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덕균 개그펀치] 꽝과 대박 사이에서

역시 놈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나름대로 이성적인 품위와 인생사 무소유의 깊은 철학을 곱씹어보며 놈의 마수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쳤었다. 아무리 꼬시고 눈웃음을 날려도 놈이 쳐놓은 유혹의 함정을 벗어날 수 있다고 장담했다. 하지만… 실패했다.

로또 따위 그깟 숫자 6개의 배열에 내 인생을 거는 무모한 짓은 하지않겠다고 다짐했지만 참으로 어이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전국민이 로또의 광풍에 말려들어 표류하고 있을 때도 나는 초연하고자 노력했다. 사실 그것은 무지하게 힘겨운 일이었다.

신문이나 TV, 잡지 등 온갖 매체에서 로또란 이름이 빠질 때가 없었고 지하철을 타면 딱 올려다보이는 시선 벽면에 멋진 벤츠가 ‘너도 인-생-역-전- 해서 탈 수 있어’ 라고 부추겼다. 그래도 나는 로또에게 넘어가지 않겠다고 이를 악 물었는데 정말 너무도 어이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바로 내 후배 작가 때문이다. 복씨 성을 가진 이 작가는 2주 연속 6개중 4개의 숫자를 맞춰 나를 놀라게 했다.

“선생님, 지가유 당첨만 되면 1억을 드릴께유.”자신감에 불타는 복 작가를 보면서 속된말로 방귀가 잦으면 똥이 나온다는 우리 조상님네들의 진솔한 표현이 떠오르는 순간이었다. 바로 옆에 있는 사람이 당첨의 확률에 근접해가는 것을 보면서 나도 더 이상 방관자가 될 수는 없었다.

우선 어떤 식의 숫자 배열이 당첨번호의 마력을 발휘하는지 분석해 보았다. 사람들이 제일 많이 사용하는 방법, 즉 본인이나 가족의 생년월일을 조합하는 방식도 생각해보았다. 오래 전에 폐차시킨 자동차의 번호도 떠오르고 첫키스한 날짜도 떠오르고 좌우지간 오만 잡가지 숫자가 머리 속을 헤집어 놓았다. 어떤 사람은 마누라와 애인의 신체 사이즈 36, 31, 35, 34, 24, 33의 절묘한 배합을 시도해 보았다는 얘기도 떠올랐다.

그뿐인가. 당첨된 사람들의 많은 공통점이 조상이 꿈에 나타났다는 얘기도 들려왔다. 어떤 이는 돌아가신 할머니가 꿈에 나타나 숫자 5개를 불러주었는데 마지막 하나의 숫자는 불러주지 않아서 애석하다고 땅을 치는 것도 봤다.

내 친구는 초저녁에 잠이 들었는데 돼지가 자신을 향해 미소를 짓는 기막힌 꿈을 꾸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밤 11시에 편의점에 달려가 로또를 사기로 했는데 잠깐 생각해보니 세상사에 물들고 타락한 자신보다는 아직 세상의 때가 안 묻은 어린 아들이 더 효험이 있을 것 같다는 판단이 들었단다. 그래서 오줌이 마렵다고 선잠에서 깨어난 5살 먹은 어린 아들을 끌고 편의점으로 달려갔다. 연신 하품을 하며 칭얼대는 어린 아들놈을 어르고 달래며 순진하고 무의식적인 숫자를 찍게 하고는 기대에 부풀었는데 결과는 물론 꽝이었다.

아무리 숫자를 조합해 봤자 역시 엄청난 확률의 무게를 감당할 자신이 없던 나는 길거리에서 3000원에 파는 로또 기계를 축소한 모방품인 장난감을 샀다. 희희낙락하며 연습삼아 조그만 구슬이 차르르 소리를 내며 6개의 숫자를 떨어뜨리는 것을 반복하고 있는데 아들놈이 기묘한 눈초리로 나를 보더니 물었다.

“아빠, 그게 재미있어?”

그러더니 제방으로 달려가 내가 산것과 똑같은 장난감을 내미는 것이 아닌가. 혹시 녀석이 어린 나이에 벌써 일확천금에의 꿈을 꾸는 것이 아닌가 싶어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나 200원주고 뽑기 했는데 이게 나왔거든. 그렇게 재미있으면 이것도 아빠가 갖고 노세요.”

나는 졸지에 양손에 두 개의 로또 기계 장난감을 손에 들고 또다시 숫자의 조합을 고민해야 했다. 이짓 저짓 다해봐도 결국 큰 부자는 하늘이 내리고 조상님이 돌봐줘야 성공한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결심했다. 한식날, 돌아가신 어머니의 산소를 돌보러 가서 경건한 마음으로 절을 하고는 준비해 간 로또 장난감을 꺼냈다. 어머니를 부르며 6개의 숫자를 뽑았는데 결과가 어떨지…?

입력시간 2003/04/15 1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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