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북을 접으며] ‘국민 최악의 날’

노무현 대통령은 4월2일 국회 국정연설 도중 느닷없이 서동구 KBS 사장의 이야기를 꺼내 들었다. 서 사장의 인선과 관련해 이사회에 인사추천만 했을 뿐 압력행사는 없었다는 게 요지.

청와대로 돌아간 그는 기자간담회를 자청해 장황한 해명을 늘어놓으며 사표 수리 여부를 뒤로 미루겠다고 했다. 그날 저녁에는 KBS 노조 간부들을 청와대로 초청해 토론을 벌였다. 대통령은 서 사장의 임명을 둘러싸고 이날 하루에만 국회와 기자실, 청와대 만찬장을 오가며 하루 일과를 소진한 셈이다.

그러나 그날이 어떤 날인가. 이라크 파병 동의안에 대한 국회 표결에 앞서 국민여론이 찬반으로 갈려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을 때였다. 국회 정문 앞에서는 시위대와 경찰이 맞서 거센 몸싸움을 벌이기도 했다. 중대 현안을 결정하는 국회에 국민의 이목이 쏠려 있을 때 정작 파병을 결정한 노 대통령은 일개 공사(公社)의 사장 임명을 놓고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하고 있었다. 참으로 기이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노 대통령의 시각에서는 파병 문제보다 KBS 사장 인선이 더 중요한 일이었는지, 아니면 노 대통령보다 일개 시민단체나 일반 대학생 및 시민이 더 국가 중대사에 관심이 많은 것인지 도대체 알 수가 없다.

결국 노 대통령이 서 사장의 사표를 수리하면서 “취임 후 최악의 날”이라고 속내를 밝혔다. “인사에 개입한 적이 없다고 했는데 오늘 보니 거짓말한 것 같아 낯이 뜨겁다. 내 불찰이다”라고 말한 점 등이 최악의 날을 선포(?)케 한 배경이다.

과연 그날이 노 대통령에게만 최악의 날이었을까. 그날은 파병안 처리로 인해 국제사회에서 갖고 있는 노 정권의 불안한 외교적 먹구름이 일정 부분 걷혀가던 때였다.

미국 등 서방의 정치 지도자나 경제인들과 향후 한반도 정책이나 투자 유치를 심도 있게 논의할 수 있는 호재(好材)가 오랜만에 등장한 날이기도 했다. 초미의 국가적 관심사가 매듭지어지던 시점에, 외교환경을 유리하게 조성할 수 있는 분위기가 만들어지는 그 시점에 정작 국가 최고 지도자는 엉뚱한 일에 시간을 낭비했으니….

최악의 날은 대통령뿐만 아니라 국가적으로 기회를 살리지 못해 손안에 든 이익마저 챙기기 못한 국민 전체에게 다가왔다. 최악의 날이 더 이상 오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염영남 기자

입력시간 2003/04/09 16:24


염영남 liberty@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