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식의 문화읽기] 사소한 것들의 유쾌함

‘번쩍하는 황홀한 순간’은 성석제의 세 번째 장편(掌篇)소설집이다. 원고지 20매 안팎의 소설을 손바닥 장(掌)자를 써서 장편소설이라고 하는데, 컴퓨터에 비유를 하자면 단편소설의 압축파일이라고 할 수 있다. 성석제는 손바닥 소설집 ‘그곳에는 어처구니들이 산다’와 ‘재미나는 인생’에서 특유의 입담으로 이미 우리의 배꼽을 빼놓은 전력이 있다.

장편이라는 독특한 형식이 필요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장편이 아니고서는 표현할 수 없는 그 어떤 측면이 존재하기 때문일 것이다. 일반적으로 단편은 하나의 ‘사건’을 중심으로 단일한 인상과 주제를 전달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반면에 장편(長篇)은 사회역사적 환경과의 관계 속에서 삶의 전체성을 재현하고자 한다.

그렇다면 장편(掌篇)은 어떠한 양식일까. 장편은 콩트(conte)로도 알려져 있는데, 삶의 한 순간 내지는 한 단면을 예리하게 포착하는 짧은 소설이다. 기발한 발상과 압축적인 묘사와 반전(反轉)이 기본적인 구성 요소이다.

성석제의 장편소설에는 유머(humor)나 기지(wit)만으로 설명되지 않는, 그 어떤 휴머니즘이 전제되어 있다. 역사에 황금시대가 존재했던 것처럼, 모든 사람의 인생에는 순금처럼 빛나는 순간이 있다는 것이 작가의 기본적인 생각이다. 아무리 너절한 인생이라도 반짝하고 빛나는 순간만큼은 기록되거나 기억될 가치가 있다.

인생은 비슷비슷한 것처럼 보이지만, 각자의 삶 속에는 고유함이 내재되어 있다. 삶의 모든 순간이 반짝이지는 않는다. 하지만 삶의 고유함이 시(詩)적인 광채를 발휘하는 순간은 그 누구에게라도 분명히 존재한다. 삶이 빚어내는 시적인 광채를 기록하고자 한다면, 장편이라는 독특한 양식이 가장 적절하지 않았을까.

이번 소설집에서 가장 재미있었던 작품은 ‘누가 염소의 목에 방울을 달았는가’였다. 밤새 들과 산을 쏘다녔지만 야생동물을 잡지 못하자 목에 달린 방울을 떼어내고 염소를 사냥하는 불법사냥꾼들의 이야기이다. ‘염소 목의 방울 떼기’가 핵심이라 할 터인데, ‘고양이 목에 방울 달기’의 패러디라는 사실을 한 눈에 알아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왜 염소 목에서 방울을 떼야 했을까. ‘불법’사냥꾼으로서의 자존심 때문이다. 불법사냥꾼에게는 몇 가지 원칙이 있다. 총을 소지할 수 있는 기간이 법으로 정해져 있지만, 불법사냥은 아무 때나 총을 소지해야 한다.

또한 불법사냥은 법에서 정해준 수렵장이 아니라 자기가 사냥하고 싶은 곳에서 해야 한다. 당연히 수렵비는 내지 않는다. 총도 그냥 사용하면 안 된다. 공기총에 망원렌즈라도 달아서 M16 수준으로 업그레이드해야 한다.

이 가운데서 불법사냥의 핵심은 오로지 야생조수만 사냥해야 한다는 점이다. 가축을 사냥하는 것은 법에서 인정한 도축(屠畜)과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염소의 목에서 방울을 뗀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방울의 존재여부야 말로 가축과 야생동물을 가름하는 표지이기 때문이다.

‘고양이 목에 방울 달기’가 권력에 대한 공포와 무기력을 환기시킨다면, ‘염소 목의 방울 떼기’는 법을 어기기 위해서는 지켜야 할 다른 법칙들이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법을 어기는 데에도 법도가 있다는 역설이, 소재의 불량함을 훌쩍 뛰어넘는다. 천재적인 사기꾼의 일생을 다룬 영화 ‘캐치 미 이프 유 캔’을 보면서 느꼈던 페이소스가 이와 비슷한 것이 아니었을까.

불법에도 경지(境地)가 있다는 사실의 확인이 참으로 눈부시다. 진정한 불법 또는 예술적 경지의 불법을 추구했던 사람들의 모습이란, 도덕적인 판단을 일시적으로 괄호친 상태에서라면, 삶이 빚어내는 시적 광휘에 해당하지 않겠는가.

개인적인 감상을 말하자면, ‘번쩍하는 황홀한 순간’에는 별다른 재미를 느낄 수 없는 작품들도 적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자리에서 책을 다 읽었다. 아마도 성석제가 보여준, 비스듬하게 놓여진 웃음 때문이었을 것이다. 마주 보고 서있는 대립의 방식이 아니라, 독자의 기대지평을 살짝살짝 비켜나가며 제시되는 삶의 편린들이 참으로 인상적이다.

비스듬한 지점들을 따라 움직이며 미끄러짐을 즐기는 과정이 얼마나 눈물나게 유쾌하면서도 사소한 것인가를 보여주는 작품들. 너절한 인생들에 대한 허탈한 이야기를 읽으며 ‘허허’하고 웃고 말았던 것은, 삶의 배후에 놓여진 텅 빈 중심의 존재를 넘겨다보는 경험을 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입력시간 2003/03/03 1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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