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공화국] 혀는 칼보다 강하다!

설득·주장·강조로 화술의 경지에 오른 우리시대의 '토론의 달인'들

3월9일 정부 종합청사에서 열린 노무현 대통령과 전국 검사들과의 대화에서 그리 귀에 익숙치 않은 신조어가 등장했다. 서울지검 허삼구 검사가 노 대통령을 가리켜 ‘토론의 달인’이란 칭호를 붙인 것. 12ㆍ19 대선과정에 열린 각종 토론회에서 빛을 발한 노 대통령의 현란한 화술(話術)을 빗댄 말이었다.

그 말에 노 대통령은 “(말솜씨 같은) 잔재주가 아니라 삶의 많은 부분을 참아와 그 밑천으로 토론을 이겨왔다”고 응수하며 유감의 뜻을 표명했다.

물론 그런 석상에서 나올 만한 적절한 비유는 아니었지만 노 대통령 화술은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 ‘9단 급’에 올라 있는 것은 분명하다. 토론회는 아니었지만 1988년 5공 청문회에서 당시 초선인 노무현 통일민주당 의원은 고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에게 “증인에 비해 본 의원의 사회적 영향력이 100분의 1도 되지 않는 비애를 느끼며 질문에 임하겠다”고 말문을 연 뒤 정 회장을 몰아세웠다. 노 의원의 논리 정연하고 당당한 기개를 높이 산 국민은 그를 ‘청문회 최고 스타’로 꼽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노 대통령만이 아니다. DJ와 YS 등 전직 대통령을 비롯, 정치권에 오래 몸담은 정치인들도 ‘입 펀치’ 만큼은 거의 달인의 경지에 이르고 있다.

달변가인 김대중 전 대통령은 토론회에 나서면 차분한 어조로 일관하면서도 강조할 대목에서는 ‘칼 도마’ 손짓(칼로 도마를 내려찍듯 손으로 내려치는 행위)을 하며 청중의 이목을 집중시키곤 했다. 잦은 설화(舌禍)에 시달렸던 김영삼 전 대통령은 비록 상대방을 제압하는 핵심적인 논리 구사에는 약했지만 학생시절 웅변대회 입상경력이 말해주듯 결정적인 대목에서 자기 주장을 강조하는 데에는 일가견이 있었다.

김종필 자민련 총재는 화려한 수사적인 표현으로 분위기를 압도했으며, 이인제 자민련 총재대행과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도 법조인 출신답게 평상심을 잃지 않는 정리된 어투를 갖고 있다.


여야 정치인 중 ‘토론의 달인’은 누구?

TV 3사에서 방영되는 시사토론 프로그램에는 거의 빠짐없이 여야 정치인들이 출연해 국민 설득에 나선다. 원래 토론의 취지는 타협을 통해 의견이 다른 양측이 합의점을 찾기 위한 ‘윈-윈’ 게임이지만 국민의 지지를 끌어내야 하는 정치인의 경우 누가 상대를 제압하고 분위기를 압도하느냐가 우수 토론가의 잣대로 여겨지고 있다.

정치인들은 자기 주장을 강조하는 웅변가형과 차분한 논조를 앞세우는 설득형, 정곡을 찌르는 예리한 지적을 통해 상대를 제압하는 스타일, 적절히 양보하면서도 청중의 공감을 이끌어 내는 분위기 유도형으로 나뉜다.

한나라당의 대표 토론가로는 박희태 총재대행이 꼽힌다. 차분한 논조를 바탕으로 한 설득형에다 간간히 유머스런 말투를 섞어 전체 청중을 리드하는 데에는 단연 선두 주자다. 저음에다 특유의 경상도 억양이 돋보이는 홍사덕 의원도 중진급에서는 단골 토론주자이며, 탄탄한 이론을 바탕으로 화려한 손동작 등을 가미한 이부영 의원과 이재오 의원 등도 대표급으로 통한다.

또 송곳 같이 핵심을 찌르는 듯한 공격형 토론가로는 검사 출신 홍준표, 경찰간부 출신 엄호성, 교수 출신 권철현, 기자 출신 안상수 의원 등이 꼽힌다.

홍 의원은 대통령과 검사와의 대화이후 마련된 토론회장에서 “강금실 법무장관의 임명은 신임 국방장관에 예비역 해군 대령을 앉힌 격”으로 비유하기도 했다. 원내총무인 이규택 의원도 당대 당 토론회에는 빠지지 않으며, 젊은 층에서는 김영춘, 원희룡 의원 등이 나서고 있다.

민주당 대표 토론가는 한나라당 박 대행과 오랜 지기인 박상천 최고위원이 맨 위에 이름을 올려놓고 있다. 두 사람이 토론회장에서 맞대결을 벌인 적도 10여 차례에 이른다. 일화도 많다. 한 토론회에서 박상천 최고위원이 수치를 틀리자 박희태 대행이 “컴퓨터(박 최고위원을 빗대어)도 가끔은 실수를 하는가 보지?”라고 공격했다.

이에 박 위원은 “아직 말이 안 끝났으니 끝까지 들어보고 얘기해요. 나도 말 좀 합시다. 말 좀 해”라고 응수하는 등 터질 것 같은 긴장감 속에서도 편안하게 토론 분위기를 이끈다.

앵커 출신답게 정리된 말투로 분위기를 이끄는 정동영 의원과 구수한 언변의 김상현 의원 등도 어떤 토론회에서도 밀리지 않는 대표주자다. 차분한 어조로 좌중의 공감을 유도하는 설득형으로는 정세균 김근태 천정배 의원 등이 꼽히며, 토론회 사회자 경험이 있는 유재건 정범구 의원 등도 강약을 조절할 줄 아는 ‘토론 달인’ 대열에 합류한 상태.

이밖에 저격수식 공격형으로는 김경재 의원, 젊은 층 주자로는 송영길, 임종석 의원 등이 꼽히며 원내총무 정균환 의원도 당내 구 주류중 단골 주자다. 자민련에서 이론가형의 정우택, 김학원 의원 등이 자주 등장한다.


진보와 보수 진영으로 나뉜 학계 토론주자

TV에 출연하는 학계인사들은 크게 보수파와 진보파, 중도 좌ㆍ우파로 나뉘어 자신의 이론을 편다. 대선전까지는 이런 색채의 차별성이 두드러졌지만 진보 성향의 노 대통령이 당선된 뒤에는 보수 진영의 학자들 모습이 잘 보이지 않는다.

보수 논객으로는 이상우 한림대 총장과 유석춘, 함재봉 연세대 교수가 꼽힌다. 대선 전에 비해 최근 활동은 뜸한 편. 대신 전직 각료나 의원 출신인 공로명 동국대 석좌교수와 이동복 명지대 교수 등이 보수 진영의 목소리를 대변하고 있다.

특히 북한 핵문제 해법을 놓고 공 교수 등은 장관 경력을 바탕으로 현 정부의 외교정책을 지적하기도 했다.

진보 논객에는 성공회대 조희연 김동춘 신영복 교수, 한상진 서울대 교수 등이 상위에 랭크돼 있다. 고려대 최장집, 서강대 손호철 교수 등도 자주 등장하는 편이다. 하지만 같은 진보 성향이라도 관점의 차이는 종종 발견된다.

참여정부 1기 내각에 대해 한상진 교수는 “오랜 관행에 안 맞으면 틀린 것으로 인식하는 그런 사고가 바뀔 때”라고 비판했지만 조희연 교수는 오히려 “복지와 경제분야에서 노 정권의 개혁성이 의심된다”며 진보 노선의 후퇴에 대해 우려하기도 했다.

토론회마다 1~2명씩 단골로 참여하는 여성 토론가로는 이영자(카톨릭대) 김민전(경희대) 조기숙(이화여대 국제대학원) 교수 등이 꼽히며 북핵 문제와 관련해서는 정옥임 KBS 객원해설위원도 자주 나선다.

정계나 학계 외에 시민단체 인사들도 단골 참여 군이다. 유시민 개혁정당 집행위원과 전 경실련 사무총장 이석연 변호사 등은 직업 토론가 수준이다. 유 위원은 최근 한 토론회에서 “검사들은 본인들이 스스로 정치권 압력을 이겨낼 생각은 하지 않고 제도적 장치만 주문하느냐”고 성토해 상대 토론자의 공감을 얻어내기도 했다.

이 변호사는 진보적 성향으로 분류되긴 하지만 노 정권의 조각과 관련, “모든 것을 떠안아야 할 통합적인 리더십과는 거리가 멀다”고 혹평하기도 했다.

논리대결을 벌이는 토론회에 가장 중요한 것은 찬반의견을 적절히 조화시키며 합의점을 도출하도록 이끄는 역할, 즉 사회자다. 이 부분에서는 유재건-정범구-유시민-길종섭-손석희씨 등이 명 사회자 반열에 올라 있다. 물론 “한쪽 방향으로 몰고 가려는 의도가 엿보인다” “사회자가 토론가 위에서 군림하는 듯한 태도를 보인다”는 식의 혹평도 있지만 이는 보는 사람의 관점에 따라 다른 것이고, 대체로 무난하다는 평이 일반적이다.

염영남기자

입력시간 2003/03/27 11:33


염영남 liberty@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