인을 받아야 했다. 그러나 많은 화교들은 승인을 얻지 못하고 싼값으로 토지를 내다팔았다. 이 법은 1993년에야 폐지됐다.

또 ‘외국인 토지취득 및 관리에 관한 법’(1970년)과 ‘외국인 출입관리법’ 등으로 화교들은 한국 정부의 정신적 물질적 차별대우를 견디다 못해 한국을 떠나고 말았다. 당시 미국으로 건너간 요식업체만 2,000여개에 이른다. 또 호주, 대만 등지로 많이 이주했다.

한국화교 출신의 연합체인 한화연의회(韓華聯議會)에 따르면 60년대 말까지 4만 명을 헤아렸던 화교들 가운데 절반 이상이 70년대 이후 외국으로 이주했는데 미국의 LA지역에만 한국 화교출신자 8,000 여명이 모여 산다.

장경국 한국 화경회 부회장은 “화교인에 대한 각종 제한조치가 풀리면서 한국으로 역이민하려는 화교 출신자들이 늘고 있다”며 “화상대회를 전후해 인력 양성을 위한 프로그램을 가동하면 그 수는 더욱 늘어날 것”이라고 말했다.

 

 

장학만 기자

입력시간 2003/02/26 16:50


장학만 local@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