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여자가 사는 법] 메이크업 아티스트 조성아

내면의 美 이끌어 내는 독특한 화장법

자신의 인터뷰 기사가 나갈 코너의 이름을 보고 ‘왜 하필 여자?’라고 반문하는 조성아(35ㆍ조성아 뷰티 폼 대표)씨는 연애 할 때를 빼고는 자신이 여자라는 것을 느끼지 못한다. 단 한번도 여자라서 불편하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

“철들면서부터 이 일을 좋아했어요. 오히려 남자였다면 이 일을 하기가 어려웠을 걸 생각하면 여자로 태어난 게 정말 행운이죠.”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누구나 인정해주는 직업으로 삼다니 좀처럼 누리기 어려운 행운이다. ‘메이크업아티스트’라는 새로운 영역을 만들어 내며 언제나 최초, 최고라는 수식어를 달고 다닌 그녀. 그녀의 삶에는 우리 사회의 관습과 편견들이 들어설 자리가 없다.


6세, 미스코리아 총 기획자로 데뷔

엄마가 외출 한 집. 보자기와 스카프, 화장대 위의 이름 모를 화장품, 마술상자 같은 장롱 속의 온갖 물건들. 혼자 남은 여섯 살 여자 아이가 동네 아이들을 끌어 모아 일을 벌였다. 아이들의 얼굴에 화장을 하고, 스카프와 보자기로 무대 의상을 입혔다. 친구들은 무대 위를 멋지게 걷고, 여자아이는 심각한 얼굴로 심사하는 일에 골몰한다.

“온 집안이 쑥대밭이었죠.(웃음) 중요한 것은 부모님께서 야단을 치지않고 칭찬을 해 줬다는 거예요. 제 직업이 제가 가진 걸 보여주고, 표현하는 일이잖아요. 이건 자신감 없이는 안 되는 일이거든요.”

타고난 마니아 기질과 무엇이든 감각적으로 느낄 수 있는 것이라야 신뢰한 여자아이는 남들이 쉽게 버리는 것 속에서도 특별한 의미를 찾아냈다. 그 에너지 원천은 바로 호기심이었고, 부모의 열린 시선은 자양분이 되었다. 얌전하고, 말 잘 듣는 아이가 착한 아이라는 기준에 자유로울 수 있었던 여자아이는 이미 그때부터 표현하는 일에 대해 거리낌이 없었다.

“아유, 우리 딸 참 잘했네!”하는 엄마의 칭찬은 가상미스코리아 대회에서 한 발 나아가 선 보러 가는 이모의 진짜 머리를 만져줄 수 있는 자신감으로 자라났다.

“제가 초등학교 때 일이에요. 거기에서 이미 나는 이걸 잘 한다는 자신감이 붙어버린 거예요. 그걸 깨닫는 순간부터는 누구와도 경쟁이 안 되는 거죠. 커리어 우먼은 어릴 때부터 만들어져야 되요. 부모가 좋은 점들을 칭찬해주고, 오직 그가 가진 장기를 인정해줄 때, 그 사람이 사회적으로 성공할 수 있는 기틀이 마련되는 거예요.”


19세, 공부는 15등급 그림은 1등으로 미대 진학

‘남과 같은 것’이 싫었던 여자아이에게 남들과 똑 같은 교복을 입고, 같은 책상에 앉아 똑 같은 생각을 해야 하는 중ㆍ고등학교생활은 암흑기였다.

“학교생활은 정말 가당찮았죠. 그 당시만 해도 공부 잘하는 애들만 최고였는데, 저는 그렇게 안 자랐거든요. 정말 그림 잘 그린다는 칭찬을 들으며 자랐는데, 아무도 그건 안 알아주는 거예요. 공부에는 아예 관심이 없었으니 커다란 가방을 들고는 다니는데 그 가방은 꽉 차야 가방의 폼이 살거든요. 그래서 식빵 2개를 넣어 가지고 다녔어요. 그 대신 그림은 정말 열심히 그렸어요. 공부는 15등급이지만 그림은 항상 1등이었으니까요.”

그녀에게는 그 시기가 지금까지의 삶에서 가장 어두웠고, 외로웠던 시절이었다.

“학력고사 결과가 나오고, 아이들이 원서를 쓰는데 선생님이 제게는 묻지도 않아요. 그냥 너 이리 와 봐라, 어디 어쩔 건지 말이나 해봐라 하는 거예요. 그래서 저는 한양대학교를 가겠다고 했고, 제 머리 위로 바로 출석부가 날아왔죠. 한양여전은 아무나 가는 줄 아냐고. 그래서 다시 말씀 드렸죠. 한양여전이 아니라, 한양대학교라고.(웃음) 그랬더니 부모님을 모시고 오라는 거예요.”

그녀의 어머니가 학교를 찾아와서야 가까스로 원서를 쓸 수 있었다. “본인의 선택에 후회가 없었으면 좋겠다. 아이가 가고 싶다는 데 써주셨으면 좋겠다고 간곡하게 말씀하셨으니까요. 그렇게 해서 아무도 붙을 거라고 생각지 않았던 제가 실기에서 A+를 받아 합격했어요.”

한 아이가 성장해가는 과정을 지켜보는 부모들은 이미 잘 닦여있고 모두가 안전하다고 말하는 길로만 아이들을 안내하려 한다. 그런데 그녀의 어머니는 아무도 안전하지 않다고 여기는 길로 가는 그녀를 믿어준 유일한 사람이었다.


23세, 아버지로부터 경영수업을 받다

메이컵 아티스트 조성아는 그림을 전공한 미술학도로서 평면의 캔버스 대신 입체인 얼굴을 택했을 뿐 정식으로 메이크업을 배운 적이 없다. “전공은 그림이었지만 그림이란 순수미술의 영역이고, 메이크업은 굉장히 대중적이고 사람들한테 직접적으로 영향을 줄 수 있는 영역이지요. 트렌드를 만들어가는 작업이라서 훨씬 행복한 작업이죠.”

이것이 바로 내 일이라는 확신이 들면서는 완전히 거기에 빠졌다. “여행을 할 때도 메이크업에 대한 정보를 줍기에 여념이 없었으니까요. 각 나라마다 패션의 중심가가 있는데 거기서 그들의 화장법, 머리 모양, 움직임들을 하루 종일 보는 거죠. 당시 우리나라는 천편일률적인 화장법, 일명 ‘미스코리아 화장’이 먹힐 때였는데, 저는 ‘왜 저렇게 화장을 해야 할까, 다 똑 같이’ 하는 의문이 들었어요.

그리고 해외여행을 통해 얻은 자료들을 데이터화해서 제 나름의 컨셉을 정했어요. 소극적이고 맹목적으로 이해되고 싶어 하는 우리나라 여성들 내면의 무궁무진한 것들을 표현해보자는 것이었죠. 메이크업이라는 것은 누가 가르쳐주는 것이 아니라는 결정을 내린 상태에서 메이크업을 시작한 거지요.”

그녀는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아버지에게 빅딜을 제안했다. 1,000만원의 사업자금을 얻기 위해 그녀는 성실하게 아버지를 설득했다. “어시스턴트 1명과 함께 일하는1.5평의 숍이었어요. 그리고 일이 끝나고 나면, 매일 저녁 아버지께 그날의 성과를 보고해야 했어요.

예를 들어 당일의 수입 지출 장부는 물론이고 어시스턴트가 그만두면 왜 그만두었는지 등을 보고해야 되요. 이때부터 ‘매니지먼트가 중요하다. 관리라는 것이 크리에이티브한 작업보다 우위에 있다’라는 말을 항상 들어왔어요.”

매일 밤 이루어진 아버지의 경영수업은 현재의 조성아를 받치는 또 하나의 버팀목이 되고 있다. 그래서 이미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자신의 영역을 갖고 있는 지금도 그녀는 틈만 나면 아버지의 경영수업 노트를 뒤적인다.


언제나 두려운 0.000...1㎜의 실패, 그러나....

조성아가 하면 뭔가 다르다는 입소문은 그녀의 ‘크리에이티브는 철저한 사전 준비에 의해 탄생한다’는 업무 스타일의 결과다. 국내 유명 연예인은 물론 굵직굵직한 광고마다 그녀의 의미 있는 손길이 빛을 발하고, 해외화장품 회사의 제안으로 그녀의 이름을 딴 화장품을 생산하고, 해외 유명 패션쇼의 백 스테이지를 누비는 등 거칠 것 없는 그녀. 그녀에게도 두려움이 있을까.

“0.0001㎜ 를 잘못 그리는 경우도 있죠. 저희 작업은 사진으로 남는데 지나고 나서 찢어버리고 싶을 때도 너무 많아요. 다른 누구보다 제 자신이 만족해야 하는데, 매번 그럴 수는 없어요. 다만 그것을 최소화하는 방법을 찾아가는 거죠. 철저한 준비작업을 해요. 같은 실수를 두 번 다시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죠.”

아티스트로서 흠집을 남기지 않기 위해 빈틈없이 준비하지만 늘 슬럼프를 피해갈 수는 없는 노릇. “피하지 못하면 즐기자고 생각해요. 그리고 빨리 잊어버리기 위해 다른 더 중요한 일을 만들고 집중해요. 깐깐한 구석도 있지만, 낙천적이고 뭔가 하나에 꽂히면 다른 걸 잊어요. 그래서 실수를 더 많이 하는 것 같아요. 하지만 실수를 두려워해선 나설 수가 없어요. 제 직업이 표현하는 일이잖아요.”


그녀 나이 35세, 살아가는 데도 컨셉이 있다!

사랑의 에너지가 결국 모든 것의 에너지라고 말하는 조성아는 자신을 사랑해주고, 자신이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을 갖는 것이 행복의 첫째 조건이라고 말한다. 고등학교 때 미술 선생님을 첫 사랑으로 해서 그녀는 몇 번의 사랑을 경험했다. 물론 현재도 그녀는 사랑받고, 사랑하는 사람이 곁에 있다. 그러나 남자친구와의 사랑, 그리고 결혼에 관해서는 어떤 틀도 없다.

“어떤 사람들은 평범하게 사는 것이 수월하고 당연한데, 또 어떤 사람들은 그렇게 사는 것이 너무나 어려운 것이기도 하다는 얘기죠. 항상 틀을 깨며 살아왔는데. 그렇다고 무책임하거나 방탕한 생활을 한 건 아니에요. 다만 목표가 다를 뿐이에요.”

너무나 에너지가 많은 사람 둘이 살면서 같이 사는 이유를 모를 만큼 평화로웠던 때가 있었다. 그러나 뮤지션인 그는 그녀에게는 친구 같았고, 룸메이트 같았다. 두 사람은 자신들의 관계를 신중하게 고민한 뒤 5년의 결혼 생활을 중단하기로 했다. 더 이상 서로에게 에너지를 줄 수 없다는 사실은 그들이 지닌 에너지의 크기만큼이나 견디기 어려웠다.

“결혼에 대해 아직도 명확하게 결론을 못 내리고 있지만 아이는 갖고 싶어요. 올해 안에는 꼭 낳을 예정이에요. 물론 제가 사랑하는 사람의 아기죠. 잘 키우고 싶고. 또 다른 사랑을 제가 경험하는 거라고 생각하고, 열어놓고 가르치고 싶어요.”

성실하고, 꾸준하다는 덕목이 모든 직업에 다 통하는 성공의 지름길이 아니듯 반드시 양부모 밑에서 자라는 것만이 아이교육에 좋은 환경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항상 똑같은 성실함을 가지고 있었다면 이 직업에선 성공할 수 없었을 거라는 거죠. 오히려 금방 싫증내고 새로운 것을 찾아 나서는 것이 미덕이 되고 있으니까요. 아이들 역시 매일매일 싸우는 부모를 보고 자라는 것보다 이해되고, 소통되는 열린 공간에서 자라는 것이 정서적으로 더 좋을 거라는 거죠.”

그녀는 개개인의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자연스러움에서 그 사람만의 멋을 찾듯 삶의 방식에 있어서도 철저히 그 사람만의 양식을 찾아가는 중이다. “아름다움은 자연스러운 라이프스타일과 자신감에서 나온다는 철학을 가지고 이 일을 선택했어요. 종국에 제가 하고 싶은 일은 개성을 존중하는 사회를 만들고, 사람들의 라이프스타일을 계속해서 업그레이드할 수 있도록 제안하는 거죠.”

양은주 자유기고가

입력시간 2003/03/04 18:11


주간한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