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여자가 사는 법] 재즈 보컬리스트, 나윤선

미국 흑인과 유럽의 백인들 사이에서 태어난 온전히 흑인들의 것도 아니고 온전히 백인들의 것도 아닌 소리가 있다. 사생아 같은 소리의 태생적 한계는 다양한 울림을 가진 소리세계를 구축해왔고, 누군가 재즈라 명명했다. 본고장에서조차 정의 내리기 간단치 않은 폭과 깊이를 가지고 있는 이 소리의 세계를 순회하는 아름다운 동양의 아이콘이 있다.

유럽의 무대에서 ‘초우’와 ‘세노야’ 등의 우리 노래를 부르는 그 반짝이는 작은 아이콘은 바로 재즈보컬리스트 나윤선(35)이다.

다양한 소리의 세계를 만날 기회가 적었던 국내에도 붐이 일고는 있지만 여전히 대중들과는 일정한 거리에 놓여있는 재즈. 이 낯선 소리를 찾아 나선 그의 여정은 영화 ‘서편제’에서 ‘한의 소리’를 찾아 떠도는 송화의 기나긴 여정과 크게 다르지 않다.


한참을 돌고서야 접어든 ‘소리’에의 길

그의 노래를 들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가 전문적인 음악 교육을, 그것도 아주 오랜 기간 받아왔을 것이라고 단언한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렇게 정교한 소리를 내기 어려울 것이기 때문이다.

“아니에요, 전혀. 대학에서 불문학을 전공한 뒤 직장에서 카피라이터 생활을 8개월 정도 했는데, 제 일이 아니더라고요. 그 때 한 친구가 회사 그만두고 노래를 해보라고 권했죠. 당시 제가 24,5살인데 그 나이에 어떻게 노래를 시작할 수가 있겠어요? 생각할 수도 없었죠. 그랬는데 어쩌다보니 그 친구의 소개로 ‘지하철 1호선’의 김민기 선생님을 만났고, 그 때부터 노래를 하게 됐어요.”

물론 그는 젊은 한 때 샹송을 좋아하고 즐겨 불렀다. 89년 대학교 2학년 때 프랑스 문화원이 주최하는 샹송대회에서 대상을 수상하고, 부상으로 프랑스 여행을 다녀왔다. 그래도 그때까지는 음악은 취미이기만 했다.

“그런데 정말 운 좋게 몇 편의 뮤지컬을 잇따라 하면서 보니까, 그냥 그렇게 계속 가겠더라고요. 주변에서도 계속 하라고 하고요. 그런데 제가 노력해서 얻은 게 아니라서 다른 동료배우들에게 죄송한 생각도 들고, 제 자신도 한계가 느껴져서 제대로 공부를 해야겠다 싶었어요.”

성악을 전공하고 합창단을 지휘한 아버지, 10여년 뮤지컬을 한 어머니 사이에서 나고 자란 그에게 음악은 물과 공기처럼 늘 그를 둘러싸고 있었다.

“하지만 두 분 다 저에게 강요하지 않으셨어요. 그냥 편하게 저희가 원하는 대로 하게 하셨어요. 제 밑으로 남동생이 있는데, 원래는 조각을 했어요. 열심히 돌 부수고 하더니만 어느 날 갑자기 기타를 치겠다고, 그리고 클래식 기타를 공부하기 위해 스페인으로 갔어요. 엄마, 아빠가 ‘거, 미리미리 했으면 돈도 덜 들고 좀 좋으냐.’고 하시더라구요.(웃음) 남매가 모두 돌고 돌아서 결국은….(웃음)”

우연히(?) 들어선 소리의 세계에서는 모든 것들이 그가 손 내밀기 전에 먼저 다가왔다고, 그래서 그는 “나는 참 운이 좋은 사람”이라고 말했다. ‘지하철 1호선’의 오디션에 이은 두어 편의 뮤지컬이 그랬고, 공부하는 일 역시 그랬다 한다. 실제로 그의 선택 이전에 좋은 음악적 환경이 있었고, 처음부터 최고의 팀들과 작업을 해왔다.

그러나 준비된 것이 없는 사람에게 오는 눈 먼 기회란 그리 흔한 일이 아니지 않는가. “아니요, 아무나 다 해요. 그 아무나 중 하나예요.(웃음) 글쎄요, 조금은 더 쉽지 않았을까하는 생각이 들기는 해요. 남들은 10시간씩 해야 되는 걸 9시간 정도만 해도 되는 정도로요.”

선뜻 수긍하기 어렵지만 그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으면 이렇다. 전문적인 음악교육이라고는 한번도 받아본 적이 없는 사람이 프랑스에 있는 유럽 최초의 재즈학교 ‘CIM’의 가장 기초반에서 1년쯤 머물다 보면 주변에서 많이 도와줘 자연히 요령이 생기게 되고 높은 수준의 반으로 올라갈 수 있게 된다.

또 장학금을 주는 바람에 3년 만에 끝내려던 공부를 1년 더 하게도 되고, 학교에 남아 학생들을 가르쳐달라는 간곡한 제안을 받을 수도 있다. 한국인과 비할 수 없을 만큼 다양한 음악을 접할 수 있는 환경에서 살아온, 이전에 이미 다양한 경로를 통해 직간접적으로 재즈라는 음악을 경험한 사람들이 바글바글한 프랑스의 CIM에서.

그는 이 모든 것이 다만 운이 좋아서였다는 거다. 정말 기껏해야 주당 1시간의 레슨을 받으며 4년간 그 학교에 머물면 누구나 다 뛰어난 재즈보컬리스트가 될 수 있는 걸까.

“맨 처음엔 저도 잘 하는 친구들을 보고는 도망치고 싶을 만큼 두려웠어요. 겁나서 울기도 하고. 그런데 그렇게만 있을 수는 없겠더라고요. 나머지 시간은 혼자 해야 되고, 이것저것 많이 하기도 한 것 같아요. 저 혼자 발성연습도 많이 했지만 특히 친구(악기)들과 같이 많이 했어요.

한 팀이랑 6~7시간 씩 하기도 하고, 그 팀이랑 끝나면 다시 다른 곳에 가서 2시간 다른 애들이랑 하고, 또 전철 타고 다른 데 가서 또 하고…. 이런 식이었어요. 상위 클래스로 올라가면서는 그룹이랑 함께 할 기회가 많아지니까 비로소 조금씩 실력이 느는 것 같았어요.”


소리를 벼리는 匠人, 나윤선

국내에 막 재즈 붐이 일어날 즘에 필자도 재즈를 들어보려다 실패한 후 다시 다른 경로로 재즈를 조금씩 듣기 시작했지만 여전히 재즈는 골치 아픈 소리다. “너무 당연해요. 왜 어렵냐하면 테마가 1분이면, 가운데 즉흥연주가 5분, 10분도 될 수 있어 그 사이를 집중하기란 거의 불가능해요. 사람으로 하여금 불안하게 하는 게 있는 거죠. 저도 아직 듣기 어려운 노래가 얼마나 많은데요.”

그런데 왜 하필 재즈였을까. 그의 미성과 고운 외모는 쉽게 오페라의 프리마돈나나 한 시대를 풍미하는 가수가 되기에 부족함이 없는데.

“노래할 때, 왜 꼭 악보에 써있는 대로만 불러야 할까. 틀리게 부르면 안 될까 하는 생각을 했거든요. 재즈는 노래 도중 즉흥연주로 얼마든지 자기의 창의성을 발휘할 수 있는 장르였어요. 그리고 처음부터 사실 음악은 배운다고 잘 하는 게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있었어요. 물론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지만요. 제 경우는 배우지 않고, 바로 혼자 할 수는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동시에 내가 좀 더 빨리 나가기 위해서는 테크닉이 가장 중요하다는 생각이었어요. 제 소리가 완전하지 않으면 감동을 주기 어렵다는 것이죠.”

물 흐르듯 편안하게 이야기를 하지만, 한참 이런 저런 일로 부침 많았을 20대 중반의 여자가 앞으로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예측도 할 수 없는 선택을 한 이면에 이런 소리에 대한 성찰이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처음부터 끝까지 똑같은 소리로 정확하게 계산된 호흡에 의해 강약이 조절되며 끊어졌다 이어지는 소리, 잘 벼려진 칼처럼 똑 떨어지는 그의 소리는 어느 정도 천부적인 것이었을까.

“악기소리를 많이 흉내 냈어요. 바이올린, 트럼펫, 피아노, 색소폰 등 소리를 가지고 장난(?)을 많이 쳤어요. 이렇게도 불러보고, 저렇게도 불러보는데 그걸 내 목소리만 가지고 부르는 게 아니라, 다양한 소리로 바꿔서 불러보는 식으로요. 다른 보컬보다 악기소리에 귀를 기울였어요.

우리는 보이는 악기가 아니기 때문에 귀를 잘 써야 돼요. 악기 하는 친구들로부터 무시당하지 않고, 그 뮤지션들과 대등하게 음악을 읽어나가야겠다 싶어 잘 듣고, 보고, 써보기도 하며 검증을 받는 식의 공부를 많이 했어요.”

악기를 연주하듯 목소리를 자유자재로 컨트롤하기 위해 연습을 거듭했고, 급기야 그의 가장 절친한 친구이자 동료인 ‘나윤선 퀸텟’ 멤버들로부터 “너는 네 목소리를 연주하는 뮤지션이다”는 보컬로서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찬사를 받았다. “이제 나이가 더해가면서 내가 내고 싶어 하는 소리를 내는 일만 남았어요. 정말 잘 늙어야 할 것 같아요.”


자연인으로 돌아와 앉은 나윤선

머나먼 여정을 돌아 그만의 소리세계를 단단하게 구축하고 돌아온 그에게는 이제 그가 담고 싶은 것들을 잘 담는 일만 남아있는 듯하다. 안도의 순간이 온 걸까. “저는 음악이, 노래가 제 인생에서 제일 중요하지 않아요. 그건 제 직업일 뿐이에요. 다행인 것은 제가 좋아하는 일이고, 그 일이 제게 기쁨을 준다는 것이죠. 하지만 어떻게 해서 음악이 아닌 다른 게 더 좋아질 수도 있는 거죠.”

그렇다. 그는 비로소 자신의 영혼을 담아낼 소리의 그릇을 다 빚었을 뿐이다. 그녀는 사물과 사람, 자연에의 사랑을 그 안에 가득 담고 싶어한다.

“저는 막 살았어요. 별 느낌이 없이. 노래하는 이가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친구들이 말하죠. 하지만 노래할 땐 철저히 그 노래에 몰입하죠. 그때의 나는 내가 아닌 거죠. 그러니까 평소에 그냥 하늘을 본다거나 아름다운 것을 보는 것에 민감하지 않았는데, 나이가 먹으면서 그런 게 참 중요하게 다가와요.”

남보다 늦게 시작한 소리의 세계를 좇는 동안 자연인으로서의 그는 작곡을 하는 남자와 결혼도 했고 그 이후 5년간 유학생활을 하고 지금껏 1년의 절반은 그곳에 머물며 무대 활동과 음반작업을 하고 있다. 두 사람이 서로를 바라보는 시선엔 어떤 걸 담고 있을까. “(남편이)당부한 게 있었어요. ‘절대로 내 얘기는 하지마라’는. 제 활동에 대해서는 말 안 해요.”

별 다른 말이 없이 도와준다는 의미일까. 그냥 누군가의 소개로 만났다는 그들의 연애담은 물론 그 이후의 어떤 이야기도 들을 수가 없었다. 유럽이 격찬하는 동양 여성 재즈보컬이 되기까지의 특별했을 부부이야기는 이렇게 싱겁게 마침표를 찍어야 했다. 그가 점점 더 유명해지면 말 안하고 견디기가 힘들지 않을까.

공교롭게 이때 필자의 딸아이로부터 걸려온 통화 끝에 “엄마가~”하는 말이 나오자, “아, 엄마래. 아…”하며 안타까움이 묻어나는 탄성을 질렀다. “지금 낳아서 책임질 수가 없는 상황이라서…. 낳긴 낳아야죠. 언제가 될지는…. 미안한 마음을 가진 엄마가 되고 싶진 않아요. 포기해야 될 부분들이 생길 거고, 그걸 편안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 때를 기다리고 있어요.” 엄마가 되고 난 후 바라보는 세상이 벌써 그의 바로 앞에 와있는 듯 하다. 머지않아 좋은 소식이 들려올지도 모르겠다.

양은주 자유기고가

입력시간 2003/04/06 1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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