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 소설, 모니터 밖의 반란

10대 네티즌에 폭발적 인기, 영화제작·책 출간 붐

3월 중순 서울 광화문 교보문고에서 한 작가의 팬 사인회가 열렷다. 연인원 300만 이상의 클릭 수를 기록하며 네티즌들 사이에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다는 인터넷 소설 '그 놈은 멋있었다(도서출판 황매)'의 출간을 기념한 자리였다.

주인공은 필명 '귀여니'로 더 잘 알려진 이윤세양. 올 초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아직은 앳된 18세 소녀였다. 행사장 주변은 북새통이었다. 귀여니의 사인을 받으려는 중·고생 4,000여명이 몰려 들어 광화문 모퉁이를 돌아서까지 행렬이 이어질 정도였다.

이들에게 귀여니는 어지간힌 스타 연예인을 능가하는 우상이었다. 책을 출간되자마자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4월 첫째 주 교보문고 베스트 셀러 국내 소설 부문 1위 자리에는 벌써 4주째 '그 놈은 멋있었다'가 당당히 이름을 올려 놓고 있었다. 인터넷 소설이 오프라인 출판 시장까지 점령하게 된 도발의 시작을 알리는 일대 사건이었다.


참을 수 없는 가벼움

#1. 여름 방학도 끝나고… 개학이 다가온다. -_- 막판이라고 칭구라는 지지바들은 경포대나 해운대나 정동진이다… 저 멀리 훌쩍 떠나서 남자들은 하나씩 끼고서 낄낄 대고 있는데… 나는 꽃다운 나이 18세에 방구들에 쳐박혀 컴퓨터나 하고 있으니 -_- 컴퓨터 싸이트도 모조리 다 헤집고 다니는 바람에. 인젠 할 것도 없다... ㅜㅜ 으옹옹. ㅜㅜ 아!다모임!… ^O^ 여고라 그른지 글두 잘 안올라온다. ㄷ- …게시판에 글이 한 개도 업낄래… 방명록을 클릭했는데.. O_O 어예~! "도일여고 학샏을 다봐라~"라고 써진 글! 그글 옆으로 시선이 돌아갔다!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이란 바로 이런 것을 두고 하는 말일까. 귀여니의 홈페이지(www.guiyeoni.com)에서만 편당 10만건에 육박하는 클릭 수를 기록한 소설 '그 놈은 멋있었다'는 도입부에서부터 파격 그 자체다.

친구를 '칭구'로, 계집아이들은 '지지바들'이라고 표현한것쯤은, 혹은 네티즌 간의 통용어가 돼버린 '-_-' 등의 문자 아모티콘이 자주등장하는 것쯤은 깜찍한 애교 정도로 봐줄수 있다고 치자. 어쩌념 신세대 네티즌을 겨냥한 철저히 계산된 그들만의 문법일 수도 있으니까. 헌대 목적격 조사(을, 를)가 들어가야 할 곳에 버젓이 주격조사(은, 는)가 사용되고, 관형격 조사(의)대신에 장소를 나타내는 부사격 조사(에)가 쓰이는 대목에서는 숨이 턱 막힐 지경이다. 띄어쓰기는 아예 무시돼 글 읽기에 번번이 제동이 걸리기 일쑤다.

내용도 평범한 여고생 한예원과 반항적인 꽃미남 지은성의 사랑이라는 통속성을 벗어나지 않는다. 수려한 문체, 풍부하고 사실적인 묘사, 시대와 현실에 대한 고민 등 지금까지 좋은 소설이 갖춰야 할 요소라고 믿어왔던 그 어느 덧도 찾아볼 수 없다.


"형식도 문법도 모두 다 필요없다"

#2. 저건 절대적으로 내 비에푸 수윤이뇬이 걱정되서 하는 소리지, 부럽다거나 시샘해서 내뱉는 말이 아니다. -,.-… 암암 …=_=….

"..>_<;;.. 야야… 종호는 달러…." "-_- 달르긴…공고는 양아집단이여~-,.-….." "….-_-.. 닥쵸라?…".."

"뭣보담…니 이번주안에 깨질 것이 너무도 자명해.. -_-" "…쒸발..-_-..초를 쳐라 초를쳐….. 괜히 부러우니깐 지랄하는 것쫌보라지..(-_-)/..으후훼훼휀~!!!!"

비단 귀여니의 작품만이 아니다. '왕기대'라는 필명의 네티즌이 유머나라라는 사이트에 연재해 큰 인기를 누린 '개기면 죽는다'의 한 대목. 도대체 어느 나라 언어인지, 해석이 불가능한 언어들로 가득하다. 수없이 반복되는 이모티콘에 짜증이 나고, 함부로 내뱉는 욕설에는 심한 거부감이 느껴질 정도다. 엄숙죽의에 길들여진 보수적인 평론가들은 "말초적인 감각에만 치중해 문학성이 떨어지는 것은 물론 맞춤범과 표기법조차 제대로 지켜지지 않아 문학의 권위를 훼손한다"며 이같은 인터넷 소설에 혹평을 쏟아낸다.


확산되는 인터넷 소설 문화

기성 세대들의, 혹은 평론가들의 이런 평가를 비웃기라고 하듯 10대 네티즌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기반으로 인터넷 소설은 갈수록 지평을 넓혀가고 있다. 영화화를 통해 일반 대중에 잘 알려진 '엽기적은 그녀' '동갑내기 과외하기'는 이미 인터넷 소설의 고전이 돼 버렸다.

다음, 프리챌 등 커뮤니티 사이트에는 인터넷 소설 관련 카페가 100개 이상 활동하고 있고, 인터넷에 소설을 올리는 아마추어 작가들만 수천명에 달할 정도다. 귀여니의 다른 소설 '늑대의 유혹' '도레미파솔라시도' '내 남자친구에게' 외에도 '개기면 죽는다'(작가 왕기대)' 'Loving You(질투의 화신)' '테디보이(은박지)' 등 수십편의 작품이 각 카페마다 편당 조회수 1만건 이상을 기록하는 인기를 누리고 있다.

인터넷 소설의 영화제작이나 책 출간붐도 좀처럼 식지 않을 분위기다. 영화계와 출판계에서 가장 주목을 받았던 작품이 동갑내기와 사귀다가 임신을 한 15세 소녀의 육아일기. '제니와 주노의 홈페이지'라는 이름으로 사이트가 개설돼 실화냐 소설이냐를 두고 네티즌 간에 논란이 일었던 이 소설은 최근 '제니@주노'라는 제목으로 책으로 출간된 데 이어 'two A 픽쳐스'라는 기획사를 통해 영화작업이 진행중이다.

서른살 즈음의 실업자 남녀가 친구 결혼식장에서 만나 티격태격하다 사랑에 빠진다는 내용으로 네티즌의 폭발적 호응을 얻은 '백조와 백수'를 비롯해 '내 사랑 싸가지' '쉬즈 마인' '옥탑방 고양이'등이 끊임없이 입질을 받고 있다.


그들끼리 공유하는 그들만의 문화

그렇다면 10대들이 인터넷 소설에 열광하는 이유는 뭘까. 인터넷 소설에는 기존 문학이 갖지 못한 어떤 매력이 숨겨져 있는 것일까. 8만명이 넘는 회원을 확보하고 있는 다음 카페 '인터넷소설닷컴'의 주인공 중학교 3학년 나유리(15.오렌지율이)양이 답변에서 그들에게 인터넷 소설이 지니는 의미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기존 소설 등 문학작품은 그 나름대로 깊은 감동을 주겠지만, 인터넷 소설은 또 다른 재미를 주잖아요. 어른들이 쓰는 소설에서는 우리들끼리만 알 수 있는 문화를 찾아 볼 수 없는데 같은 10대가 소설을 쓰다보니 공감대가 형성되는 부분이 많은 것 같아요. 인터넷 소설에서 큰 의미를 찾으려고 하지는 않아요."

기성 세대들이 지적하는 인터넷 소설의 폐해에 대해서도 나름대로 뚜렸한 입장을 갖고 있다. 나양은 "심하게 욕설이 많다거나 말도 안되게 쓴 소설은 잃지 않는다"며 "소설은 소설이고 문법은 문법이니까 소설에서 조금 문법이 틀렸다고 해서 큰 문제가 될 것은 없다는 생각"일고 다부지게 말했다.

어지간히 인터넷 소설은 대부분 읽어봤다는 고등학교 2학년 정종진(17)군은 "틀에 얽매인 시각을 갖고 인터넷 소설을 재단하지 말아달라"고 제법 엄중하게 기성 세대들에게 주문한다.

"저희가 인터넷에서 '안냐세요'라고 인사한다고 해서 실제 '안녕하세요'라는 말을 모르는 건 아니잖아요. 격식을 차려야 하는 자리라면 얼마든지 정중하게 인사할 수 있어요. 지금의 어른들이 어렸을때 허무맹랑한 내용의 만화를 보며 웃고 울었던 것이나 마찬가지 아닐까 싶어요. 문학이니까 이래야 한다, 소설이니까 이래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갖지 말았으면 좋겠어요. 인터넷 소설이 문학 작품으로 분류되면 어떻고 그렇지 않으면 어떻습니까."


새로운 문학으로 탄생할까

끊임없는 문제 제기에도 불구하고 인터넷 소설은 거스를 수 없는 문화의 한 코드로 자리 잡았다. 일각에서는 이광수로 시작되는 근대 문학이 고전 문학의 자리를 비집고 들어가 정착할 때도 유사한 혼란이 있었다며 기존 문학과 인터넷 문학과의 대화가 필요한 시점이라고 지적한다.

문학 평론가 김동식 교수는 "인터넷 소설은 자기 세대의 이야기를 자기 세대의 언어로 쓴 '세대문학'으로 볼 수 있다."며 "인터넷 소설이 기존 문화적 가치를 순식간에 대체할 수 없는 만큼 양자가 문을 열고 서로를 이해하려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기성세대들이 언어 왜곡이라는 이유로 억압을 하고 사회 병약적인 문제로 치부한다면 진짜 병이 돼버리고 말 것"이라며 "돌이켜 보면 인터넷이 이 같은 현상을 극대화했을 뿐이지 역사적으로 모든 세대들은 자기들만이 알 수 있는 언어를 사용했던 것 아니냐"고 덧붙였다.

표현 상의 문제를 배제한다면 네티즌들의 호응을 얻는 상당수 인터넷 소설이 전체적인 이야기 구성이나 등장 인물에 대한 성격 부여 등에 있어서 기존 문학 작품과 다를 바 없다는 '호평'까지도 일각에서 나오기 시작했다.

프랑스 사회학자 삐에르 부르디외는 예술이나 문학이 되기 위한 조건을 이렇게 설명했다.

"첫째, 작품이 지속적으로 재생산돼야 하고, 둘째 그 작품을 읽을만한 의미가 있다는 독자들의 신념이 재생산돼야 한다."

이제 대중에게 다가가기 시작한 지 불과 2~3년인 인터넷 소설이라는 장르가 이런 조건들을 충족시킬 수 있을지는 아직 알 수 없다. 수십년이 흘러도 여전히 10대들의 문학으로, 혹은 지금의 10대들이 장악한 기성 세대들의 문학으로 자리 잡을 수 있을지, 아니면 폐해에 대한 지적지 묻혀 금세 사그러들고 말지 좀 더 지켜 볼 일이다.

입력시간 2003/04/18 1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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