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섭의 한의학 산책] 묵 한사발 건강 한숟갈

요즘은 밤에 ‘메밀묵~ 찹쌀떡~’을 외치는 소리를 거의 들을 수 없다. 배고픈 달밤, 묵을 고춧가루로 양념한 간장에 찍어 먹으며 청춘의 허기를 달래던 그 시절이 생각난다. 그때는 왜 먹어도 먹어도 배가 고팠는지. 벌써 묵 이야기하려니 침부터 넘어간다.

묵은 메밀, 녹두, 도토리 등의 가루를 물에 가라앉혀 앙금이 생기게 한 후 죽을 쑤어 식혀 엉기게 한 음식을 말한다. 녹두로 만든 청포묵은 봄이나 초여름에 주로 만들어 먹었고, 7, 8월에는 옥수수로 만든 올챙이묵을 즐겼으며, 가을이 되면 산에 떨어진 도토리를 주워 도토리묵을 만들었고, 추운 겨울에는 메밀묵을 즐겼다.

지금은 계절에 상관없이 모든 묵을 구할 수 있지만, 철별로 즐기는 맛 또한 버릴 수 없는 즐거움이다.

이봉구 선생의 글에 보면 동해바다의 파도 빛 같고 어릴 때 본 아주머니의 비취비녀 색깔같은 연한 옥색빛이 감돌기도 하는 청포묵은 그 빛깔과 야들야들하고도 수정같은 몸매에도 정이 가지만 목으로 넘어가는 신선하고도 미끈한 감촉을 잊을 수가 없다라고 청포묵을 묘사한 것이 있다. 이렇게 묵은 맛있으면서 모양도 보기 좋고 여러 가지 효능도 가지고 있다.

고구마묵에는 식물성 섬유가 많이 들어있고, 우유빛 세라핀이라는 성분이 있어서 변비 예방은 물론 고혈압이나 대장암에도 효과가 있다. 가시리묵은 바다에서 자라는 해초로 만든 묵인데, 식이 섬유가 많고 칼륨, 칼슘, 마그네슘, 철, 인 등이 풍부하여 빈혈예방, 기력회복에 좋다.

또 도토리묵은 구황식이나 별식으로서 오래 전부터 이용되어 왔는데, 당뇨예방, 지사효과, 중금속 해독 등에 효능이 있으며 위를 튼튼하게 한다. 최근 각종 연구에서는 항암 효과도 발견되고 있다. 게다가 100g당 45Kcal밖에 되지 않는 저열량 식품으로 다이어트를 하는 사람들이나 비만 환자에게 좋고, 소화가 잘 되기 때문에 정신노동을 하는 사람들이나 노인에게 권장되는 음식이기도 하다.

도토리묵은 도토리의 껍질을 까서 말린 다음 절구에 빻아 4~5일 동안 물에 담가 둔 다음 윗물을 따라 버리고 가라앉은 앙금을 걷어 내어 말려 도토리 가루를 만들고, 도토리 가루와 물을 1대3 정도로 해서 풀어서 끓여 엉기게 한 후 식혀서 만든다. 도토리 성분 중 탄수화물이 47%정도인데, 대부분 녹말이며 떫은맛을 내는 탄닌이 3%가량 들어 있다.

이 탄닌은 묵을 만드는 과정 중 많이 없어지게 되는데, 남아있는 탄닌의 양이 알맞으면 모세혈관을 튼튼하게 하는 효능을 발휘한다.

청포묵은 녹두를 맷돌에 갈아서 1컵 정도 준비해서 물에 담구어 하룻밤 불려 2컵이 되게 하고 껍질을 깨끗이 일어낸 후 믹서에 곱게 갈아 전분을 가라앉혀 만든다. 녹두는 해독작용이 뛰어나서 노폐물을 없애고 열을 내리고 식욕을 돋구는 효과가 있다.

피로를 회복시키며 입술이 마르고 입 속이 헐었을 때 먹으면 효과가 있다. 소화를 돕고 소변이 잘 나오게 하는 작용도 있고, 피부 미용에도 좋아서 녹두를 곱게 갈아서 따뜻한 물에 이겨 크림처럼 만들어 잠들기 전에 얼굴에 바르면 살결이 고와지고 여드름과 주근깨에도 좋다.

봄기운을 느끼러 등산을 가면서 산자락에 있는 시골음식점에서 묵 한 접시 먹고, 흘러간 유행가 가사나 한번 읊조려 볼까? 살면서 부딪치는 문제들도 많지만, 몸으로 마음으로 느끼는 살아있다는 감동도 이런 순간에 더 가까이 다가오지 않을까 싶다.

강남경희한방병원 이경섭병원장

입력시간 2003/04/06 13:11


주간한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