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 허수아비로 만들지마!"

고건 총리, 청와대·내각과 잇단 엇박자로 심기불편

고 건 국무총리의 최근 심정은 ‘난감(難堪)’ 그 자체이다. 개혁 대통령과 안정 총리란 대 명제 속에 화려한 출범을 했지만 노 정권 초기의 고 총리 움직임을 들여다 보면 청와대ㆍ내각과 그리 호흡이 잘 맞는 것 같지가 않다.

책임총리제를 운운하며 내각을 관할하라는 임무가 맡겨졌지만 웬지 내각과 따로 놀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실세 총리가 아니라는 점 때문인지, 고 총리 개인 성향이 ‘튀지 않는’ 순응형이란 점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이질적 인자의 만남 같은 ‘부정교합’ 이미지가 강하다.

파열음이 처음 나온 곳은 4ㆍ3 제주항쟁과 관련한 시각 차에서. 민주당 신 주류 측인 추미애 의원은 자신의 인터넷 홈페이지에 “고건 총리가 법을 위반하면서 이유없이 (보고서 발표) 시한을 연장한 것은 무책임하다. 고 총리가 편향된 사고로 진상조사의 결실을 훼손, 왜곡하려고 하는 것은 아닌지 그 의도를 경계한다”고 직격탄을 날렸다.

이에 고 총리 측은 반박 글에서 “새 자료가 발굴될 수 있는 점 등을 감안해 9월28일까지 6개월간 추가 심의를 거쳐 보고서를 수정한다는 것은 군경측 입장을 대변하는 위원들의 의견을 감안해 위원회 전원일치의 의결로 결정된 것”이라고 밝혔다.

4ㆍ3 항쟁을 둘러싼 설전은 고 총리가 제주 현지의 기념식에 참석하면서 흐지부지됐지만, 이 사건이 현 정권에서 고 총리에 대한 입지가 마치 ‘섬속의 섬’같은 존재 임이 드러난 첫 계기가 됐다.


노 대통령과 코드가 맞는 건지 다른 건지

4월7일 국회 정치분야 대정부 질문에서 답변에 나선 ‘화술(話術)의 달인’ 고 건 총리는 이전의 능란한 화법을 제대로 구사하지 못했다. 그가 논리적이지 못해서, 또는 준비가 부족해서 그런 게 아니다. 평소 본인이 갖고 있는 사고와 노 대통령의 그것과 일정 부분 거리가 있는 데서 비롯된 듯 했다.

한나라당 남경필 의원은 노 대통령의 언론관을 집중 공격했고, 답변에 나선 고 총리는 “잘 모르겠다” “제가 짐작하기로는…” 식의 즉답을 피해가는 수비형으로 일관했다. 그의 답변 태도에는 평소 좀체 보기 힘들었던 당혹감이 자주 감지됐다.

남 의원이 노 대통령이 언급한 족벌언론의 실체를 묻자 “확실히는 모르겠으나 짐작컨대 전 이렇게 생각한다. 시장경제체제에서 적법절차에 따라 주식을 세습하고 소유하는 것은 당연하다. 다만 일부 신문사는 소유만 세습하는 게 아니라 논조와 편집을 지배해 문제가 됐는데 이를 지적한 게 아닌가 생각한다”고 답했다.

이에 “편집을 침해하지 않으면 세습은 문제가 안 된다는 말인가”라고 다그치자 “그것까진 확실히 모르겠다”고 얼버무렸다. 언론 통제에 대해서는 “언론에 대한 통제는 독자 시청자와 언론 시장에 의해 평가받고 언론 스스로의 책임하에 평가된다. 짐작컨대 행정부는 제도적으로 국회의 통제를 받지만 (언론에 대해서는) 그런 제도적 통제수단이 없다는 뜻으로 (노 대통령이) 표현한 게 아닌가”라고 말했다.

여기에서 남 의원이 언론의 제도적 통제를 의미하는 것이냐고 묻자 “언론은 스스로 통제하는 것이다. (노 대통령이) 이것을 강조한 반어법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라고 답했다. “선출되지 않는 위험한 권력…”으로 표현한 노 대통령과의 언론관과는 분명 차이가 나는 답변이다.

결국 고 총리는 “어떤 방송과 신문을 많이 보든 그것은 시장과 국민이 결정할 문제 아니냐”고 남 의원이 다그치자 “그렇다”고 인정하는 등 시종 노 대통령의 언론관을 옹호하다 답변이 꼬이기도 했다.


고 총리, 강경 총리로 입장 선회?

책임 총리의 역할이 요구됐지만 고 총리의 그간 행보는 철저히 “낮은 자세로 임하소서”였다. 법무부 인사 파동과 관련해서도 대통령이 직접 ‘검사들과의 대화’를 통해 정면 돌파를 시도했고, 진대제 정통부 장관의 국적시비와 김두관 행자부 장관의 자치단체장 재직 당시 언론사 대표직 유지 등의 파문에서도 그는 조용히 대독총리 본연의 자세를 유지했다.

그러던 고 총리는 같은 편인 추미애 의원의 저돌적 공세와 남경필 의원의 송곳 공세를 연달아 받아내면서 ‘침묵의 방향타’를 조금씩 틀기 시작했다.

국정홍보처가 추진 중인 정부 중앙청사 기자실 폐쇄 방침에 따라 대 언론 브리핑 룸이 자신의 재가없이 정부중앙청사 별관에 마련될 것으로 알려지자 고 총리가 발끈하고 나선 것. 그는 신문을 통해 이 소식을 접한 뒤 청사관리사무소장을 불러 그간의 경위와 청사 공간운영 상황보고를 직접 받았고, 다음날인 4월12일 브리핑룸 설치 계획에 제동을 걸고 나섰다.

총리실 관계자에 따르면 고 총리는 브리핑 개선 등 정확한 정보를 알릴 방안에 대한 논의없이 브리핑 룸 설치나 오보 대책 위주로만 언론정책이 진행되는 것은 본말전도라는 입장이라고 한다. 한마디로 일의 ‘앞 뒤’가 뒤바뀌었다는 것이다.

고 총리는 총리실 통일부 행자부 교육부 등이 입주해 있는 정부 중앙청사 내 기자실을 모두 폐쇄하고 청사 별관에 통합 브리핑룸을 만들겠다는 국정홍보처의 방안 자체에 대해 올바르지 않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고 한다. 기자들의 취재·송고 여건을 더 불편하게 해서는 안되며, 정부가 취재보도를 제한한다는 불필요한 오해가 없도록 먼저 행정정보 공개를 확대하기 위한 실질적 제도를 도입해야 한다는 입장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고 총리가 “정부의 정보공개 확대가 선행되어야 한다”며 정보공개에 대한 총리 훈령 제정을 지시한 것은 ‘기사 분류 보고’ 등 오보에 대한 대응 위주로 흘러가는 청와대와 국정홍보처의 언론 정책과는 분명 거리가 있는 의견이다.

“공직사회가 먼저 정보공개나 절차의 투명성을 제고해야지 취재 시스템만 선진적이면 무엇 하느냐”는 시각인 셈이다. 브리핑 룸 설치에 강한 불쾌감을 나타낸 것도 사실은 언론의 대 정부 감시기능을 중시하는 자신의 언론관에 기인한 것이란 설명이다.

야당 측으로부터 ‘처신의 달인’이란 비아냥까지 듣고 있는 고 총리가 이처럼 강경 행보를 보이는 것은 극히 이례적인 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를 놓고 정치권에서는 겉으로는 책임 총리를 말해 놓고 실질적으로는 대독총리로 내려 앉힌 데 대한 불만의 표시라는 해석을 내놓기도 하고, 노 정권의 개혁 일변도 정책에 대해 속도조절론을 앞세운 ‘밥그릇 찾기’의 일환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다른 이들은 일정부분 정치적 견해차를 노정시키는 것이 또 다른 꿈을 향한 계산적 행동이라고 까지 해석하고 있다.

어쨌든 일련의 고 총리의 궤적을 보면 이전과 사뭇 다른 것은 분명하다. 그것이 불만의 표시인지 잘못된 만남의 당연한 산물인 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고 총리의 성향상 앞으로 노 대통령을 거부할 수도, 마냥 따를 수도 없는 입장이다. 그의 향후 행보가 더욱 궁금해 진다.

염영남 기자

입력시간 2003/04/15 16:12


염영남 liberty@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