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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병의 역사] 미국 주도 전쟁… 명분 보다는 실리

베트남전 이후 11번째 해외파병, 한미관계에 따른 결정

우리 군의 해외 파병은 40년의 역사를 갖고 있다. 하지만 이번처럼 반대여론이 비등했던 적도 없다. 1960년대의 베트남 파병과 그 상처는 우리 현대사의 한 페이지에 자리잡고 있다.

91년 미국이 주도하는 걸프전에 의료진과 공군수송단을 파병했으며 그 이후 소말리아, 서부 사하라, 그루지야, 인도ㆍ파키스탄, 앙골라, 동티모르, 키프러스와 같은 지역을 관할하는 유엔평화유지활동(PKO)을 위해서도 군대를 보냈다. 또 9ㆍ11 뉴욕테러 이후 미국이 주도한 아프간 테러 전쟁에 우리 젊은이들을 파견했다.

지난 40년간의 파병을 그 성격상 크게 둘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미국이 수행하는 전쟁에 한ㆍ미관계를 고려해 참여하는 경우였다. 다른 하나는 유엔의 PKO에 참여하는 것. 유엔 가입 후 유엔 회원국의 일원으로 평화유지활동에 참여해야 한다는데 큰 이의 제기가 없었고 동티모르의 경우를 제외하고 모두 평화유지활동에 걸맞게 공병 혹은 의료진 파병에 국한되었다.


베트남 파병은 ‘박통’이 제의

파병반대의 목소리가 높았던 곳은 미국이 주도하는 전쟁에 참여하는 경우였다. 2차 대전 이후 미국 주도의 전쟁은 대부분 그 성격과 명분을 둘러싼 논란이 있었고, 당연히 우리나라에서도 논란도 뒤따랐다. 특히 베트남전은 우리 입장에서 특별한 참전 명분이 없었다는 점에서 이번의 이라크 전쟁과 비슷하다.

차이점은 베트남 파병이 우리측 주도로 이뤄졌다는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이 먼저 미국측에 파병을 제의한 것이다. 5ㆍ16쿠데타 이후 미국의 지지와 지원을 필요로 했던 박 대통령은 1961년 11월 최고회의 의장 자격으로 미국을 방문, 방미 일정 중에 케네디 행정부와의 비공개회의를 통해 최초로 파병의사를 밝혔다.

처음에 한국군의 활용 필요성에 대해 조심스러운 반응을 보였던 미국은 나중에 ‘보다 많은 국가들의 참여를 위한 캠페인’이 시작되면서 우리 군의 참전을 허용했다. 베트남 파병 과정에서 적지 않은 논란이 국회에서 일었다.

비 전투병력에 국한된 1,2차 파병은 특별한 논란이 따르지 않았지만 대규모 전투 병력 파병을 내용으로 하는 65년의 제3차 파병 때에는 국민의 반대 여론도 비등했다. 야당도 반대입장을 보였지만 66년 3월 파병동의안은 국회를 통과했다.

베트남 파병은 젊은이들의 피를 흘리는 대신 경제적 대가를 챙기는 일종의 거래와 같았다. 베트남 참전을 통해 전쟁특수를 누렸고 수출을 늘리고 미국의 차관지원을 받아낼 수 있었다.


한미간 군사동맹관계 확인

오랫동안 잠잠했던 해외파병은 91년 다국적군의 걸프전이 시작되면서 재개됐다. 노태우 정부는 의료지원단에 이어 공군수송단 파병을 결정했고 5억 달러 규모의 군사지원도 했다.

베트남 파병이 미국의 지원과 경제적 대가를 겨냥한 것이었다면 걸프전 파병은 미국이 구상중인 ‘미국 주도의 새로운 세계질서’에 합류하려는 의사, 그리고 한미간 군사동맹 관계의 확인이라는 배경이 깔려 있었다. 당시 파병반대 목소리는 소수 야당과 재야 운동권에만 머물렀고 파병동의안은 큰 어려움 없이 국회를 통과했다.

2001년 9ㆍ11테러 이후 발생한 아프간 전쟁에는 해ㆍ공군 수송지원단, 공병, 의료 500여명을 파병했다.

장학만 기자 local@hk.co.kr

입력시간 2003/04/10 1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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