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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벌 손보기] SK 다음은 어디?

최태원 회장 배임혐의로 구속, 진의파악에 부심

전격적이었다. 그래서 충격도, 파장도 컸다. SK그룹에 대한 검찰수사는 조금의 머뭇거림도 없이 속전속결로 진행됐다.

최태원 SK㈜ 회장이 서울 서초동 서울지검 청사에 소환된 2월 21일 오전. 최 회장은 “능력이 부족해서 그렇게 됐다”며 아무런 저항 의지도 보이지 않았다. 다음 날 오후 7시40분 검찰 수사관들과 함께 서울지검 청사 1층에 모습을 드러낸 최 회장은 굳은 표정으로 서울구치소로 직행, 영어의 몸이 됐다. 검찰이 압수수색을 위해 SK그룹 구조조정본부(구조본)를 ‘급습’한 지 불과 5일만이었고, 노무현 새 대통령의 취임 바로 사흘 전이었다.

‘SK 파장’은 타오르는 불길처럼 삽시간에 재계 전체로 번졌다. 재계는 이번 수사의 진의에 온통 촉각을 곤두세웠다. SK에 대한 단발성 수사라면 다행이겠지만, 그렇게 믿기에는 어려운 정황들이 곳곳에서 발견되고 있다.

재계는 당선 이후 줄곧 “재벌의 폐해를 없애겠다”고 공언해 온 노 대통령이 SK를 첫 제물 삼아 ‘재벌과의 전쟁’을 시작한 것이 아니냐는 강한 의구심을 보낸다. “그렇다면, 혹시 다음은 우리가 아닐까”라는 조바심과 함께.


“재벌 손보기 신호탄”

검찰은 최 회장에게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 상 배임 혐의를 적용했다. 부당 내부 거래 등을 통해 계열사 등에 총 2,000억원 이상의 손실을 입혔다는 것이 골자다. 검찰에 따르면 최 회장은 지난해 3월 그룹 지배권 확보를 위해 자신이 보유 중이던 워커힐호텔 주식(325만주)을 계열사 SK CC가 보유하고 있던 SK㈜ 주식(646만주)과 맞교환토록 하면서 비상장이던 워커힐호텔 주가를 시가보다 높게 평가, SK CC에 716억원 상당의 손해를 입혔다.

또 같은 방식으로 최 회장으로부터 워커힐 호텔 주식 60만주를 사들인 SK글로벌 역시 243억원의 손실을 입었다.

수사 시작의 계기이자 참여연대 고발 사안인 JP모건과의 이면 계약 손실에 대한 혐의도 인정됐다. 검찰은 최 회장이 1999년 SK증권과 JP모건 간의 이면 계약 과정에 개입, 옵션 이행금을 SK글로벌 현지법인들이 부담토록 해 SK글로벌 등에 1,112억원의 손실을 끼친 것을 확인했다.

이번 SK에 대한 검찰 수사의 배경을 놓고 해석이 분분하다. 우선 당사자인 SK는 물론 재계 내부에서는 ‘새 정부의 기획 사정설’에 상당히 무게를 두는 분위기다. 그룹 총수 격인 최태원 SK㈜ 회장을 비롯해 회사 임원 17명을 무더기 출국금지 조치한 것이나, 50여명이 넘는 수사관을 동원해 동시다발적으로 예고 없는 압수수색을 실시한 것은 누가 봐도 이례적이다.

재계 3위권 그룹의 총수에 대한 사법처리를 ‘윗선’의 개입 없이 검찰이 단독으로 진행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라는 관측이다. 왜 하필 정권 교체기인 이 시점에, 그것도 무언가에 쫓기듯 수사를 진행시켰느냐에 대해서도 의혹이 제기된다. 새 정부가 이번 수사를 ‘기획’까지 하지는 않았더라도 적어도 묵인 내지는 방조 등의 사전 교감은 있지 않았겠느냐는 것이다.

야당인 한나라당도 시각을 같이 한다. 한나라당 김영일 사무총장은 최근 주요당직자 회의에서 “시민단체의 고발이 있었다지만 전례 없는 재벌 회장실 압수수색과 총수의 사법처리 방침을 검찰의 독자적 판단으로 믿는 사람은 드물 것”이라고 일침을 놓았다.


“검찰 위상 재확인 돌파구”

이와는 달리 검찰 주변에서는 독자 수사 가능성을 높게 보는 분위기다. 검찰 안팎에서 검찰 개혁론이 거세지자 검찰 위상을 재확인하기 위한 돌파구로 ‘재벌 수사’라는 카드를 뽑았다는 분석이 그 중 하나다.

법조계 한 인사는 “궁지에 몰린 검찰이 국면을 전환하기 위해 SK를 제물로 삼은 것이 아니냐”고 해석했다. 일각에선 새 정부의 ‘반(反) 재벌 정책’에 편승해 검찰 스스로 ‘친 정권적인 수사’를 자처한 것이라는 해석까지 내놓는다.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통제불능 속 독자 행동’이라는 시나리오도 공공연히 떠돈다. 사실상 사령탑이 부재한 상황에서 일선 검찰이 “수사를 하겠다”고 나서면 누구도 말릴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것이다.

왜 SK가 타깃이 됐느냐에 대해서도 설이 구구하다. SK 내부에서는 “삼성은 너무 몸집이 크고 강해서 손대기 힘들었을 것이고, LG는 대통령 아들이 근무하는 곳이니 결국 첫 타깃으로 SK 밖에 없지 않았겠느냐”는 자조가 흘러나온다.

지난 12ㆍ19 대선에서 SK그룹이 야당 후보를 적극적으로 지원했기 때문에 재벌 손보기 차원에서 걸렸다는 ‘정치적 보복설’까지 나돈다. 압수수색 시점이 손길승 그룹 회장이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 직에 선출된 직후라는 점에 대해서도 억측이 난무한다.

대통령직 인수위원회와 갈등 관계를 형성했던 전경련에 대한 기선 제압 차원이라느니, SK그룹이 전문경영인 체제에서 다시 최씨 일가 재벌 오너 체제로 전환되는 것을 차단하기 위한 조치라느니….


다음 타깃 1순위는 한화?

SK 사건은 변칙 증여와 상속, 부당 내부 거래 등 재벌의 폐해를 모두 담고 있는 함축적인 사건이다. 이 때문에 재계에서는 수사 의도야 어쨌든 새 정권 아래서 다른 기업들도 결코 자유로울 수 없을 거라는 위기감이 증폭되고 있다.

앞에서는 “SK 외에 다른 기업은 없다” “최 회장의 개인 비리에 대한 단죄일 뿐”이라고 손사래를 치는 검찰도, 뒤에서는 “SK 수사가 끝나면 다른 기업도 추가 수사를 할 수 있는 것 아니냐”는 얘기를 흘리기도 한다.

후계 구도를 가시화하고 있는 그룹들은 겉으로 내색은 않으면서도 혹시 닥칠 수 있는 사태에 대비하는 등 비상 체제에 돌입했다. 특히 SK그룹에 대한 수사가 참여연대의 고발에서 시작됐다는 점에서 참여연대에 고발을 당한 삼성, LG, 한화, 두산 등 주요 그룹들은 발을 동동 구른다.

재계나 증권업계에서 다음 수사 대상 1순위로 유력하게 거론되는 곳 중 하나는 한화다. 지난해 10월 참여연대로부터 “한화, 한화유통, 한화석유화학 등 3개 계열사가 대한생명 인수를 위해 주식 거래를 통해 이익을 부풀려 부채 비율을 축소하는 등 조직적으로 분식회계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고발돼 이미 임원진이 2월 초 서울지검에 소환돼 조사를 받았다.

새 정부가 제2금융권의 지배구조 개선에 강한 의지를 보이고 있기 때문에 대한생명 인수 과정에서 제기됐던 숱한 의혹들이 본격적으로 수사 대상에 오를 수 있다는 관측이다.

두산그룹 역시 전전긍긍하고 있다. 참여연대가 지난해 10월 해외 발행을 명분으로 한 신주인수권부사채(BW)를 편법으로 국내에서 발행, 소액주주에게 피해를 끼치고 지배주주 일가의 편법 증여 수단으로 활용했다며 금융감독원에 조사를 요청해 놓은 상태다.

회사측이 우려하는 것은 고(故) 배달호씨 분신 사태로 야기된 노사 갈등이 장기간 계속돼 새 정부와의 관계가 그다지 원만하지 못하다는 점. 게다가 1차 타깃이 전경련 회장이 속한 SK였다는 점에서 박용성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이 속한 두산이 2차 타깃이 될 거라는 근거 없는 루머까지 떠돈다.

상의 관계자는 “두산중공업 노사 분쟁이 계속 세인의 관심을 모으는 상황에서 만일 다른 문제까지 불거질 경우 두산은 물론 상의의 이미지도 크게 훼손될 수 있다”고 우려했다.


메이저 그룹도 전전긍긍

삼성, LG, 현대ㆍ기아차그룹 등 메이저 그룹도 예외는 아니다. 삼성은 ‘재계의 대표’라는 점이 방패막인 동시에 아킬레스건이다. 새 정부가 삼성과 전쟁을 벌이는 것은 수월치 않을 뿐더러 가뜩이나 어려운 경제에 찬물을 끼얹을 수 있는 측면이 있는 한편, 삼성을 손 보지 않으면 재벌 개혁은 불가능하다는 강경 세력의 목소리도 만만치 않은 탓이다.

만약 새 정부가, 아니 검찰이 “삼성을 치겠다”고 작심만 한다면 걸고 넘어질 수 있는 사안은 적지 않다. 우선 이건희 회장의 외아들 재용씨가 삼성SDS의 BW를 인수하는 과정에서의 편법 증여 의혹이 대표적이다.

검찰이 이 사건에 대해 2000년 불기소 처분을 내리긴 했지만 참여연대가 헌법재판소에 헌법 소원을 제기해 놓고, 국세청이 500억원의 세금을 추징하는 등 사건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98년 10월 삼성전자의 부당 내부거래 사건, 99년 삼성자동차 부실 처리 문제 등도 언제든 다시 현안으로 부상할 소지가 다분하다.

삼성 구조본 관계자는 “이번 SK 수사를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만큼 불똥이 어디로 튈 지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는 상태”라고 했다.

LG를 ‘위험 대상 1순위’로 지목하는 이들도 많다. LG의 아킬레스건은 99년 LG석유화학 지분 매각. 참여연대는 1월 말 구본무 회장 등 당시 LG화학 이사들이 99년 회사가 100% 보유했던 LG석유화학 지분 중 70%를 자신들과 구 회장 일가 친척들에게 적정가보다 현저히 낮은 가격에 팔아 수천억원의 이득을 챙기고 회사에는 800억원 가량의 손실을 끼쳤다며 주주대표 소송을 제기했다.


몸 낮춘 재계, 긴장하는 정치권

시시각각 죄여 드는 압박에 재계는 일단 잔뜩 몸을 낮춘 양상이다. 전경련, 상의 등 경제5단체 조사담당 임원들은 검찰이 SK 압수수색에 나선 직후 회의를 열고 집단소송제, 출자총액제한제도, 주5일근무제 등 새 정부의 주요 경제 정책을 원칙적으로 수용하겠다고 의견을 모았다. 불과 수일 전만 해도 수용 불가 입장을 고수했던 것과는 사뭇 대조적이다.

손길승 SK 회장이 전경련 회장에 취임한 뒤 처음으로 열린 2월 20일 전경련 회장단 회의에서도 이런 분위기는 감지됐다. 여느 때 같으면 시끌벅적했을 이번 모임은 주요 그룹 회장들이 대거 불참한 가운데 조용하게 치러졌다. 수사 대상에 오른 손길승 회장은 “심려?끼쳐 죄송하다”며 말을 아꼈고, 박삼구 금호 회장 등 다른 회장들도 “나한테 묻지 말라”며 일체 언급을 피했다.

정치권도 이번 싸움의 불통이 어디로 튈 지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최 회장의 집무실 등에 대한 압수수색 과정에서 확보한 30박스 분량의 서류에서 ‘SK의 비자금 장부’가 확보됐다는 설이 파다한 탓이다.

만약 비자금 장부가 확보됐다면 새 정부가 언제, 어떤 목적으로도 사용할 수 있는 ‘전가의 보도’가 될 것임이 자명하다. 정치권 한 관계자는 “재계에 대한 경고는 충분히 한 만큼 다음 타깃은 오히려 정치권, 아니 야당이 될 수 있다”고 우려했다.

이영태 기자 ytlee@hk.co.kr

입력시간 2003/03/03 1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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