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황 사선을 넘어라" 마케팅 혈전

백화점 등 유통업계 불황기 생존 몸부림

3월25일 오후, 현대백화점 목동점 7층 토파즈홀.

호텔 컨벤션 홀의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행사장에 '아줌마 부대'가 속속 몰려들기 시작했다. 백화점측이 1월말부터 매월 둘째, 넷째 화요일에 정기적으로 개최하고 있는 '파워 경매'에 참석하려는 이들이다. 응찰 푯말을 받아 든 120여명 외에도 호기심에 구경하러 나선 쇼핑객까지 족히 200명은 돼 보인다.180평의 넓은 공간이 오히려 비좁게 느껴질 정도다.

'아줌마'들은 저마다 이날 매물로 나온 20여점의 경매 물건이 소개된 백화점 전단지를 꼼꼼히 살피며 행사 시작을 기다리고 있다. 오후 3시, 사회자의 안내와 함께 경매가 시작된다. 불황은 불황인것일까. 의류나 액세서리 등 사치성 제품은 번번히 유찰된다. 잠시 뒤, 가전 제품의 경매가 시작되자 주부들의 얼굴에 생기가 돋기 시작한다.

치열한 눈치 작전과 함께 여기저기서 응찰 푯말이 올라간다. 시초가 109만원이던 소니 디지털 캠코더는 적잖은 경쟁속에 115만원에 낙찰됐다. 정상가가 154만8,000원이니 그래도 25% 이상 저렴하게 구입한 셈이다 '꾼'들이 아니다 보니 운이 좋으면 예상보다 훨씬 저렴하게 물건을 구입할 수 있는 행운도 거머쥘 수 있다. 정상가 186만8,000원짜리 아남 32인치 완쳔 평면 TV는 당초 예상과 달린 시초가(130만7,000원)에 응찰한 고객에게 그대로 돌아갔다.

경매 행사에 참석한 한 주부는 "주머니 사정이 빠듯해서 요즘 백화점을 잘 찾지 않았는데 이색행사가 있다고 해서 혹시 물건을 싸게 살 수 있을까 해서 들러봤다" 며 "마땅히 내키는 물건이 없어 응찰을 하지는 않았지만 재미는 있었다"고 했다.


불황 마케팅으로 혹독한 겨울나기

유통업계가 극심한 불황을 타개해 보겠다며 팔을 걷어붙였다. 엎친 데 덮친 격이라고 지난해 하반기 이후 가뜩이나 경기가 침체돼 있는 마당에 미국의 대 이라크 전쟁의 조기 종결 기대도 점차 멀어지는 분위기다.

설사 이라크 전이 끝난다 해도 북핵문제가 도사리고 있어 꽁꽁 얼어 붙은 소비 심리에 언제쯤 봄바람이 불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처지다. 업계 내부에서는 "이대로 가다가는 백화점들이 줄줄이 문을 닫겠다"는 '엄살 반 진담 반'의 얘기까지 흘러 나온다.

그렇다고 5년 전 외환위기 때처럼 앉아서 당하지는 않겠다는 태세다. 당시 엄청난 비용을 지불하고 불황을 나는 방법을 경험적으로 학습한 덕이다. 업체들은 저마다 소비자들의 닫힌 지갑을 열기 위해 기발한 아이디어를 쏟아내며 발버둥치고 있다. 이른바 '불황 마케팅'을 통해 유통 업체들이 힘겨운 겨울 나기를 하고 있는 셈이다.

백화점들이 '권위 파괴'와 '문턱 낮추기'로 승부를 걸고 있다. "품격 있는 고객이 아니면 발도 들여놓지 말라"는 듯 고고한 마케팅으로 일관해왔던 백화점들이 시골장터나 재래시장에서나 어울릴 법한 마케팅 기법들을 과감히 동원하기 시작했다.

'백화점 경매'도 그렇게 기획됐다. 현대백화점 목동점 판매기획팀 이동준 대리는 "사실 경매 물건은 기껏해야 20여점, 30점에 불과해 생색만 내는 정도"라며 "백화점에서는 보기 힘든 것 같은 이벤트를 진행함으로써 고객들에게 친근감을 주고 관심을 높이기 위한 행사로 기획됐다"고 설명했다.


백화점, 문턱 낮추기 경쟁

뒤이어 롯데백화점도 '백화점 경매'대열에 뛰어들었다. 일산점에서 진행하고 있는 경매 행사는 우선 상품부터가 눈길을 끈다. PT- 크루져나 세블링 컨버터블등 4,000만원을 넘는 고급승용차, 500만원에 육박하는 소니 프로젝션 TV(51인치)등 고가 제품이 대부분이다.

최저 경매가가 정상가의 50%이니 억세게 운이 좋으면 대박을 잡을 수도 있다. 경매 방식도 특이하다. 행사 시간(3월25일~30일) 하루 10만원 이상 구매 고객에게 입찰권을 나눠주고 원하는 상품의 희망 매입 가격을 적어내면 4월1일 각 상품 별로 최고가를 적어낸 고객에게 낙찰하는 방식이다.

백화점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최저가보다 1만~2만원 정도 높은 가격을 적어내는 고객들이 상당수"라며 "하지만 일부 고객은 제품에 탐을 내 실제 작찰을 받을 요량으로 신중히 경매가를 적어 내기도 하는 등 반응이 좋다"고 말했다.

롯데백화점은 일산점 뿐 아니라 소공동 본점, 잠실점, 영등포점 등에서도 매주 금요일, '당일 경매' 형식으로 가전 제품, 가구, 의류 등을 내놓고 경매 행사를 펼치고 있다.

시골 장터에서나 볼 수 있던 '3일장', '5일장' 등의 표현도 백화점에 등장했다. 롯데백화점 잠실점은 3월 중순 '신춘 송파 3일장'을, 청량리점은 '개미 장터'를 열고 잡화와 의류 등을 1만~7만원의 가격에 내놓았다. 백화점 한 관계자는 "떨이 행사를 하게 되면 시장처럼 시끌벅적한 분위기가 되기 때문에 자칫 편안한 쇼핑을 원하는 백화점의 이미지를 훼손할 수 있다"면서도 "하지만 요즘 같은 불황기에는 이런 행사를 통해서라도 실적을 높이는게 우선"이라고 말했다.

나이트클럽의 한턱 쏘는 기분 내기 이벤트인 '골든벨'도 백화점 마케팅 수단으로 동원됐다. 현대백화점 목동점은 3월 중순 하루 30명을 대상으로 물품 구매 후 계산 과정에서 골든벨을 울린다. 해당 고객에게 100만원 한도 내에서 물품 구매액 전액을 돌려 주는 행사인 '골든벨을 울려라'를 펼쳐 공짜를 바라는 쇼핑객들의 가슴을 설레개 했다.

'상시 세일'이라는 비판 소게 축소했던 세일 기간도 '불황'을 틈타 슬그머니 늘어났다. 롯데 현대 신세계 갤러리아 등 주요 백화점들은 예년보다 5일 가량 이른 3월 21일부터 봄 브랜드 세일에 들어갔다. 봄 정기 세일도 4월 1일부터 시작해 지난해보다 2일 가량 늘어난 14일간 진행할 예정이다.


초저가 경쟁 불꽃 튀는 할인점

할인점은 '불황 특수'를 누리는 곳이라지만, 그 만큼 업체간 경쟁은 더욱 치열하다. 불황기에는 제품의 질과 서비스를 떠나 "어느 곳이 더 낮은 가격을 제시하느냐"에 승부가 날 수 밖에 없는 법. 집집마다 뿌려지는 할인점 전단지 광고에서도 할인점들의 불꽃 튀는 불황 마케팅 혈전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3월 초만해도 '새봄맞이 최저가 기획전'(이마트), '1등 상품 파격 특별기획'(롯데마트), '새봄 새출발 파격가전'(그랜드마트) 등 비교적 점잖았던 광고 문안은 3월 중순을 고비로 한층 공격적으로 변했다.

'전 상품 최저 가격 특별 기획전'(이마트) '대한민국 최저가 에누리 쿠폰 대축제'(롯데마트) '상상초월 최저 가격 선언'(그랜드마트)등 아예 '설전'의 수준이다.

일정한 시간 대에 식품류 가격을 할인해주는 '타임 서비스'등 전형적인 할인점 마케팅 아이템을 탈피, 한층 다양한 이벤트로 고객의 발길을 붙든다. 롯데마트 도봉점은 3월 한달간 '요일별 판촉전'을 펼쳐 고객들의 발길을 끌어 들였다. '불의 날' 화요일이면 불루 구워 먹을 수 잇는 축산품을, '물의 날' 수요일에는 생선을, '나무의 날' 목요일에는 나무에서 열리는 청과와 야채를 저렴하게 판매하는 식.

영등포점은 3월14~31일 매일 종류를 바꿔 가며 게임형 이벤트를 진행했다. 'TV 빨리 끄기' '국산 한우 알아 맞추기' '방울토마토 중량 알아 맞추기' '입안에 꼭 맞는 초밥 만들기' '라면 높이 쌓기' 등.

이벤트에서 입상하는 고객들에게는 한우 고기와 라면 등 주부들이 선호하는 상품을 나눠주고 있다.

신세계 이마트는 현금처럼 활용할 수 있는 적립 포인트를 대폭 높여 큰 호응을 얻었다. 3월 20일~30일 전국 51개 점포에서 OK 캐시백 보너스 상품을 구매하는 고객들에게 구매 금액의 최대 10%를 포인트로 추가 적립해줬다.

특히 행사 기간 중 상품을 구매한 뒤 SK주유소를 방문하는 고객에게는 포인트를 2배로 적립해주는 한편, 추첨을 통해 뽑힌 고객 1,890명에게는 LG 29인치 완전 평면 TV, 삼성 디지털 카메라 등 푸짐한 경품도 나눠줬다.

또 삼성테스코 홈플러스는 생필품 1004개 품목을 정해 정가보다 최고 48% 할인 판매에 나섰고, 그랜드 마트는 다른 할인점보다 비싸면 차액의 3배를 돌려준다는 '최저가격 3배 보상제'를 들고 나왔다.

소비자들 입장에서야 유통 업체들의 풍성한 불황 마케팅이 싫을 리 없겠지만, 내부적으로는 자칫 제 살 깍기가 될 수 있다는 우려도 높다. 업계 한 관계자는 "아이디어 차원의 마케팅으로 확전이 되면 불황 장기화의 경우 업계 전체가 흔들릴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


최악의 소비심리 "죽을 맛입니다"

요즘 소비 심리는 그야말로 최악이다. 6개월 전과 현재의 생활 형편을 비교하는 통계청의 소비자 평가 지수는 2월에는 전월보다 6.1포이트나 급락한 73.5를 기록했다. 2001년 2월 73.2를 기록한 이후 2년암의 최저치다.

특히 평가시주 항목 중 경기지수는 63.9까지 추락했다. 소비자들이 느끼는 '체감 경기'가 얼마나 얼어 붙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수치다.

경기의 척도라는 백화점 매출도 바닥을 헤매고 있다. 롯데, 현대, 신세계등 주요 백화점의 2월 매출은 전년 같은 기간에 비해 7~10%나 감소했다.

양주 판매량도 체감 경기를 가늠하는 대표적인 잣대다. 주류업계에 따르면 2월 국내 위스키 판매량은 25만868상자(500ml 18병 기준)로 전년 동기 25만7,551상자 보다 3% 감소했다. 1월(37만8,767상자)보다는 무려 34%나 줄어든 수치다. 1999년 이후 월 단위 위스키 판매량이 전년 동기보다 감소한 것은 2월이 처음이다.

경기 상황을 파악하려면 택시 운전사에게 물어보라고 했다. 올해로 30세라는 젊은 영업용 택시 운전사는 이렇게 대꾸한다. '택시 운전한 지 얼마되지는 않았지만 요즘 같은 때는 처음이에요. 지갑에 현금을 갖고 다니지 않기 때문에 장거리는 아예 탈 생각조차 하지 않더라구요. 전쟁도 장기화 할 수 있다는데 아주 죽을 지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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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시간 2003/04/07 1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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