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의 눈] 대통령의 실수는 자랑이 아니다

10년 전 이맘때 대통령을 비롯한 유명 인사들을 주인공으로 한 우스개 소리 ‘~시리즈’가 크게 유행했다. 유럽식 표현을 빌리자면 ‘아넥도트(anecdote)’다. 일화(逸話)로 흔히 번역되지만 사회적 풍자성이 짙은 짤막한 유머라고 보면 된다.

당시 갓 취임한 김영삼 대통령의 부산 사투리와 촌스런 몸짓, 남의 시선을 개의치 않는 대범한 행동 등은 ‘~시리즈’의 좋은 소재가 됐다. 상대의 의표를 찌르는 ‘~시리즈’는 군사독재의 종식과 더불어 우리 사회의 권위주의적 엄숙함을 깨뜨리는데 기여한 게 사실이다.

때마침 독일에서도 통일의 영웅인 헬무트 콜 총리를 다룬 ‘콜시리즈’가 인기를 끌었는데, 이를 패러디한 듯한 YS 시리즈는 ‘YS는 못말려’라는 유머집에 압축돼 있다. 그 중에서도 ‘퍼스트 레이디'와 ‘YS의 오른팔’이 압권이다.

부인을 보고 “퍼스트레이디가 된 걸 축하한다”는 말에 YS가 화들짝 놀라며 “아니, 우리 집사람은 세컨드가 아니다”며 손을 내저었다는 것과 YS의 오른팔이라고 떠들고 다니는 사람에게, “니, 내가 왼손잡인 거 아나?”라고 받아친 것 등은 ‘인간 YS’를 보여주는 걸작이다. 그러나 뭐니뭐니 해도 YS의 상징어는 ‘학실히(확실히의 부산식 발음)’다.

노무현 대통령의 지난 몇 개월을 되짚어 보면 ‘YS는 못말려’를 생각하게 된다. “맞습니다. 맞구요”가 ‘학실히’에 버금가는 유행어로 떴고, 개콘(개그콘서트)의 노 통장은 하루 아침에 방송의 스타가 됐다. 그의 개그는 ‘YS시리즈’를 대신할 만하다.

실수라면 또 YS였다. 일일이 열거할 수는 없지만 그의 악의 없는 실수나 NG는 그 시대 상황에선 국민에게 친근감과 편안감을 안겨 주었다. 그리고 엄숙하고 정확하고, 철저한 DJ시대를 거쳐 10년 만에 대통령의 ‘실수 시리즈’가 다시 우리 곁으로 돌아왔다.

노 대통령은 엊그제 청와대 출입기자들을 초청한 가든 파티에서 일찍 자리에서 일어서며 “소주 한잔 먹고 실수 한 두건 하고 가야 속이 풀리겠는데…”라고 우스개 소리를 할 정도로 실수가 잦다. YS처럼 악의는 없지만 4월2일 오전 10시 첫 국정연설을 위해 국회 연단에 오른 노 대통령이 “시작해도 되나요?”라며 묻는 장면을 TV에서 보는 마음은 그리 편하지 않다. 얼마 전만 해도 공식 행사에선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장면 아닌가?

3월 11일 육사 졸업식장에서 일어난 일이다. 생도들로부터 ‘대통령에 대한 경례’를 받은 노 대통령은 답례를 깜박 잊고 연설을 하기 위해 ‘열중 쉬어’를 지시했다. 지휘관이 연설이나 지시사항을 하달할 때 ‘답례’를 한 뒤 부하들에게 ‘쉬어’를 시키는 게 원칙이다. 배석한 군 지휘부의 얼굴이 굳어졌으나 “기왕에 열중 쉬어까지 했으니 그냥 가자”는 노 대통령의 재치로 상황이 수습됐다고 한다. 10년 전 꼭같은 장소에서 김 전대통령도 비슷한 실수를 했다. 생도들의 우렁찬 경례를 받은 뒤 ‘쉬어’지시를 내리지 않은 채 치사를 시작한 것이다.

10년의 시차를 둔 대통령의 유사한 실수는 계속된다. 김 전 대통령이 군 마피아 ‘하나회’ 인맥을 정리하는 차원에서 수방사령관과 특전사령관을 전격 경질한 뒤 보직신고를 받을 때였다. 장성들의 삼정도에 술을 달아준 뒤 악수를 해야 하는데 악수를 생략해 의전 관계자들이 진땀을 흘렸다. 노 대통령도 최근 김종환 합참의장 등 6명에 대한 진급 및 보직 신고 때 계급장은 서열 순서대로 달아 주었으나 악수는 거꾸로 하는 실수를 저질렀다.

노 대통령의 실수에 대해 측근은 “규격화된 행동을 싫어하는 대통령의 스타일에서 나온 것으로 엄숙한 분위기를 부드럽게 만드는 촉매제 역할을 한다”고 말한다. 이 해석 또한 어쩌면 10년 전과 똑같은지 모르겠다. YS측근도 대통령의 실수는 대범한 성품에서 나오고 그 실수가 오히려 사람을 끌어당기는 독특한 흡인력을 갖고 있다고 했었다.

우리 사회는 문민정부의 출범후 대통령이 유머집의 소재가 될 만큼 세상이 변했고, 노 정부의 출범으로 또 한번 세상이 뒤집어졌다. 허점이 없는 완벽한 대통령보다는 가끔 미소를 머금게 하는 대통령이 국민과 더 가까워지는 것도 사실이다. 우리는 그만큼 엄숙한 권위에 짓눌려 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통령의 실수를 계속 애교로 보아 넘기거나 자랑으로 여기는 분위기는 곤란하다. 온 국민이 지켜보는 가운데 나오는 대통령의 실수가 처음에는 웃음을 주나 나중에는 국민을 불안하게 만든다. 그러다 정작 중요한 때 실수를 하면 국가의 안위가 흔들릴 수도 있다. 노 대통령은 이제 실수를 웃어넘기는 아마추어리즘을 버려야 한다. 대통령직은 누구보다도 한번의 실수를 용납하지 않는 자리다. 하나회 인맥정리, 금융실명제 등 엄청난 개혁을 추진한 YS도 불행하게 임기를 끝내지 않았던가.

이진희 부장

입력시간 2003/04/09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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