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식의 문화읽기] 문화적 다양성의 부재

영화 ‘지구를 지켜라’를 보았다.‘범우주적코믹납치극’이라는 영화 포스터의 카피가 정확하게 들어맞는 영화였다. 주인공은 강원도 태백의 외딴 산골마을에 사는 23살의 청년 이병구. 그는 세상의 부조리와 자신의 불행이 모두 외계인의 소행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사흘 후에 있을 개기일식까지 안드로메다 왕자를 만나지 못하면 지구에는 커다란 재앙이 닥쳐 아무도 살아남지 못하게 될 것이라고 믿는다. 그래서 유제화학의 사장 강만식을 납치, 고문함으로써 안드로메다 왕자를 만나 지구를 구할 수 있는 방법을 알아내고자 고군분투한다. 과연 병구는 외계인의 지구파괴 음모에 맞서서 지구를 지킬 수 있을까?

한 마디로 ‘홀딱 깨는’ 영화이다. 그 동안 한국영화가 보여주었던 상상력의 지평을 훌쩍 뛰어넘는다. 영화를 보는 동안 관객들은 외계인과 관련된 만화적인 상상력과 부조리한 사회에 대한 사실주의적인 묘사를 정신없이 넘나든다. 또한 즐거운 흥분이 유지되는 조증(躁症)의 상태와 한없이 우울하고 불안한 울증(鬱症)의 상태를 왕복하는 경험을 하게 된다.

어디 그뿐인가. 외계인으로부터 지구를 지켜내야겠다는 병구의 편집증적인 캐릭터와, 20여 편의 다른 영화들을 사정없이 패러디하고 있는 분열증적인 텍스트의 강렬한 대비가 눈부시기까지 하다. 상이하고 이질적인 상상력이 미친 여자 널뛰듯 하는 영화, 상상력의 롤러코스터를 타는 듯한 느낌을 주는 영화이다.

상상력이 빚어내는 현란한 유희도 영화의 덕목이겠지만, 무엇보다도 우리사회에 만연한 폭력의 문제를 성실하게 다루었다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우주영웅을 꿈꾸는 병구의 성격이 웃기기만 하는 만화적 캐릭터에 그치지 않고 일반적인 설득력을 얻을 수 있었던 이유도 폭력의 정당성에 대한 문제 제기와 내밀하게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병구의 과대망상증은 유전적인 요인이나 섬약한 기질과는 무관하다. 병구의 삶은 폭력이 남겨놓은 상처로 점철되어 있으며, 그의 가족들은 폭력 앞에서 한없이 무력한 사회적 약자들이었다. 사회적인 약자이기 때문에 폭력의 희생양이 되었고, 그 와중에 미치지 않기 위해서 그가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 외계인과 결부된 과대망상이었다.

병구의 과대망상은 사회적인 폭력에 대한 경험으로부터 스스로를 지켜내기 위한 일종의 자아방어기제이다. 그래서 더더욱 가슴 아프다. 영화 전편을 통해서 병구는 항변한다. 자신에게 폭력을 가한 자들과 자기자신을 어떻게 똑같은 인간으로 생각할 수 있느냐고. 별다른 도덕적인 근거도 없이 다른 사람에게 폭력을 가하는 존재가 있다면, 그들은 인간이 아니라 아예 종(種)이 다른 외계인이 아니겠느냐는 것이다.

외계인에 대한 병구의 적대감 속에는 나는 인간이며 인간은 다른 인간에게 폭력을 행사할 수 없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병구에게 있어서 외계인은 E.T.와 같은 외계 생물체가 아니다. 외계인이라는 말은 모든 반(反)인간적인 폭력의 기원이다. 그런 의미에서 병구의 엽기적인 행각은 모든 반인간적인 것들로부터 인간적인 가치를 지켜내고자 하는 슬픈 몸짓이었을지도 모른다.

주중 저녁시간에 영화를 보았기 때문이었을까.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고 극장 안에 불이 켜졌을 때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필자를 포함해서 12명의 관객이 영화를 보았음을 알 게 되었다. 비슷한 시기에 개봉된 ‘선생 김봉두’의 흥행이 호조인 것을 생각하면, 그리고 ‘지구를 지켜라’에 대한 호의적인 관심들을 생각하면, 참으로 의외였다.

관객들은 잔혹과 코믹 중에서 코믹을 선택한 것이었다. 영화관에서만큼은 세상의 잔혹함을 잊어버릴만한 코믹한 장면들을 보고싶어하는 것이리라. 이 즈음의 세태를 고려하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조금 부정적으로 보자면, 한국의 관객들은 영화가 재미있게 해 주지 않으면 스스로 영화를 즐기려고 하지 않는다는 방증이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영화관객들의 쏠림 현상은 문화적 다양성을 위협하는 일이라는 생각에 무척이나 마음이 무거웠다.

영화 ‘지구를 지켜라’의 흥행부진과 관련해서 또 한가지 아쉬운 점이 있었다면, 지나치게 많은 내용이 사전홍보과정에서 노출되었다는 점이다. 텔레비전의 영화소개 프로그램에서 이미 본 내용은 복습한다는 느낌을 받았다며, 그렇지 않았다면 더욱 재미있게 즐길 수 있는 영화였다는 사람들을 주변에서 많이 만날 수 있었다.

승부수가 상상력에 있었다면 조금은 치밀한 홍보전략이 필요하지 않았을까. 오랜만에 만난 문제작의 흥행부진이 참으로 안타깝다.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문화적 균형감각이 필요한 시점인지도 모르겠다.

입력시간 2003/04/15 1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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