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의 눈] 진정한 해방군이 되라

성전(지하드)의 깃발을 높이 들었던 이라크가 미국의 탱크 앞에 힘없이 무너졌다. 언론의 속성이지만, 촌각을 다투며 바그다드 전황을 쏟아내던 신문과 방송이 이라크로 향한 눈길을 거둬들였고 우리의 관심도 시들해졌다. 그렇다고 미ㆍ영국군의 무차별 폭격에 처참하게 부서진 이라크의 삶의 터전이 달라졌는가? 아니다.

전쟁이 남겨준 파괴와 폭력, 분노와 좌절, 약탈과 방화 등이 독재자 후세인의 압제를 대신하고 있을 뿐이다.

또 후세인 일족에서 미 군정과 친미파 일부로 지배 계층으로 변했을 뿐, 피란에서 돌아온 이라크인들은 절망과 눈물로 지새고 있다. 후세인 시절, 이라크의 솔체니친으로 불린 반체제 시인 사이난 안툰마저 참다못해 “점령권력(미군)이 피점령국가(이라크)의 국민에 대한 책임을 노골적으로 회피해 삶과 인간성을 황폐화 시키고 있다”며 미국의 부도덕성을 공격했다.

미국은 대량살상무기를 제거하기 위해 이라크 국민 해방이라는 기치를 내걸고 선제 공격에 들어가, 후세인 체제를 무너뜨렸으나 전후 처리에서 ‘해방군’의 이미지를 심는 데 실패했다. 처음부터 석유 패권의 확보와 친미 정권 수립에 따른 중동 안보 벨트 구축이라는 잿밥에 더 관심을 보였으니 당연한 결과이겠지만 일부 지역에서 반미 시위가 벌어지고, 이라크 최대 계파인 친미성향의 시아파마저 미국의 독주에 반발하는 상황은 우려스럽다.

미국으로서는 적극적으로 민심을 공략해야 하는 상황이다. 자신들을 해방시키기 위해 미군이 자신들을 향해 총을 쏘았다는 확신을 심어주지 않는 한, 폐허 위에 선 반미 성향의 이라크 인들이 ‘적군’을 환영하기는 어렵다.

시작은 바로 공정한 전후처리다. 핵심은 전범 조사와 재산 및 인명 피해에 대한 보상이다. 후세인 등 이라크 수뇌부를 체포해 전범 처리하는 것이 전부는 아니다. 전쟁을 빙자해 살인이나 폭력 등을 자행한 미군 병사는 없는지 돌아 봐야 한다. 일례로 종군한 벨기에 사진기자 로랑 반 데어 스토크는 4월7일 바그다드 인근 티그리스 강변에서 미 해병대 제4연대 3대대 병사들이 최소한 15명의 민간인을 학살했다고 고발했다.

‘움직이는 물체는 모두 사살하라’는 브라이언 맥코이 대대장의 명령은 사실상 범죄나 다름없다는 것이다. 러시아 등 유럽 언론은 맥코이 대대장을 이라크판 ‘부다노프 대령’으로 비난하며 진상조사와 책임추궁을 요구했지만 미국은 묵살했다.

부다노프 대령은 체첸전이 한창이던 2000년 3월 한 체첸 소녀를 강간 살해했다가 러시아 당국에 의해 기소된 러시아군 장교다. 전쟁의 속성상 승리한 지휘관을 전범 처리할 수는 없지만 전쟁을 빙자한 학살행위에 대해 어떤 식으로든 대응하지 않으면 이라크 민심을 돌릴 수 없다.

군사목표가 아닌 마을에 대한 미사일 공격으로 발생한 피해에 대해서도 미국측이 배상 제스추어는커녕 조사조차 않겠다니, ‘점령권력’의 소임을 다하지 않는 것이다. 미국은 시간과 비용의 문제 외에도 아군과 적군의 책임 소재도 명확하지 않다고 강변한다.

그러나 유엔의 경제제재가 풀리지 않는 상황에서도 판매가 가능한 인도적 목적의 이라크 석유 지분을 피해 조사 비용 및 배상으로 돌린다면 미국은 큰 부담을 지지 않고도 해결 가능하다. 또 그 명분으로 인도적 목적의 석유 판매 지분을 늘리고, 유엔의 경제제재 해제까지 덤으로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이라크의 자존심인 문화 유적의 훼손도 그렇다. 이라크는 인류의 4대 문명인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발상지다. ‘meso-potamia’는 두개의 강 사이란 뜻인데, 강이란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강을 가르킨다.

특히 두 강이 만나는 곳, 즉 격전지 바스라에서 약 70Km 떨어진 알쿠르나 지역은 성경에 나오는 에덴동산으로, 폐허가 됐다. 바그다드와 모술 인근에는 함무라비 왕의 본거지인 바빌론,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 하트라 요새 등 유적과 유물이 산재해 있다. 또 국립박물관에는 7,000년 역사의 유물들이 전시돼 있었다. 이런 문화 보고들이 파괴되고 약탈당하는데 미국은 팔짱만 끼고 있었으니 민심을 얻을 수 없다.

전쟁으로 부서진 이라크를 재건하는 데 수백억 달러가 든다고 한다. ‘점령권력’으로서는 이라크 석유를 팔아 그 재원으로 쓰고 싶은 욕심과 충동을 억제하기 힘들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또 다시 재산을 빼앗아 간다는 박탈감과 분노를 이라크 국민에게 안겨준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들의 마음을 잡은 뒤에도 늦지 않는 일이다.

캐나다 에두아르-몽프티 콜레주 국립항공대 철학교수 자크 루엘랑은 ‘성전, 문명충돌의 역사’(한길사)에서 ‘정당한 전쟁’은 ‘성전’과 달리 최상의 복지를 위해 조화롭게 평화를 유지하는 것이라고 규정했다. 미국의 이라크 공격이 ‘정당한 전쟁’이라는 평가라도 받으려면 이라크의 복지를 위해 (패권)욕심을 조금 더 줄여야 한다.

이진희 부장

입력시간 2003/04/23 1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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