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식 문화읽기] 사랑과 역사의 함수관계

과연 사랑과 연애는 같은 것일까. 수업시간에 학생들에게 가끔 던져보는 물음이다. 범박하게 말해서 사랑이란 인류의 보편적인 감정으로 흔히들 열정(passion)이라고 한다. 열정으로서의 사랑은 인간이 살았던 모든 시간과 공간 속에 그 흔적을 남기고 있다.

반면에 연애는 근대 이후에 등장한 새로운 만남의 방식이다. 남자와 여자 사이에 지속적으로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 통로가 마련되고, 서로의 집 밖에 있는 제 3의 장소에서 안정적으로 만날 수 있는 사회적인 환경이 구비될 때 가능한 것이다.

사랑이 보편적인 감정의 범주라면, 연애는 특정한 역사적 시기에 출현한 사회적 관계이다. 데이트를 하는 연인들의 실루엣은, 보도블록이 깔려있고 가로등이 놓여진 거리가 있을 때 비로소 나타날 수 있는 것이다. 연애나 데이트와 관련된 일상의 모습 속에 역사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모던뽀이, 경성을 거닐다’는 1920년대 중반부터 1930년대 후반까지의 시기를 대상으로 식민지의 수도였던 경성(京城)의 일상을 들여다보고 있는 문화사적인 연구이다. 일차적인 자료는 당시의 문화인이었던 안석영(1901-1949)이 여러 신문과 잡지에 남겨놓은 만문만화이다.

만문만화는 신문과 잡지에 발표되는 한 컷 짜리 만화인데 말풍선 대신에 5매 분량의 풍자적인 글이 덧붙여지는 것이 특징이다. 1920년대 중반 총독부의 언론 탄압으로 비판적인 시사만화가 더 이상 불가능해지자, 경성의 도시풍경과 세태풍속으로 시선을 돌리게 되면서 나타난 만화 양식이기도 하다. 1920~30년대의 경성은 청계천을 경계로 북촌과 남촌으로 나뉘어졌는데, 북촌에는 종로를 중심으로 조선인들의 상권이 형성되어 있었고, 남촌에는 혼마치(명동과 충무로)를 중심으로 일본의 상업자본이 진출해 있는 상태였다. 드라마 ‘야인시대’에서 보았던 종로와 혼마치의 대립을 연상하면 이해하기가 쉬울 것이다.

1920년대 후반에 이르면 백화점이 등장하게 되는데, 이상의 ‘날개’에도 등장하는 미츠코시 백화점과 박흥식이 종로에 세운 화신백화점은 각각 남촌과 북촌의 대표적인 백화점이었다. 백화점은 식민지의 수도 경성이 근대적인 소비도시로 재편성되었음을 알려주는 상징적 표상이었다. 제조업을 통한 생산력은 거의 갖추지 못한 상태에서 소비의 가능성만이 마치 환상처럼 펼쳐져 있는 도시였던 셈이다.

식민지적인 어둠과 근대 자본주의의 빛이 극단적으로 대비되는 소비도시의 일상적인 삶은 어떠한 것이었을까.

창경원 밤 벚꽃놀이에 개를 끌고 가는 모던걸에게 작업 들어가는 모던보이의 모습, 전차에 빈자리가 있는데도 금시계를 자랑하기 위해 자리에 앉지 않고 손잡이를 잡고 서 있었던 여학생, 총독부가 댄스홀을 허가하지 않자 카페에서 춤을 추다가 적발되었던 사람들, 용산에서 남산까지 택시로 드라이브를 하면서 뒷좌석에서 러브씬을 연출했던 연인들, 유성기를 틀어놓고 비단양말이 헤질 정도로 서양식 댄스를 즐겼던 사람들의 모습 등을 안석영의 만화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오늘날과 별 차이가 없어서, 오히려 낯설다는 느낌이 든다.

같은 경성이지만 도시의 뒷골목에서는 세계공황으로 인한 장기적인 실업으로 힘겨운 삶을 살아가는 사람도 많았을 것이다. 그리고 저 멀리 만주 벌판에서는 독립군들이 일본군을 상대로 게릴라전을 벌이고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창경원에서 남산을 거쳐 한강인도교로 이어지는 데이트 코스를 개척해 낸 모던보이와 모던걸의 모습을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하는 것일까. 도덕적으로나 역사적으로 좋은 평가를 받기는 어렵겠지만, 모던보이와 모던걸은 역사 속에 끼어 든 황당하면서도 우연한 에피소드는 결코 아니다.

모던보이와 모던걸의 모습 속에는 식민지에서 살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잊어버리고자 하는 무의식과, 자신이 살아있음을 스스로 확인하고자 인간적인 욕망이 드리워져 있는 것 같다. 어쩌면 환상과 절망을 끝도 없이 왕복해야 했던 식민지 시대의 내면과 무의식이 모던보이와 모던걸을 통해서 표출된 것인지도 모른다.

제국주의적 수탈과 독립운동으로 요약되는, 식민지에 대한 역사적 이미지들을 모던보이와 모던걸의 경박한 모습으로 대체하자는 이야기는 결코 아니다.

하지만 식민지적인 상황 속에서 전개되었던 다양한 삶의 모습들을 우리의 역사로 인정하는 과정은 반드시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문화와 역사는 삶의 다양성에 대한 긍정이자, 시간과 공간의 좌표축 위에서 세계와 인간을 포괄적으로 이해하려는 노력이기 때문이다.

입력시간 2003/03/24 14:29


주간한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