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의 LP여행] 윤복희(上)

세상의 아픔을 배우며 歌人의 삶에 들어선 소녀

1951년 12월 중앙극장 악극단 무대. 6살의 어린 나이로 노래를 부른 이후 반세기가 넘도록 가수, 영화 배우, 뮤지컬 배우 등 다방면에서 뛰어난 재능을 펼쳐온 한국 대중 음악의 산증인 윤복희의 데뷔 무대였다. 1967년 무릎 위까지 올라간 미니 스커트를 입고 미국에서 귀국했을 당시의 패션으로 세상을 발칵 뒤집어 놓은 장본인이다.

또 60~70년대 최고 인기를 구가했던 혼혈 미남 가수 유주용, 가수 남진과의 결혼과 이혼으로 장안을 후끈 달궈 놓았던 주인공이기도 했다.

하지만 윤복희의 진정한 가치는 흥미를 증폭시켰던 수많은 사건들보다 불우했던 어린 날의 역경을 딛고 스스로를 한국 뮤지컬의 대모로 인정 받게 한 음악적 열정과 노력에 있다.

윤복희는 1946년 3월 9일 서울 종로의 인사동에서 스타 부부였던 코미디언 윤부길씨와 무용가 성경자씨의 1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경성 음악 전문 성악과 1회 졸업생인 아버지 윤부길은 원맨쇼의 일인자로 '부길부길쇼' 등을 통해 40년대 말부터 KPK 등 악극단 무대를 주름 잡았다.

고향선이란 예명으로 유명한 고전 무용가였던 어머니는 일본 유학까지 다녀온 재원으로 전설적인 춤꾼 최승희의 제자였다.

또한 록그룹 키보이스 창립 멤버로 한국 록의 개척자라 할만한 윤항기 목사는 그녀의 친오빠이다. 이처럼 걸출한 대중예술가 집안에서 태어난 그녀는 사내아이들처럼 딱지치기, 말타기, 구슬치기, 쥐불놀이를 좋아했던 적극적인 성격의 개구쟁이였다.

흙을 핥아먹는 기이한 버릇이 있었던 그녀의 본명은 윤복기다. 6.25전쟁 이전까지 부유했던 그녀의 집안은 부친이 힘겨운 출연 스케줄을 견디지 못해 마약에 손을 대면서 기울기 시작했다.

이후 6ㆍ25 전쟁, 9ㆍ28 수복, 1ㆍ4 후퇴 등 민족의 아픈 역사와 함께 윤복희도 고난의 시절을 겪어야 했다.

윤복희는 "부산 피난 시절, 악극의 스타 전옥씨의 딸 최신옥과 함께 소꿉친구로 춤추고 놀면서 무대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됐다"고 회고했다. 긴 피난살이 후 서울로 돌아온 부친은 낙랑악극단에 다시 출연을 했다. 이미 무대에 관심이 지대했던 윤복희는 부친의 반대에 맞서 "무대에 세워주지 않으면 죽어버리겠다"며 당돌하게 손가락에 상처를 내며 떼를 썼다.

딸의 고집을 꺽지 못한 부친은 혜은이의 부친 최성택씨가 단장으로 이끌던 낙랑악극단의 중앙극장 무대에 세워주었다. 이때가 불과 6살인 1951년 12월. 쇼의 끝 장면에 산타할아버지가 큰 자루를 메고 나오면 그 자루 속에서 나와 'I Love You 리루 리루'를 노래하며 뒤뚱뒤뚱 춤을 추며 퇴장하는 역할이었다.

1952년 가을, 마약 중독 증세가 심해진 부친이 국립마약환자 수용소에 자진해 입원하자 빛을 갚기 위해 어머니가 홀로 전국의 악극단 공연 길에 나섰다. 부모와 떨어져 고아 신세가 되어버린 남매는 모진 인심을 겪으며 뼈아프게 세상을 체험해야 했다.

이듬해 봄, 건강을 회복한 아버지가 반도악극단과 일을 시작하면서 윤복희는 일신초등학교 1학년 2학기에 편입을 준비하며 꿈에 부풀어 있었다.

그러나 강원도 묵호에서 어머니의 사망 소식을 알려온 한 통의 전보는 청천벽력이었다. 실의에 빠진 세 식구는 낙랑악극단을 따라 <윤부길과 천재 소녀 윤복희>란 간판을 내세우고 전국의 모든 곳을 누볐다.

하지만 다시 마약을 손대기 시작한 아버지에 대한 반항으로 9살 때 도망을 쳐 서울로 올라와 인기 가수 황정자 악단에서 활동을 시작했다. 10살 때 첫 음반 취입 기회가 왔다. 손목인 곡 '보고 싶은 엄마'를 녹음했지만 레코드회사는 인기가수 송민도에게 다시 취입을 시켜 큰 히트를 기록했었다.

1년 후인 1958년, 시공관 옆 어느 다방에서 아버지를 다시 만난 윤복희는 황해, 백설희와 함께 영화 <안개낀 서귀포>에서 아역 배우로 첫 출연을 했다. 흥행엔 실패했지만 윤복희는 연기력을 인정받아 김승호 주연의 영화 <곰>에 또다시 픽업되었다.

이후 윤복희는 미8군 쇼 무대를 꿈꾸며 오디션을 받았지만 낙방의 고배를 들었다. 낙담한 윤복희는 평택의 외삼촌 집으로 내려가 오산 공군 기지의 장교 클럽에서 트럼펫 주자로 일하던 사람의 도움으로 하루 5백원짜리 가수로 활동을 했다. 몇 달 후 김지미 주연의 영화 '햇볕 쏟아지는 벌판'에 김지미의 어린 시절 역을 맡아 달라는 제의가 들어 와 다시 서울로 올라갔다.

이때 우연히 명동 입구를 지나다 마약과 세상살이에 지친 부친을 1년만에 우연히 만났다. 쌀쌀한 초겨울임에도 여름 양복 차림을 한 아버지의 초라한 모습이 그녀가 생전에 본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고아가 된 윤복희는 소꼽친구 송영란의 집에서 기거 했다. 송영란의 모친은 두 소녀를 <투스퀄스>란 듀엣으로 결성 해 남산 UN센터무대에 출연을 시켰다. 이때가 14세 봄. 윤복희는 모처럼 안정된 가정에서 차츰 자리를 잡아갔다.

어느 날 당시 미8군 무대의 유명 쇼 단 <에이원쇼>의 단장인 박인순, 옥후연씨 부부가 구경을 왔다. 깜찍한 두 소녀의 무대를 보고 반한 그는 8군무대로 스카우트를 해갔다. 당시 에이원쇼는 김희갑이 밴드마스터였고 이춘희, 김성옥등 쟁쟁한 가수들이 포진했던 스페셜 A급의 쇼 단이었다.

윤복희는 김희갑에게 기타를 배웠다. 이후 쉬는 시간이면 하루종일 만돌린, 하모니카, 색소폰, 드럼 등 악기란 악기는 모조리 배우며 정식 음악 공부에 몰두했다. <투스퀄스>의 인기가 높아지자 연예인 공급업체 중 최대 규모였던 화양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왔다. 은인으로 생각했던 박인순 단장을 배신할 수 가 없었던 윤복희는 그대로 남고 송영란만 이적을 해 듀엣은 자동 해체가 되었다.

최규성 가요칼럼니스트

입력시간 2003/04/16 15:13


주간한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