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라크 전쟁] 늪에 빠진 미국

'충격과 공포'가 부른 '분노와 증오'

미국이 장기전의 수렁에 빠지고 있다.

공습 작전 ‘충격과 공포’을 시작으로 기세등등하게 이라크전을 열었던 미영 연합군이 이라크군의 강한 저항, 모래폭풍, 위태로운 보급 문제 등에 부딪치면서 크게 한풀 꺾였다.

개전 후 열흘이 넘도록 주 전선은 개전 후 4일만에 형성된 바그다드 남쪽 50㎞~100㎞ 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현 전선은 쿠르드 반군의 거점인 이라크 북부를 관통하는 연합군 지상군의 진격이 본격화하고 남부 전선의 병력 증파가 이뤄져야 움직일 듯 하다.

정체된 전황은 곧 이라크 군의 선전을 의미한다. 이라크의 준 군사조직 사담 페다인(‘사담 후세인을 위해 순교할 자’를 의미)과 집권 바트당 민병대는 연합군이 포위한 바스라, 나시리야, 나자프 등에서 게릴라전을 벌여 연합군 진격을 묶어놓은 것은 물론 보급로마저 차단하고 있다. 이들은 기습 공격을 통해 정규군 보다 많은 전과를 올리고 있다.

바그다드 외곽을 지키고 있는 이라크군 최정예 공화국 수비대는 게릴라 전의 승리에 고무돼 일부 병력을 나시리야 나자프 방향으로 남하시키면서 적극적인 방어 전술을 구사하고 있다. 특히 이라크 국민들은 연합군을 해방자가 아닌 제국주의 점령군으로 간주하고 심지어 연합군의 구호품을 받으면서도 사담 후세인을 연호, 연합군의 전쟁 명분을 무색케 하고 있다.

시간이 갈수록 전쟁의 야만성은 더욱 노골화하고 있다. 연합군은 게릴라들의 위장 항복 등을 ‘더러운 전술’로 비난하고 있으며, 이라크는 공습으로 무고한 400여명의 민간인들이 스러져갔다고 응수하고 있다.


워 게임 할 때의 적이 아니었다

이라크내 미 지상병력을 총지휘하는 윌리엄 월레스 5군단장은 “이라크 병사는 우리가 워 게임을 하면서 상정했던 병사들이 아니었다”며 이라크측의 강렬한 저항을 인정했다. 이 말은 이라크를 얕잡아보았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남부 점령 후 후세인에 반대하는 시아파들의 봉기와 협조를 기대했던 연합군은 예상치 못한 시아파의 냉대를 받은 것은 물론 게릴라로 변한 후세인 추종자들의 기습을 받았다. 게릴라의 습격을 받아 부상당한 한 미군은 “상관들은 게릴라전의 가능성과 위험성에 대해서는 입도 뻥긋하지 않았다”면서 “언제 어디서 총알이 날아 올지 모르는 매복전은 다시는 하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이러한 남부 지역의 정서는 미국이 초래한 자충수이다. 1991년 걸프전 당시 남부 바스라를 점령했던 미군은 시아파의 봉기를 유도하고서는 돌연 후퇴, 시아파에 대한 후세인의 잔인한 탄압을 사실상 방조했다. 당시 후세인은 시아파 반군의 거점인 남부 늪 지역의 모든 물을 빼내 사막으로 만들면서까지 시아파 반군을 철저히 응징했으며, 시아파는 미국에 강한 배신감을 품게 됐다.

이런 정서는 움 카스르, 바스라에서 연합군으로부터 물과 식량을 받은 뒤 “이것으로 우리들의 마음을 살수 있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라고 외치는 민중들의 태도에서 확연히 드러났다.

월레스는 또 “우리는 전 국민이 무기를 들고 있는 나라와 싸우고 있다”며 총력전 대응의 어려움을 토로했다. 이라크 국민들은 개전후 예상과 달리 피난길에 오르지 않았다. 요르단 르웨시드에 마련된 이라크 피난민 수용소가 텅 빈 것은 누구도 예상치 못한 결과였다. 국민들이 도시를 떠나지 않음으로써 사담 페다인 등 게릴라들은 도시를 배경으로 마음껏 기습작전을 벌이면서 시가전을 준비하고 있다.


야만의 얼굴을 드러내는 전황

어느 전쟁에서든 살상이 가장 많이 일어나는 시기는 전선이 교착되고 진지전과 포격전이 가열하는 때다. 현재 이라크 전이 이렇다.

미군은 이라크군이 교전수칙을 무시, 위장 항복한 후 총부리를 바로 연합군측으로 돌리고, 민간인 복장을 한 채 총질을 해대면서 ‘더러운 전쟁’을 벌이고 있다고 비난하고 있다. 미국은 더러운 전술의 구체적 사례로 앰뷸런스를 이용한 군 병력 수송, 학교 등 비 전투시설에 군 지휘소 설치 등을 제시한다.

특히 미군은 민간인 복장을 한 이라크 장교가 폭탄을 실은 택시를 이용, 미군에 자살폭탄 테러를 감행한 것은 이번 전쟁의 진실을 웅변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연합군을 비난하는 이라크측 주장의 설득력도 만만치 않다. 미군은 지난 주에만 바그다드 시내 거주지와 시장에 각각 미사일과 폭탄이 떨어뜨려 민간인 73명을 살상했다. 개전 후 민간인만 460여명이 죽었고 4,000여명은 다쳤다. 공습으로 부상당한 서너살짜리 이라크 어린이가 얼굴에 피를 흘리는 장면은 하루에도 수십번씩 목격되고 있다.

특히 이라크는 연합군이 시가전을 염두에 두고 바스라 나시리야 바그다드 등의 주거 지역에 ‘기획된’ 오폭을 감행, 난민을 양산하려 한다고 맞받아치고 있다. 특수부대와 CIA를 통해 후세인과 지휘부를 제거하려는 요인 암살 계획, 방사능을 누출시키는 열화 우라늄탄의 사용 등도 이라크측의 도마 위에 오르고 있다.


드러나는 작전 실패

연합군은 전력을 마비시키는 모래폭풍, 위태롭기 그지없는 보급선, 예상치 못한 게릴라들의 후방 공격 등을 이유로 장기전쪽으로 방향을 틀고 있다. 이런 전략 수정은 미ㆍ영 연합군을 바그다드 등 도시 안으로 끌어들여 게릴라전과 시가전을 병행하겠다는 이라크측 작전에 말려든 전략적 오류일 뿐이다.

연합군의 전술적 실패는 한 둘이 아니다. 우선 400㎞ 이상으로 지나치게 길어진 보급선이 거론된다. 공습과 동시에 이라크 영내로 진입한 지상군은 단 열흘치의 식량과 연료만을 준비했다. 하지만 게릴라의 보급로 차단으로 전방 미군 부대는 식량ㆍ원료 부족에 허덕이고 있다.

심지어 연합군이 이라크 국민들의 식량의 지원을 받고 있다는 외신도 전해지고 있다. 최첨단의 연합군이 통상적인 재래식 전력에도 못 미치는 게릴라들로 인해 비지땀을 흘리는 상황이 됐다.

걸프전 당시 투입된 지상군 병력의 절반에 불과한 4만 명으로 승리가 가능하다는 미군 지휘부의 판단도 결정적인 실수다. 바스라 등을 포위한 미ㆍ영 해병대는 국지적인 저항에 부딪쳐 병력을 최전방으로 빼지 못하고 있다. 바그다드 진격 선봉 부대인 제3보병사단은 언제 도착할지 모르는 지원군을 기다리고 있다.

개전 초기 공습의 효과가 예상보다 낮다는 점도 빼놓을 수 없다. 연합군의 초기 이라크 지휘부 타격이 실패해 이라크는 군 지휘부, 최정예 공화국수비대, 후방의 게릴라 부대 등 3박자를 갖춘 채 전쟁을 예정대로 치르고 있다.


뜨거워지는 책임론

예상치 못한 고전은 미국내에서 뜨거운 책임 논쟁을 일으켰다. 우선 비난의 화살은 도널드 럼스펠드 미 국방장관으로 향했다. 워싱턴 포스트는 전ㆍ현직 장성들의 말을 인용, “럼스펠드 장관과 그의 참모들이 중보병이 아닌 경보병만으로도 전쟁에 승리할 수 있다는 이론을 증명하기 위해 작전 전개와 병력 배치 등에 대해 지나치게 참견, 비난을 받고 있다”고 보도했다.

이 신문은 럼스펠드가 병력 배치에 관한 야전의 계획을 수 차례 수정하면서 일부 지상 병력의 배치가 50일 가까이 지연됐다고 분석, 소규모 지상병력 투입의 책임을 럼스펠드로 돌렸다.

언론은 그간 유보해온 럼스펠드의 독선에 대한 비판을 이번에 쏟아내는 분위기여서 그 기세가 가히 매섭다. 주간지 뉴요커는 “럼스펠드는 장성들보다 전쟁에 대해 더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모든 것을 결정한다”며 “모든 혼란은 럼스펠드가 자초한 것”이라고 직격탄을 날렸다. 이 정도면 자중지란에 가깝다고 봐야 할 듯 하다.

물론 ‘럼스펠드 때리기’에는 첨단무기를 핵심 전력으로 삼는 대신 중무장 지상 병력은 특수부대와 경보병 위주로 축소ㆍ개편하려는 럼스펠드의 군 개혁에 대한 장성들의 반목도 개재되어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런 비난은 조만간 조지 W 부시 대통령으로 옮아갈 듯 하다. 뉴욕 타임스는 국민들이 전쟁에 대한 인내심을 잃기 시작한다면 부시의 정치적 생명도 위협을 받을 수 있다고 보도하면서 “부시가 이라크를 잘못 읽었다”고 날을 세웠다.


몇 달 이상의 장기전 불가피

이제 연합군의 누구도 장기전의 불가피성을 부인하지 않는다.

외신들은 연합군이 ▦남ㆍ북부 양쪽에서 바그다드 동시 진격(A 계획) ▦ 대규모 융단 폭격을 앞세운 ‘충격과 공포’ 작전을 통한 이라크 지휘부 섬멸(B 계획) ▦유프라테스강 서안에서 측면 진공(C 계획) 등을 통한 바그다드 조기 점령이 실패함에 따라 선(先) 이라크 중남부 전선 장악 후(後) 바그다드 침공 이라는 D 계획을 준비 중이라고 전하고 있다.

하지만 바그다드 침공을 무작정 늦추지는 않을 듯 하다. 뉴욕 타임스는 바그다드 진격과 게릴라 진압 및 보급로 확보를 적절히 배합할 것으로 예측했고, 실제로 29일 미 작전회의에서 부시는 뉴욕 타임스의 예상을 그대로 따랐다.

향후 미군은 바그다드와 이라크 주요 도시에 대한 공습을 한층 강화하는 한편 남부전선 지상력 보강과 북부 전선 개척에 역점을 둘 것으로 보인다. 미군은 보급선을 확보하고 공화국 수비대를 격파하기 위한 보병 4사단 등 12만 명의 지상군 증파에 최소 일주일 이상 소요될 것으로 보고 있다. 이에 따라 이번 전쟁의 승부를 가를 공화국수비대와 미 3, 4사단간의 바그다드 대회전은 5일 이후에나 가능할 듯 하다.

하지만 대회전이 종전 여부를 결정하지는 못할 듯 하다. 럼스펠드는 “바그다드를 포위한 채 반(反) 후세인 봉기를 기다릴 수 있다”고 말했다. 공화국수비대를 격파하더라도 인구 500만의 거대 도시 바그다드에서 시가전의 위험을 감수하지 않고, 장기전을 펼 수 있다는 얘기다. 이럴 경우 전쟁은 몇주의 문제가 아니라 몇 달의 문제가 된다.


부시재선에 역풍, 잃은것 많은 전쟁

전황과 상관없이 미국은 이번 전쟁을 통해 달성하려는 전략적 목표를 향해 다가가고 있다. 연합군은 제일 먼저 점령했던 이라크의 영토 움카스르의 항만을 개건ㆍ운용할 미 민간업체를 선정했고, 영국 업체들은 이라크 재건 사업을 위한 로비를 개시했다.

또 이라크 재건을 이라크 원유로 충당하겠다는 미 국방부의 세부 계획도 확정됐다. 특히 럼스펠드는 대 이라크 무기판매 의혹을 시리아와 이란에 씌우면서 중동 반미국가들에 재갈을 물리기 시작했다. 석유패권, 중동재편 등 전략적 목표가 미국의 가시권에 들어온 듯 하다.

미국의 손실도 그러나 만만치 않다. 갈수록 거세지는 전세계적인 반미 정서로 미국이라는 브랜드 이미지는 곤두박질친지 오래다. 월스트리트는 장기전으로 0%대의 저성장 시대를 맞이할 것이라는 우울한 분석을 내놓는다.

이 때문에 7월부터 본격화할 부시의 재선 선거 운동에도 거센 역풍이 예상된다는 지적이 많다. 이런 손익을 따져본다면 부시가 얻은 것은 아직 불확실한 것 뿐인데 반해 잃은 것은 매우 분명해 보인다.

국제부 이영섭기자

입력시간 2003/04/04 14:37


국제부 이영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