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군 철군 30주년- 다시 찾은 베트남

파리평화 협정과 베트남 패망의 교훈을 되새기며…

권혁승 언론인

미소가 없다. 시름에 찬 얼굴도 아니다. 그저 굳어 있는 표정들이다. 오랜 전쟁의 상처가 아직 가시지 않은 탓일까. 처음 탄 베트남 항공 스튜어디스의 첫 인상을 그렇게 비춰졌다.

인천공항을 이륙한 비행기가 하늘로 솟구치자 나도 모르게 마음이 설렛다. 베트남전쟁 때 찾았던 호치민(구 사이공)을 전쟁이 끝난 지 30년만에 다시 찾게 되는 감회때문일까.

그렇지만은 않다. 그것보다는 우리 젊은이들이 피를 흘리며 죽어갔던 베트남 전쟁의 참상이 되살아 나고, 한국군의 참전 흔적이 과연 어떻게 남아 있을까하는 궁금증이 밀물처럼 밀려와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든 것이다.

베트남행 비행이기를 타기 전에 교보문고에 들렀다. 전쟁코너로 안내 받아 두권 밖에 남지 않은 베트남 전쟁에 관한 책을 다 사버렸다. 기내에서 이 책을 읽으니 베트남의 기구한 역사와 전쟁의 참상, 베트콩의 등장, 베트남의 패망 원인 등이 역사의 교훈으로 나의 폐부를 찌른다.

베트남 항공기가 한반도를 벗어나자 산뜻한 자주색 아오자이(베트남 전통의상)을 입은 아리따운 스튜디어스들이 기내식을 제공했다. 그러나 얼굴은 여전히 굳어 있었다. 전쟁이 끝난지 30년이 되어도 꽁가이(베트남 아가씨)들의 웃음은 되살아나지 않고 그들 특유의 까만 눈동자는 가슴을 찢던 지난날을 회상이라도 하듯 아직도 허공을 헤매고 있는 것 같다.


아물지 않은 전쟁의 상흔

4시간 30분만에 호치민 탄손누투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하늘에서 내려다 본 호지민의 넓은 들녁은 푸르고 풍성해 보였다. 30년전 '쾅, 쾅' 포성이 울리고 전투기가 즐비하게 늘어선 가운데 무장 군인들의 경비가 삼엄했던 그런 모습은 찾아 볼 수 없다.

그러나 전쟁 당시 질서 정연하게 길게 늘어섰던 전투기 격납고는 여행객들을 사열이나 하듯 두 줄로 줄지어 옛모습 그대로 서 있고 확장공사를 하느라 포성같은 폭음을 울리며 흙먼지를 뿜어내고 있었다.

3월 23일이면 한국군 베트남 철군 30주년이 된다. 그렇게 긴 세월이 흘렀는데도 전쟁의 잔행인 전투기 격납고가 그대로 건재하고 있음을 보면서 전쟁의 상처가 아직까지 아물지 않고 있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

호지민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오토바이 홍수로 넘쳤다. 서울 면적의 3배가 넘는 넓은 면적에 1,000만명이 살고 있는 국제도시인데, 오토바이 수가 무려 350만대라니 하루종일 송사리 떼가 몰려다니는 것 같다.

1인당 국내 총생산(GNP) 470만달러보다 휠씬 높은 소비 성향을 보이는 것은 지하경제 규모가 크기 때문이라는게 현지인의 설명이다. 어두워지면 북쪽의 하노이 거리는 깜깜하고 조용해지는데 호치민 거리는 휘황찬란하고 시끄러워지는 것이 여전히 다르다고 한다.


참혹했던 전쟁의 기록들

베트남의 사회주의 국가로 통일된 후 만들었다는 호치민 전쟁박물관과 하노이 군사박물관을 둘러보았다. 호치민 중심가인 통일궁 옆, 프랑스 식민시대의 교도소 자리에 선 전쟁박물관은 허름한 단층벽돌집으로 1관에서 6관으로 나누어져 있다. 두메산골 초등학교 분교보다도 작은 손바닥만한 입구 마당에는 미군 전투기 2대, 미군탱크 몇 대, 야전포와 포탄, 폭탄이 전시되어 있을 정도로 초라하다.

전시관 내부에는 전쟁의 참상을 생생하게 기록한 사진들이 걸려 있었다. 미군들과의 전투, 고엽제의 맹독성, 베트콩 소탕작전, 폭격기의 대량 폭탄 투하 등 눈을 뜨고 보기 어려울 정도로 참혹한 장면들이다.

당연히 전쟁 중에는 인권을 찾아 볼 수 없었다. 또 북한, 중국과의 수교는 1950년, 한국과 미국과의 수교는 92년과 95년에 각각 이뤄졌다는 기록도 보였다.

미국은 베트남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연(延) 650만명의 젊은이를 동원, 전장으로 파병했다. 한때는 베트남 주둔 미군 병사가 20만명에서 54만3,600명(육해공군)으로 크게 늘기도 했다. 전쟁박물관이 내놓은 자료에 따르면 미국은 전쟁 중에 785만 톤의 폭탄과 7,500만 리터의 고엽제룰 투하했다.

이는 2차대전 중에 미국이 각 전장에 투하한 폭탄 205만톤의 3배가 넘는 양이다. 전비만도 3,520억달러에 이른다고 한다. 또 전쟁 중에 300만명의 베트남인이 사망했고 미군병사는 5만8,000명 이상이 살아 돌아오지 못했다.

한국군도 65년 월25일 주월한국군사령부가창설된 이후 7년 동안 연 35만명이 베트남에서 처참한 전쟁과 대민활동을 수행했고 1만5,922명의 사상자(사망자 4,960명 부상자 10,962명)을 냈다. 고엽제 피해 및 후유증 인원도 1만2,320명에 이른다.

참전 미군은 73년 1월 27일 체결된 파리 평화협정으로 그해 3월 29일 완전 철수했으며 한국군은 그보다 앞선 3월23일에 전쟁의 상처를 안은 채 철군을 완료했다. 그리고 4월 26일 주월 한국군 사령부도 해채됐다.

철군의 배경이 된 파리평화협정은 ▲ 베트남의 독립, 주권통일, 영토보전 ▲ 정전, 외국부대 철수, 군사기지 철거 ▲ 북위 17도선 비무장지대 설정과 대화에 의한 남북의 통일 지향 등 6개 항목으로 이뤄졌다.

그러나 평화협정 체결 1년 뒤인 74년 4월30일 월맹군 탱크가 베트남 대통령궁으로 진입하면서 월남은 항복할 수 밖에 없었다. 패망이었다. 미군을 철수시키고 대화로 남북의 통일문제를 다루자던 파리 평화협정은 1년만에 휴지조각이 되고 만 것이다.

"월남참전은 궁핍한 시대에 우리가 살기 위해 나갈 것이다. 오늘과 같은 경제부흥을 이끈 결정적 시발점이 되었던 월남참전은 결코 잊어서는 안될 것"이라고 전 주월한국군사령관 채명신 베트남 참전 전우회 회장은 강조한다. 그는 주한미군을 철수시키지 않는 조건으로 우리가 월남에 파병함으로써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지키고 공산화를 막고 있다고 말했다.

전쟁 중에 국군묘지를 참배하며 눈물을 흘린 '장군의 눈물' 사진으로도 유명한 채 장군은 "우리의 지금 상황이 베트남 패망 직전과 흡사한 상황이라는 우려의 소리가 높다"고 지적하고 "베트남 패망의 교훈을 명시하여 앞으로의 남북문제, 통일문제에 대비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부정부패의 온상이었던 대통령궁 건너편에 자리잡은 자주색 기와집의 한국대사관(지금은 영사관)은 30년전 모습 그대로다. 그곳은 미군과 한국군이 철수한 다음 대사관으로 모여든 한국인들이 '사이공 최후의 탈출'을 기도했던 비극의 장소이기도 하다.

당시 한국일보 안병찬 특파원은 정부와 신문사의 탈출지시를 무시하고 끝까지 남아 사이공의 최후를 지켜본 유일한 특파원이었다.


월맹군의 역사 하노이 박물관

이튿날 비행기로 하노이에 도착했다. 하노이 군사박물관은 호치민 전쟁박물관에 비해 전시관 규모도 크고 전쟁기록 사진과 전시물이 즐비하게 진열되어 있었다. 호치민 박물관이 전쟁의 잔악상을 부각시킨 전시관이라면 하노이 박물관은 월맹군의 용맹성을 부각시키고 있었다.

지도자 호치민이 군·민을 지도하는 사진에서부터 남하보급작전 장면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사진이 걸려있고, 전쟁 당시 사용했던 각종 무기와 폭탄도 전시되어 있었다. 특히 눈에 띈 것은 전쟁으로 죽은 병사들을 기리기 위해 가슴에 훈장들을 주렁주렁 단, 흰머리에 주름투성이의 늙은 어머니들의 사진이었다.

두 박물관에서 발견한 한국군의 사진은 단 한 장이었다. 맹호부대가 참전을 위해 대형 태극기를 휘날리며 베트남에 상륙하는 장면이다. 원래는 월맹군 및 베트콩과의 전투 장면 등도 걸려 있었으나 떼냈다고 한다. 지난 30년 동안 개방의 물결이 밀려오면서 한국군의 월남전 참전이나 대민활동 등의 흔적은 과거사로 사라지고 있는 것이다. 대신에 베트남 사람들은 한국을 보고 배워야 된다는 의욕을 보이며 한국 상품을 으뜸으로 생각한다.

호치민이나 하노이에서 시내버스는 거의 모두 한국제 중고 버스가 운행되고 있었다. △△ 백화점 ○○문화원, XX 시내버스라는 큼직한 한글 글씨가 그대로 쓰여져 있다. 이렇게 한글이 그대로 남아 있어야 중고차 값을 제대로 받을 수 있다고 한다.

전쟁의 상처는 세월이 흘러도 잘 아물지 않는다. 베트남에서 느꼈던 가슴 아픈 사연들을 묻어두고 심야에 하노이를 떠난 지 3시간 10분만인 새벽 5시30분 인천국제공항에 도착했다. 베트남은 그렇게 먼 나라가 아니었다.

입력시간 2003/03/25 1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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