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식 문화 읽기] 낭만없는 '야인시대'의 추락

드라마 ‘야인시대’의 시청률이 20%대로 하락했다는 기사를 읽었다. 작년 겨울만 하더라도 시청률 50%를 넘나들며, ‘긴또깡 신드롬’을 불러일으켰던 드라마가 아닌가. 일반적으로 시청률이나 채널 선택에는 관성(慣性)이 작용하는 경우가 많다.

초반에 재미있던 드라마가 중반에 늘어진다고 하더라도, 시청자들은 다른 드라마로 쉽사리 옮겨가지 않는다. 극의 전후맥락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을 때, 가장 편안한 상태에서 드라마를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드라마의 시청률이 30%대에서 20%대로 떨어지는 경우는 대단히 흔하다. 극의 전개가 지지부진해지면서 작위성을 띄게 되거나, 같은 시간대의 경쟁 드라마가 선전을 벌이게 되면 그 정도의 시청률 변동은 당연히 생겨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시청률 40% 이상의 드라마는 충성도 높은 시청자들을 확보해 놓은 상태이기 때문에, 별다른 변화요인이 없다면 시청률이 절반 수준으로 떨어지는 일은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야인시대’의 시청률이 급락한 이유는 무엇일까. 주인공을 비롯한 출연진들이 대거 교체되면서 극의 분위기가 어수선해졌기 때문일까. 부분적인 이유는 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출연진이 그대로 유지되었다고 하더라도 ‘야인시대’의 시청률 하락은 막을 수 없었을 것으로 보인다. 배우의 연기력이나 작가(연출가)의 드라마 장악력이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근본적인 원인은 ‘주먹’의 패러다임이 근본적으로 달라졌기 때문일 것이다

일제 강점기가 배경이었던 청년기의 경우 김두한의 싸움은 두 가지의 방향에서 이루어졌다. 하나는 일본과의 대결이다. 일본의 식민권력이나 일본의 상업자본과 맞서 싸우는, 김좌진 장군의 아들 김두한의 모습이 그려질 수 있었다. 다른 하나는 조선인 협객들과의 대결이다. 구마적, 신마적, 쌍칼 등과 대결하며 조선 최고의 주먹을 가리는 싸움이 그것이다.

대결의 양상이 단순했던 것처럼 게임의 룰 역시 아주 선명하다. 대부분의 경우 맨손 또는 맨몸이었고, 싸움의 조건은 최대한 동등하게 유지되었다. 승자건 패자건 싸워서 승부가 가려지면 깨끗하게 승복하는 일이 남아있을 따름이었다. 패배를 인정하고 떠나가던 협객들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웠던가.

일본인이기는 하지만 무사도의 정신을 지키려 했던 마루오카나 하야시의 모습 또한 감동적이었다. 무예의 정신에 입각해서 승부를 가리는 것처럼 숭고하고 신성한 일은 없었다고나 할까. 승부의 신성함 앞에서는 국가나 민족과 같은 이념적인 가치들도 빛이 바랠 정도였다. 이를 두고 낭만파 주먹의 시대라 할 것이다.

반면에 해방정국을 배경으로 하는 장년기의 경우, 김두한의 싸움은 상당히 복잡한 맥락 속에 놓이게 된다. 먼저 그 당시 김두한의 위상을 알기 위해서는 정치적 격동기였던 해방기의 정치적 상황에 대한 이해가 요구된다.

따라서 당시의 정치적 역학 관계에 대한 정보량이 급격하게 늘어난다. 해방기는 국사교과서에서도 자세히 안 다루는 터라, 일반 시청자로서는 당연히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다. 복잡하게 얽힌 정치적 상황을 대변하듯이, 김두한의 싸움도 조선과 일본의 양자(兩者)대결구도를 벗어나 다자(多者)대결구도의 한 축으로 설정될 따름이다.

이환경 작가는 김두한과 정진영의 대립을 전면에 내세움으로써 어떻게든 우익과 좌익의 대결구도를 유지해 보려고 하지만, 해방기의 복잡한 정치적 역학 관계가 작가의 의도를 외면하고 있다는 느낌이다.

해방기를 배경으로 하는 ‘야인시대’는 더 이상 주먹의 순수성을 그려낼 수 없는 처지에 있다. 정치적ㆍ이념적 선택이 곧바로 생존의 문제인 시대에 김두한의 싸움은 정치세력의 이익을 대변하는 대리전(代理戰)에 지나지 않는다. 정치적인 차원이 개입하면서 주먹의 순수성과 원초적인 건강성이 훼손된 것이다.

그래서일까. 최근의 ‘야인시대’에서는 승부의 숭고함이나 신성함이라는 낭만적 가치들을 찾아볼 수 없다. 그 대신에 너를 죽여야 내가 산다는 식의 생사를 건 비정한 ‘전쟁’이 살벌하게 제시된다.

‘야인시대’의 시청률 급락은 낭만적이었던 맨주먹을 살벌한 무기(총, 다이나마이트)가 대체하면서 나타날 수밖에 없는 현상으로 보인다. 시청자들은 여전히 주먹의 낭만성을 기대하고 있는데, 드라마는 정글의 논리가 지배하는 정치드라마의 가능성 말고는 다른 카드를 가지고 있지 않다.

어차피 낭만파 주먹의 순수성을 회복하기는 어려운 마당이다. 그렇다면 시간을 두고 한국현대사를 재조명하는 정치드라마로의 멋진 변신을 기다려 보는 건 어떨까. 배우와 작가, 연출자의 역량에 기대를 걸어본다.

입력시간 2003/03/27 1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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