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여자가 사는 법] 巫女 이해경

恨의 삶을 보듬고 세상과 소통하는 만신

어린 시절 동네에서 굿을 한다는 소문이 마을에 퍼지면 온 동네가 축제를 앞둔 것처럼 들뜨곤 했다. 굿이 끝난 뒤 먹게 될 맛난 음식의 맛도 맛이지만, 어른들이 온통 굿판에 정신을 쏟고 있는 동안 아이들은 맘껏 온 동네를 쑤시고 다녀도 좋았기 때문이다.

또 굿이 끝나면 거짓말 같이 사라져버리는 무당의 자리에 아이들이 또 다른 굿판이 벌리곤 했다. 그런데 열일을 재치고 굿판으로 달려가 머리를 조아리던 어른들이 현실에서 아이들이 하는 굿 놀이엔 작대기를 들고 쫓아와 판을 깨곤 했다. 무당은 우리에게 그런 존재였다. 현실 속에 있어서는 안 되는.

그렇게 오랜 시간이 흐른 뒤, 굿판 밖에 모습을 드러낸 무녀, 최초로 인터넷을 통해 이 땅에 사는 젊은이들과 현실 속에서 소통하기를 원했으며, 무대에서 비현실의 무속세계를 현실에서 설명하고 싶어 하는 무녀, 이 해경(48세, 무녀)을 만났다.


최초 나의 신명을 일개워준 음악

그녀의 집을 들어서자 거실에 요즘 여느 집에서 보기 힘든 턴테이블이 달린 오디오가 눈에 들어오고, 명반으로 손꼽히는 LP와 시디들이 장르 별로 빼곡하게 꽂혀있었다.

어릴때부터 음악과 가까워 왔다는게 거기에는 이유가 있었다.

“한 대여섯살 쯤 홍역을 심하게 앓아 죽을 고비를 넘기고, 열 두어살 쯤에 늑막을 앓아 또 한 고비를 넘겼어, 그래서 그런지 아무 일 없이 길 가다가도 픽픽 쓰러지곤 했어. 하루는 삯바느질 하는 엄마의 무릎을 베고 누워있는데, 갑자기 '죽는다'는 생각과 함께 몇 해 전 죽은 동생 모습이 떠오르면서 마치 흙더미가 나를 덮치는 느낌이 들었어. 그때부터 무서워 가위 눌리는 거지. 밤잠을 잘 못 잤어. 그렇게 뒤척거리며 매일 이불 속에 라디오를 넣고 들었어."

어린 그녀의 감수성을 헤집는 일은 죽음만이 아니었다. 그녀가 태어난 지 석 달 만에 들이닥친 아버지의 본부인이 그녀의 집을 찾아 왔다. 그때부터 아버지의 지원이 끊기면서 먹고 살기가 팍팍해진 것은 당연한 일. 자라면서 그녀는 아버지의 두 집 살림을 알겠 됐고, 이는 성장 과정에 적잖은 영향을 끼쳤다. 중·고교 시절 학교에는 그리 정을 붙이지 못했다. "항상 등록금을 못 내서 칠판에 내 이름이 적혀 있는 거야. 내 자존심에, 그렇다고 대학에서 장학금을 타며 공부할 자신은 없고, 그래서 난 아주 선언을 해버렸어. 대한 안 간다고, 그러고 학교 대신 음악이 나오는 분식집이나 감상실을 쏘다니기 시작했지, 지랄을 하고 다닌 거지. 그리고 툭하면 절에 가는 거야."

아끼던 선생님의 권유로 우연히 가 봤던 절이 좋아서 틈만 나면 서울 근교의 산을 오르며 절을 찾아 다녔다. "그때도 그랬지만 산은 내게 언제나 특별한 기운을 줘. 에너지를 충전하는 곳이지." 그런 중에도 길을 가다가 쓰러지곤 하는 증세는 계속되었지만 당시 음악과 절을 찾아 다니는 일의 신명은 곧 부서질 것처럼 작고 약한 그녀의 버팀목이 되어주었다.


원치 않았던 만남과 인정할 수 없는 이별

아버지는 점차 약해져가는 그녀를 팔당 근처로 휴양을 보냈다. 그곳에서 그녀는 예기치 못한 사람을 만났다. 애초 그는 그녀의 간병을 위해 온 언니가 만나던 남자였다. 어쩌다 그녀와 얼굴을 마주친 이후, 남자는 언니에게 술을 먹여 재우고 그녀에게 접근했다. 덜컥 임신이 됐다. 집에서 낙태를 종용해 병원까지 갔지만 차마 아이를 지울 수 가 없었다.

"누가 실수를 했건 이건 아니다 싶었던 거지. 그 길로 그 사람을 찾아간 거야."

불과 2, 3개월인가 그녀도 '아, 사람들이 이래서 결혼을 하는구나!' 싶었다. 그리고 그 후의 생활은 고통스럽기만 했다. 딸과 2년 터울로 난 아들의 죽음(당시 5세)은 그녀의 불안한 삶을 송두리째 흔들었다.

“찌게가 짜면 어떤 놈 생각하고 끓이느라 찌게가 이러냐면서 던지고, 맞고. 배추장사한테 배추 좀 깎아주세요, 하고 웃었지? 그럼 바로 그 사람을 꼬이는 게 되는 거야. 애가 아프다던 그날도 그 인간한테 들들 볶이고 있었거든. 그런데 아픈 애가 모로 누워 빤히 보더니 ‘아빠, 아빠가 나빠요. 엄마는 잘 못이 없어요.’ 딱 그 한 마디 하더니, 딱 뒤돌아 눕는 데 기분이 이상하더라고. 그래 가서 보니 눈을 감고 있어. 그길로 애를 업고 미친년처럼 뛰었지. 골수이식인가를 해 기운이 다 빠진 애를 두고 이불 공장을 정리하러 가야했어. 입원을 해야 된다니까. 우리 규민이 뭐 갖고 싶어? 그랬더니 엄마 가서 따발총 사오래. 그래, 그럼 엄마가 가서 따발총 사갖고 올게, 그게 마지막인 거야. 그러고 온 거야.”

말보다 눈에서 뜨거운 불이 먼저 올라왔다. 불길 끝에 젖어드는 그녀의 눈은 아직도 죽어가는 아이를 놓치지 못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야, 이 미친놈아 그래, 애 하나를 못 지키냐, 이 새끼야. 걔가 나한테는 전부였거든, 딸하고. 근데 멀쩡하던 애가 식물인간이 된 거야. 얼마나 기가 막히겠어. 그냥 기운만 없어보였어. 내가 볼 때는. 난 걔 때문에 산거야. 걔 아니었으면 난 그 놈하고 살 이유가 요만큼도 없었어.”

그녀의 절규는 지금도 귀에 쟁쟁하다. 아이와의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이별 후에도 남편이 주는 고통은 멈추지 않았다. 결국 아이가 죽은 지 1년이 채 안 된 어느 날, 엄청난 폭력에 지칠 대로 지친 그녀가 죽음을 결심하고(그 전에도 자살을 기도했었다.) 집을 나왔다.

“그날도 실컷 두들겨 맞았는데 진짜 만사가 다 싫고 나, 이해경이란 사람과 삶은 없더라고. 이렇게 없는 삶을 사느니 죽는 게 낫더라고. 잠바에 바지 하나 입고. 그리고 여지껏 산거야. 내 평생에 후회가 있다면 그때 미리 무당을 찾아가든가 했더라면 애를 살릴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거야. 아마 내 평생 갈 거 같아.”


죽기보다 싫었던 무당이 되어서

어릴 적부터 맥없이 쓰러지고 했던 그 모든 것들이 예정된 길로 가기 위한 것일까. "아니야, 우리 엄마 말처럼 못 먹고 커서 그래, 다만 왜 나만 이렇게 힘들까. 싶었지."

집을 나와 재봉일로 생계를 꾸려가는 동안 깜박깜박 정신을 잃는 증세는 여전했다. 친구 말을 따라 용하다는 무당을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때마다 무당들은 다른 친구들만 상담해주고 나는 무당이 될 거라고만 하는 거라. 내가 어느 정도로 아프냐면 뻗어 누워서 먹지도 못하고 오줌을 싸 축축한데, 그냥 누워있는 거야, 누가 날 만져주겠어. 아무도 없잖아. 그러다가도 일어나면 또 말짱해. 그러던 중 송광사에 가 하룻밤을 묵는데, 스님이 말하길 중이 됐으면 고승이 됐을 건데, 세상에 한이 너무 많아서 만신이 될 거라는 거야.”

이로써 난생 처음 그녀는 스스로의 운명 안에 자리한 ‘만신’이란 존재를 생각하기 시작했으나 여전히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그러다 고통이 극에 달할 때 쯤, 다시 무당을 찾았다.

“근데 내가 그 집에 가자마자 그 사람 하는 말이 5살 먹은 애가 엄마, 엄마 하고 울고 있다는 거야. 왜 엄마라 그러지? 하는 거야. 거기서 휙 돌았어, 내가. 그러면서 이미 신이 (내게)와있고, 지금 결정을 내리지 않으면 죽거나 앉은뱅이가 된다는 거야. 그래서 날 죽이라 했지. 절대 무당은 싫다고. 그랬더니 내가 거부하면 딸한테 간다며 고집부리지 말라는 거야. 어떡해, 내가 하고 말아야지. 그럼 신이 있다는 걸 증명해라 하니까 향을 피워 손에 쥐어 줬는데, 그 다음은 몰라. 나는 그때 누군가의 품에 안겨있는 기분이 들더라고. 그렇게 내가 무당이 된 거예요.”

그렇게 정신을 잃은 상태에서 그녀는 아기처럼 ‘엄마’를 찾으며 울다가 그 곳에 있던 손님의 점을 다 봐주었다. 그녀의 첫 접신이었다. 제일 영험하다는 최영장군님이 바로 그녀의 몸주다.


현실과 비현실 사이를 오가는 무당 이 해경

“참 이상한 거야. 굿을 하고 올 때면 항상 트릭 같고 쇼 같은 거야. 굿은 이게 아닌데 싶고. 근데 내가 뭘 알아, 내가 굿을 해봤어, 뭘 해봤어. 단지 생각으로 지금 사회에도 이렇게 굿을 한다는 사실에 놀라면서 굿이란 게 뭔가 찾아들어가기 시작했지.”

처음 접신을 한 곳을 시작으로 웬만큼 유명하다는 무당들은 다 찾아다니며 공부하다 인간문화재 김 금화씨를 찾아가 다시 입문하면서 본격적인 무당 수업에 들어갔다.

“그런데 내가 이 생활을 하다보니 무당의 실질적인 삶을 젊은이들 머리 속에 심어주고 싶더라고. 무당, 굿이라는게 우리나라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젊은이들이 알아야 할 것 같았어. 그러다 찾은 방법이 인터넷이었어. 정말 예쁜 사연들 많았어요. 한 1년정도 밤 잠 안자고 심혈을 기울여 게시판(www.mansin.co.kr)에서 대화를 나눴거든(99년) 나중에 다른 무당들이 돈 버는 수단으로 인터넷을 사용하기 시작하고, 그러다 같은 업종의 종사자가 올린 음해성 글 몇줄에 네티즌들이 발칵 뒤집어진 거야. 나는 거기서 환멸을 느끼고 좋은 사람들의 기대를 저버리고 폐쇄했던 거야."

그녀는 요즘 자신을 되돌리는 작업을 하고 있다. "‘솔과 학’이라는 출판사의 제의로 내가 살아온 이야기를 글로 정리하고 있어. 아직 결정하지는 않았지만 가제목도 붙여놨는데 '혼의 소리, 몸이 소리'야.”

이제 비로소 조금씩 무당으로서 제대로 된 굿을 찾는 길목에 들어선 그녀를 현실 속에서 보듬어줄 사람도 있어야하지 않을까.

“10년 차이 나는 아이 아빠와는 사랑을 몰랐지. 서른일곱에 첫 사랑을 몸서리나게 했어. 한 6개월을 무지하게 짝사랑하다가 내 손에 쥐었는데, 내 스스로 그걸 깼어. 나도 애인이 있었으면 좋겠어.(간곡하게) 근데 보면 내 애인은 내가 좋아하는 일이야. 물론 섹스도 중요하지만 요즘처럼 다 드러나 버려 신비감 없는 섹스는 재미가 없어. 그게 내 생각이야.”

양은주 자유기고가

입력시간 2003/04/10 1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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