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덕균 개그펀치] 속곳에 감춰둔 쌈짓돈

내가 처음으로 해외여행을 위해 비행기를 탔던 것은 89년, 25세 때였다. 학교 다닐 때부터 일을 시작해서 정상적인 학교생활을 하기가 힘들었고, 제주도로 가는 수학여행도 가지 못했다. 그래서 88년에 작가상을 수상하고 받은 부상이 유럽 일주 여행이라 나의 설레임은 남다를 수 밖에 없었다.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타보는 비행기였고, 머리털 나고 처음으로 가보는 국제 공항이었다. 지금의 인천공항처럼 세련된 분위기는 아니었지만 처음으로 비행기를 타본다는 기대감으로 인해 김포공항의 모든 것은 나를 압도하기에 충분했다.

겉으로야 치기어린 자존심에 초보자로서의 흥분상태를 내보이는 게 싫어서 무척이나 조심하고 태연한 척 했지만 십몇 년이 지난 지금도 그때 김포공항의 분위기나 두리번거리던 내 모습이 선명하게 떠올려진다.

지금이야 몇 번의 경험으로 인해 그 넓은 공항을 불편없이 효율적으로 누비고 다니고 수많은 게이트들을 망설임없이 찾아 들어가게 됐다. 그뿐인가. 작년 여름 개그 콘서트 연기자들과 단체로 태국 여행을 갔을 때는 처음 해외여행을 하는 사람들에게 거의 준비된 가이드처럼 이것저것 챙겨주고 조언까지 해주며 그 동안 터득한 노하우를 아낌없이 발휘하는 수준에까지 이르렀다.

아무리 그래도 내 나라의 공항에서는 그렇게 편안하고 자신만만하던 기분이 타국의 공항에 도착하면 저도 모르게 긴장이 된다. 우선 공기부터 달라진 것 같은 느낌에다 생김새가 다른 공항 직원들을 마주 대할 때면 빨리 공항을 벗어나고 싶은 충동에 조바심이 난다. 완벽하게 작성한 입국 카드를 몇 번씩 확인하면서 스탬프가 찍혀지는 그 순간까지 몇 번이라도 화장실에 가고싶은 이유없는 초조함은 숨길 수가 없는 것이다.

몇 년전 연예인A가 외국에 공연하러 갔을 때의 일이다. 같이 간 일행들과 함께 무사히 비행기에서 내리고 입국 절차가 끝날 즈음에 사건이 터졌다. 공항의 경찰들이 달려오고 마약 탐지견들이 미친개들 마냥 난리가 났다. 누군가의 가방에 마약이라도 숨겨져 있는지 분위기가 아주 살벌했다. 아무 거리낌없이 나서던 A를 경찰들이 빙 둘러싸며 막아섰다.

마약 탐지견들이 미친 듯이 코를 킁킁대며 물어뜯다시피 지목하고 있는 것은 다름아닌 A의 여행가방이었다. 졸지에 마약 소지자로 오인된 A의 여행가방을 풀어헤쳐보니 문제의 진원지는 마약이 아닌 어머니가 정성스럽게 싸주신 밑반찬이었다. 멸치를 고추장에 달달 볶아 만든 한국인의 건강식이 마약 탐지견들의 후각을 자극한 것이었다.

한국인의 매운 맛에 이국의 마약 탐지견들이 그리도 난리를 친 것을 보니 조만간 김치에 이어 멸치 볶음도 세계 시장을 주름잡는 건 시간문제일 것이다.

개그맨 심형래의 어머니가 미국에 갔을 때였다. 심형래의 누나가 미국에 사는데 고령의 어머니가 혼자 다니러 가셨다. 심형래는 워낙 일이 바빠서 같이 모시고 가지를 못하고 어머니 혼자 비행기를 태워드렸다. 아들이 일러준 대로 비행기에서 내려 눈치껏 입국 허가장까지 도착한 심형래의 어머니.

그런데 다 알다시피 입국 절차가 까다로운 미국으로서는 나이도 많은 한국 할머니 혼자 왔다는 게 뭐가 의심스러운지 이것저것 물어보았다. 주변 사람들의 통역으로 딸집에 다니러 왔다고 말한 것 까지는 좋았는데 공항 직원이 돈을 보여달라고 하더란다.

미국 경찰이 돈을 보여주라고 말하자 심형래의 어머니는 난감해졌다. 남의 돈을 함부로 보여달라는 게 무슨 버르장머리없는 짓인가 싶었지만 꾹 참고 돈을 보여주기로 했다. 그래서 혹시 미국 땅에서 나쁜 놈에게 빼앗길까봐 치마 속 속바지에 달아놓은 속주머니에서 꽁꽁 숨겨놓은 돈을 꺼내기 위해 치마를 훌렁 들추자 백인의 공항 직원이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소리쳤단다. “오우, 노우!”

나중에 이야기를 듣고 나서 나는 심형래에게 키득대며 한마디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형, 그래도 어머니가 성희롱 죄로 잡혀가시지 않아서 천만다행이다.”

입력시간 2003/04/04 1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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