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품 반, 술 반… 양주값이 기가 막혀

막강 다국적 3인방 vs 토종기업 3인방 시장쟁탈전

“블렌딩(혼합)하기 1개월 전 8,000여개에 달하는 원액 통을 모두 품질 테스트합니다. 블렌딩 후에는 7번의 샘플 테스트를 하고 6개월간 메링(후숙성) 과정을 거친 후 다시 7번의 샘플 테스트를 하죠.” 지난해 9월초, 하이트맥주 계열 하이스코트의 황도환 사장은 슈퍼프리미엄(SP)급 위스키 신제품 ‘랜슬럿’ 발표회에서 ‘고급 위스키’의 진가를 보여주겠다고 했다.

랜슬럿은 하이트측이 스코틀랜드 위스키 종가를 자임하는 140년 전통의 에드링턴그룹에서 수입, 판매하는 제품. “2년 안에 위스키 업계 1위를 차지하겠다”는 야심에 걸맞게 하이트측은 제품 포트폴리오까지 철저하게 위스키 1위 업체인 진로발렌타인스의 ‘발렌타인’을 겨냥해 구성했다.

우선 12년산과 17년산 2종을 먼저 선보인 데 이어 지난해 12월말에는 21년산과 30년산을 추가로 내놓았다.

특히 업계의 주목을 받았던 것은 출고가였다. 12년산의 경우 500㎖ 한 병에 출고가 2만1,890원으로 통상적인 수준이었지만, 17년산은 4만9,500원으로 책정됐다. 국내 17년산 위스키 판매 1위 제품인 ‘윈저17’(디아지오코리아)의 출고가가 2만9,480원이니, 동급 제품 보다 가격이 무려 60% 이상 높은 셈이었다.

이에 대한 황 사장의 설명은 조금의 거리낌도 없었다. “위스키도 브랜드, 원액 등에 따라 가격 차이가 나는 것은 당연하다. 특히 원액을 어떤 것으로 사용하느냐에 따라 제품의 질이 달라진다.” 역시 타깃은 ‘발렌타인 17’이었다.

‘발렌타인 17’(500㎖)의 출고가는 6만6,990원. 브랜드 파워를 감안해 이 보다는 26% 가량 낮은 가격이었지만, 발렌타인에 버금가는 위스키임을 강조한 것이었다. 하이트측은 대대적인 광고 등으로 마케팅 예산에만 무려 400억원을 쏟아 부었다.


고품격 위스키이길 포기한 ‘랜슬럿’

하이트측이 이처럼 공격적인 정책을 구사하게 된 것은 효자 상품이던 딤플의 판권이 수개월 뒤(지난해 12월) 소유주인 디아지오사의 한국법인 디아지오코리아로 넘어가기로 예정돼 있었기 때문. 여기서 손을 놓아 버리면 위스키 시장에서 완전히 설 자리를 잃을 수 있다는 위기감이 팽배했다.

업계는 1993년 하이트맥주를 시판하며 굳건하던 OB맥주의 아성을 무너뜨리고 맥주업계 최강자로 급부상한 전력을 떠올리며 ‘랜슬럿’의 판매 정책 추이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그로부터 불과 5개월 가량이 지난 올 2월 중순. 하이트측은 ‘랜슬럿 17’의 출고가를 대폭 낮춘다고 발표했다. “가격 경쟁에서 밀려 시장에서 자리를 잡지 못하는 바람에 역마진을 감수하는 수준까지 가격을 내렸습니다. 원액 공급사인 에드링턴측과 협의해 원액의 질은 유지하되 서로 마진 폭을 줄이는 방향으로 합의했습니다.” 가격 인하율은 무려 40%, 출고가는 4만9,500원에서 2만9,700원으로 떨어졌다. 살아 남아야 한다는 절박함 탓에 스스로 ‘고품격 위스키’이기를 포기한 셈이었다.


토종 3인방의 불꽃 튀기는 양주 전쟁

배경은 이랬다. ‘랜슬럿’이 출시된 지 20일쯤 지난 지난해 9월말. 맥주업계 경쟁자인 두산은 4년여만에 위스키 시장에 재진입하면서 SP급 위스키 ‘피어스클럽 18’을 내놓으며 맞불을 놓았다.

1980년 캐나다 씨그램사와 합작으로 오비씨그램(현재 디아지오코리아)을 만들어 18년 동안 국내 위스키 시장을 선도하다 외환 위기 당시인 98년 그룹 구조조정 차원에서 위스키 지분을 전량(50%) 매각한 터였다.

하이트측을 궁지로 몰아넣은 것은 두산의 가격 정책이었다. 두산주류BG는 ‘피어스클럽 18’의 출고가를 ‘윈저 17’과 동일한 2만9,480원(500㎖)으로 책정했다. 조승길 사장은 “스코틀랜드 보리슨 보모사로부터 18년산 이상의 원액을 수입, 국내 소비자가 선호하는 맛과 향을 철저히 조사해 개발했다. 후발업체로 새롭게 시장에 진입하기 위해 가격을 낮게 책정했다”며 다분히 하이트측을 겨냥한 듯한 발언을 쏟아냈다.

이른바 ‘양주 전쟁’으로 불린 업계의 공세는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 ‘스카치 블루’ 시리즈로 위스키 업계에 복병으로 떠 오른 롯데칠성음료가 8월 출시한 SP급 ‘스카치블루 스페셜’(17년산)의 출고가를 불과 2개월 만에 500㎖는 4만4,000원에서 2만8,930원으로, 700㎖는 6만500원에서 4만2,900원으로 30% 가량 인하하고 나섰다. 이때까지 업계 최저 가격을 유지하고 있던 ‘윈저 17’이나 ‘피어스클럽 18’ 보다도 500원 가량 저렴한 수준이었다.

유일하게 하이트측의 ‘랜슬럿’과 유사 가격대를 형성했던 롯데칠성의 ‘스카치블루 스페셜’ 마저 ‘2만원대 SP급 위스키’ 대열에 동참함으로써 ‘랜슬럿’의 입지는 더욱 좁아질 수밖에 없었다. 물론 ‘발렌타인 17’ ‘시바스리갈 18’(페르노리카코리아, 출고가 6만3,800원) 등 고가 정책을 구사하는 다국적 제품에는 브랜드 파워를 당해 낼 재간이 없었다.

1월 디아지오코리아의 ‘윈저’가 9리터 들이(500㎖ 짜리 18병)로 8만2,202상자를 팔아치우는 동안 ‘랜슬럿’은 고작 2,400상자를 팔았을 뿐이었다.


국내 위스키 시장 70% 점유한 다국적 기업

이처럼 업체들이 상식을 뛰어넘는 SP급 위스키 가격 파괴 전쟁을 벌이는 이유는 당장의 이익 보다는 업체의 이미지를 제고할 수 있는 상징성을 더 중시하기 때문이다.

지난해 국내에서 팔린 위스키는 모두 353만8,618상자. 이중 82.6%는 ‘임페리얼 12’ ‘윈저 12’ 등 ‘프리미엄(P)’급 위스키가 차지했고, 15년산 이상 SP급 위스키의 비중은 13.3%에 불과했다. 고급 소비 문화가 확산되고 있다고는 하지만 아직까지 SP급 위스키의 판매가 전체 위스키 시장을 좌지우지할만한 정도는 아니라는 얘기다.

하이트맥주 유경종 차장은 “17년산에서 다소 밑지는 부분은 12년산 매출을 통해 보충하면 된다”며 “제품 이미지 제고 차원에서 SP급 위스키가 마케팅에 중요한 역할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다국적 위스키 업체들이 주력 상품으로 SP급 위스키를 내세워 제품 인지도와 이미지를 높여 시장을 싹슬이하고 있는 것도 국내 토종 업체들이 ‘SP 양주 전쟁’을 벌이게 된 또 다른 배경이다. 사실 4~5년 전까지만 해도 국내 위스키 시장은 오비씨그램, 하이스코트, 진로위스키 등 국내 업체가 3강 체제를 구축하며 시장을 장악했다.

하지만 모기업 구조조정으로 오비씨그램은 98년 캐나다 씨그램 본사에 매각돼 디아지오코리아로 변신했고, 진로위스키는 99년 발렌타인 제조업체인 영국의 얼라이드 도멕사에 지분의 70%가 넘어가 진로발렌타인스로 이름을 바꿔 달았다.

지난해 진로발렌타인스는 ‘발렌타인 17’ ‘임페리얼 12’ 등의 선전에 힘입어 국내 시장에서 무려 34.4%의 점유율을 기록했고, 디아지오코리아는 윈저 시리즈를 내세워 27.1%로 2위 자리를 굳건히 지켰다. 시바스 리갈을 판매하는 페르노리카코리아까지 포함하면 이들 외국계 3사의 시장 점유율은 67%에 달한다.

하이스코트가 그나마 시장 점유율 13.5%로 업계 3위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도 지난해말 판권이 디아지오코리아에 넘어간 ‘딤플’ 의 매출 호조 덕분이었다.

이제 ‘위스키 코리아’로 불리며 전 세계 위스키 업체의 주목을 받는 국내 시장은 고가품을 내세워 여전히 막강한 파워를 과시하는 다국적 기업 3인방(진로발렌타인스, 디아지오코리아, 페르노리카코리아)과 저가 전략으로 전환하며 시장 탈환에 절치부심하는 토종 기업 3인방(롯데칠성, 두산, 하이스코트)의 대결 구도로 재편됐다.


30년산 위스키도 거품이 40%(?)

하지만 ‘랜슬럿’ 사례가 극명하게 보여주듯 지난해 하반기부터 계속된 토종 기업들의 ‘가격 파괴’ 전쟁은 위스키 가격의 적정가 논쟁으로 다시 불붙고 있다.

직장인 김영종(34)씨는 “고급 원액을 사용하기 때문에 가격을 높게 책정할 수밖에 없다고 홍보해 놓고서는 불과 몇 개월 뒤에 가격을 대폭 낮추는 바람에 신뢰감이 크게 떨어졌다. 도대체 그동안 얼마나 폭리를 취해왔길래 출고가를 절반 가량이나 낮출 수 있느냐”며 목소리를 높였다. 업계는 이 같은 비판 여론에 대해 “원액 수입 단가를 낮추는 것은 물론 심지어 역마진까지 감수한 것”이라고 방어벽을 친다.

롯데칠성 성기승 과장은 “시장에서 살아 남아야 한다는 절박함 때문에 원액 수입사측과 협의해 수입가를 낮추고 마진율을 10% 이내로 축소한 결과”라며 “폭리를 운운하는 것은 적합치 않다”고 해명했다.

문제는 제조 원가의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원액 수입 가격에 대해 위스키 업체들이 ‘영업 기밀’을 이유로 공개하지 않는다는 점. 때문에 소비자들은 업체들의 설명 외에 가격의 공정성 여부를 판단할 길이 없는 형편이다.

이에 따라 일각에서는 최근 가격 파괴 대상이 된 ‘17년산’ 외에 12년산 이하 제품이나 21년, 30년산 등 나머지 제품에도 여전히 가격 거품이 남아있을 것이란 의구심을 떨치지 못한다. 원액 숙성 기간이 5년 이상 차이 나는 12년산 프리미엄급 위스키의 경우 출고가가 2만1,000~2만2,000원대로 17년산(혹은 18년산)과 7,000~8,000원 정도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 것이 현실.

게다가 하이스코트, 롯데칠성 등은 17년산의 출고가를 30~40% 인하하면서도 21년산, 30년산 제품의 출고가는 여전히 동일하게 책정하고 있다. ‘랜슬럿’ 21년산의 경우 출고가는 15만700원, 30년산은 82만5,000원으로 ‘발렌타인’ 출고가에 거의 근접한 수준이다.

주류업계 관계자는 “일부 제품에 여전히 가격 거품이 남아있다는 의구심이 가시지 않은 상황에서 소비자들이 브랜드 파워가 떨어지는 토종 브랜드 위스키를 선호할 리 없다”며 “특히 유흥업소 등 최종 소비단계에서는 출고가와 무관하게 여전히 가격 조정이 이뤄지지 않고 수십만원 대에 거래되고 있는 점은 하루 빨리 개선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영태기자

입력시간 2003/03/11 13:49


이영태 ytle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