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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여자가 사는법] 설치미술가 윤석남

딸로, 엄마로 산 반란의 세월

경기도 화성시에 있는 화가이며 설치 미술가인 윤석남(65) 화백의 작업실을 찾아가는 길은 순조로웠다. 도로는 기분좋게 목적지까지의 길을 열어주었고, 도로변에는 한창 피기 시작한 봄꽃들이 해사한 햇살을 받으며 재잘거리고 있었다.

거기다 1시간 정도의 길을 자가 운전하며 풀어내는 윤 화백의 예순 살 넘어 살아온 이야기가 골짝의 샘물처럼 흘러나왔다. 어디 하나 걸리거나 사무치는 곳 없이 그렇게 흘러나오는 이야기는 달콤하기까지 했다.

그러다 무엇 때문이었나, 잠시 이야기를 쉬는 중 되새김질 한 윤 화백의 이야기 속에는 길 없는 길을 돌아 나오며 부대끼는 통에 닳아버린 시간들이 촘촘히 박혀 있었다.


나는 뭔가 만들고 싶었어!

환경은 그의 욕구를 들어줄 수 없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영화감독이며 작가였던 아버지(윤백남)가 돌아가시고 나자 39살의 젊은 엄마는 아이들 여섯을 데리고 길거리로 나 앉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고등학교 졸업하자마자 취직을 했어요. 그 당시 문인들이라는 게 동가식서가숙하는 거였기 때문에 아버지가 벌어놓은 돈이 전혀 없었지요. 나하고 언니가 벌지 않으면 동생들이 굶어죽을 형편이었죠.” 고교시절 문예반에 들어 글을 쓰고 거기에 직접 삽화를 그려 넣으며 그림과 문학에의 꿈을 키웠던 그가 학업을 접고 생계를 위해 일할 수밖에 없었던 것. 최고의 두뇌들이 다녔다는 서울사대부고 졸업생이라는 자부심이 오히려 더한 고통을 강요하진 않았을까.

“그런데 참 이상한 게 공부하고 싶은데 못한 것에 대한 갈등은 없었어요. 근본적으로 공부는 혼자 스스로 해도 된다는 생각이 머리 속에 있었던 것 같아요. 그리고 이건 좀 우스운 얘기인데, 그 당시 6.25 끝나고 대학에 다니는 여자들에 대해 아주 부정적인 이미지가 있었어요.

워낙 반항적인 기질이 있었던 터라 대학의 부정적 이미지에 굉장한 거부감을 갖게 되었고, 그러니 나는 대학을 안 가도 충분히 괜찮다고 생각했어요. 사실은 그게 아닌데.(웃음) 하지만 당시의 어린 나로서는 그런 것이 아주 예민하게 다가왔어요.”

그러나 여전히 그에게는 글에 대한 욕구가 있었고, 읽고 싶은 책을 사기 어려워 당시 아버지가 남긴 잡지와 책들을 두루 섭렵하였다. 그래도 채워지지 않는 무엇에 이끌려 중간에 대학에 들어갔지만 가정상황은 동생들이 학업을 마칠 때까지 그를 놓아주지 않았다.

“그러다 스물 여덟에 남편을 만나 연애하고 결혼을 했어요. 내가 외곬수고 고집이 세서 한 남자 만났으면 결혼하는 거라고 생각했어요. 누군가 한번 좋아하면 그 기간이 오래 가고, 다른 사람은 쳐다보지도 않는 그런. 그러니 이 사람이 첫 사랑이죠. 열렬하게 연애하고 결혼했어요.”

반지 따위 안 받아도 아무렇지않고, 너무 어려워 셋방에서 시작하는 신혼살림도 ‘그러려니’했다. 하나도 이상한 게 없었다. 다들 그렇게 살아서가 아니라, 애초 물질에 대해 무감했던 모양이다. 그로부터 십년 남짓의 시간이 지나갔다. 한 눈 한번 팔지 않고 살아온 덕일까, 경제적으로 발 뻗을 여유가 생겼다.

“그런데 그 이전에 이미 나는 망가지더라고요. 왜 이렇게 살아야 하나, 이거 때문에 정신과 치료도 받을 뻔 했어요. 아침에 일어나면 밥 해먹고 남편 출근시키고 그러고 돌아와 앉아 책이라고 해봐야 집에 있는 거 읽은 거 읽고, 또 읽고. 그래봤자 똑 같은 게 저녁이면 다시 밥해야하고. 사치인지 모르겠지만 정말 그렇게 사는 삶이 너무 살기가 싫더라고요. 그래서 남편한테 이혼하자고 했어요.

그리고 집을 팔아 반을 주면 난 파리로 가서 굶어죽더라도 그림을 하겠다고. 그랬더니 이혼은 안 되겠으니 그림을 하라고 해요. 그렇게 해서 처음엔 서예부터 시작했어요.”

“그런데 어.느.날(한 글자, 한 글자 힘을 주어 말한다.) 글씨란 2,30년 동안 남의 것을 베끼고 흉내 내는 작업을 해야 되는 건데 나는 흉내가 아니라 뭔가를 만들고 싶은 거야! 그래서 하루아침에 바꿔서 다음 날부터 화실을 다니기 시작했어요.” 엄마의 일을 이해하기엔 너무 어린 네 살 바기 딸을 데리고 그림에 매달렸다.

아기가 방문 밖에서 울고 있어도 그날의 과제를 다 끝내야 했다. 불혹의 나이에 비로소 평생 그를 유혹해온 그림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았으니 그 외의 다른 것을 쳐다볼 겨를이 없었다.


내 작품의 모티브 ‘어머니’

그의 모든 작품에는 어머니가 있다. 열아홉의 나이에 흠모하던 신문의 대중소설 작가가 하숙생으로 어머니 집에 들었을 때, 어머니가 품은 작가 선생님에 대한 열정이라는 것은 선생님과 함께 만주로 도망치는 일도 아무렇지 않게 할 수 있었다. 그렇게 시작한 마흔다섯의 아버지와 열아홉의 어머니의 결혼 생활은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까지 20년 간 계속 되었고, 어머니 가슴 속에선 지금도 ‘진행형’이다.

“사회현상이 달라진 것도 있지만 우리 어머니는 정말 굉장히 오픈 되어있는 분이에요. 열정적이고 정직하고 냉철한 분이고. 아버지 돌아가시고 자식 여섯을 키우며 눈물은커녕 우리 어떻게 사냐는 말 한번 안 하셨어요. 당신은 그때부터 안 해본 게 없으면서도.

제가 고등학교 졸업하면서 같이 벌기 시작하니 좀 여유가 생기잖아요. 그러면서부터 어머니는 일 끝나고 들어오실 때마다 센베과자를 사와서는 자는 동생들을 깨워 게임을 하는 거예요. 게임의 룰에 따라 과자를 나눠주시고. 그런 어머니를 저는 아버지보다 더 존경해요. 훨씬 따뜻했어요.”

그런 어머니가 아버지를 하나님처럼 섬겼다. 어머니에게 있어 아버지는 존경하는 선생님으로 섬김의 대상이었지, 이렇다 저렇다 이야기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었다. 늘 집에서 글을 쓰고 있고, 간혹 아이들을 불러 모아 놓고 당시 유행하던 스무고개를 하기도 했지만 어머니가 주는 친숙하고 따스한 분위기는 없는 아버지. 그에게 아버지는 언제나 ‘부재 중’이었다. 그래도 당신들로서는 어쩌면 아름다운 부부의 한 초상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우리어머니는 지금도 다시 태어나도 너희 아버지 만나면 좋겠다, 이래요. 옛날 분들 대개 그랬지만 한번도 싸우는 걸 못 봤어요. 또 그렇게 나이 차가 나도 아버지는 늘 ‘이것 좀 자시요.’이래요. ‘너, 이거 먹어라’ 하는 걸 한번도 못 봤으니까요. 아무튼 굉장히 위해줬으니까. 나이 차이가 그렇게 나는데 어떻게 안 위해 주냐~(웃음)”

죽을 때까지 해도 끝이 나지 않을 것 같은 어머니에 관한 이야기가 그림 속에서도 계속되고 있다.

우리 어머니 하루 종일 방안에 앉아계신다. 

방 밖이 무서워서가 아니고, 방 밖에 아무도 없다는 걸 아시기 때문이다.

오랜 만이라 할 말이 없어, 그저 힘주어 꼭 안고 싶은데 그럴 수 없다.

부서져 내릴 것 같아서다. -그림 <세월>중에서

가볍다, 깃털보다 가벼워서 답싹 안아 올렸더니

난데없이 무거운 눈물이 한 방울 투투둑 떨어졌다.

그걸 보신 우리 엄마가

“얘야, 에미야 우지마라. 그 많던 근심 걱정 다 내려놔서 그렇단 다” 하신다.

-그림 <어머니> 중에서


어머니, 내 딸의 어머니 그리고 내 딸

한 여자의 딸로, 또 한 여자의 엄마로 살아오는 동안 그의 어떤 것이 여성들의 삶 구석구석에 연민의 눈길을 돌리게 하였을까. 문득 아버지에 대한 짧은 이야기 끝에 나온 ‘그래도 아들 데리고 야구구경은 갔어’ 하던 말이 날카로운 선을 그으며 지나간다.

그러나 그게 다였다. 그저 섬처럼 고립된 채 살아온 가정주부였다고 말하는 그의 독자적인 사유의 세계를 어림해볼 수 있는 단서를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 그러다 문득 많은 그의 작업 중, 도저히 앉을 수 없는 식탁 의자가 눈에 들어왔다. 의자의 다리는 송곳처럼 뾰족해 땅을 찌를 듯하고, 좌석부분에도 쇠창이 솟아 있어 도저히 앉을 수가 없는 식탁의자다.

“식탁의자라는 게 그렇잖아요. 부엌이 여성들의 공간이잖아요. 늘 누군가를 위해 식탁을 차려야하고, 만들어야하고. 그런데 정작 여자들 자신은 그 식탁의자에 앉을 수가 없더라고. 늘 닦고 치우고 하는데, 자기가 거할 곳이 없는 거지.”

다시 어머니 이야기다. “난 처음부터 엄마였어요. 우리 어머니의 삶을 자세히 들여다보는데, 거기에 삶에 관한 모든 것이 다 있어요. 또 좀 더 들여다보면 거기 내가 도저히 따라 잡을 수 없는 힘이 있더라고요. 그 힘이 뭘까, 그걸 규명하고 싶어요. 그 작업을 앞으로 계속 해야지요.”

그러나 현실적으로 자신은 ‘자기 일을 가진 이기적인 엄마’라고 규정짓는다. 이순을 훌쩍 넘은 그가 이제쯤은 자신을 칭찬하는 말을 듣고 싶다. “일 한다는 것 자체가 칭찬이지. 이기적이라는 건 어쩔 수가 없는 거예요. 일에 몰두하다 보면 다른 건 다 잊어버린단 말이야. 심지어 자기 자신조차도 잊어버리는데. 거기에 딸이 들어오거나 그럴 수가 없지.”

지금 그의 그림 속에서 세 명의 여자가 살고 있다. 어머니의 얼굴을 하고 있는 자화상이 있고, 그의 손에는 딸의 삶이 줄기를 뻗어가고 있다.

“그 애와 나는 어떤 면에서는 아주 극과 극인데, 친구, 결혼, 사랑 얘기 같은 건 너무 잘 통하죠. 일찍부터 외국에 나가서 공부하고 들어왔는데도 전형적인 한국 그 또래의 아이예요. 결혼을 안 하려고 해. 천천히 하게 되겠지. 나는 그 애가 혼자 사는 건 정말 싫어. 지금은 독립해서 혼자 살면서 강아지를 키워요. 내가 원래 강아지에 사랑을 주는 사람이 아니었는데, 딸이 키우는 그 강아지가 예쁘고 보고 싶어요. 근데 어느 날 갔더니 자기가 그 강아지의 엄마래, 처녀가. 그러니, 틀림없이 난 할머니야.”

양은주 자유기고가 wayfar@hanmail.net

입력시간 2003/04/18 1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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