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드사 구출작전…약인가 독인가

정부, 카드사 위기에 '수수료율 인상·증자·규제완화' 해법

모든 악재를 털어 버렸다는 듯 카드 업종 주가는 바닥을 찍고 고공 비행을 했다. 4월3일 1만400원이던 국민카드의 주가는 이틀간의 상한가를 포함해 6영업일 연속 상승하며 11일 1만5,450원으로 50% 이상 뛰었다. 같은 기간 외환카드는 6,450원에서 1만200원으로, LG카드는 1만5,800원에서 2만2,500원으로 역시 30%가 넘는 상승률을 기록했다.

‘재료’는 정부의 ‘4ㆍ3 신용카드 추가 대책’ 이었다. 대책의 골자는 카드사의 대규모 추가 증자와 은행을 통한 카드채 매입. 카드사의 자본확충(증자) 규모를 늘려 카드사의 유동성 문제를 해소하는 동시에 6월 말까지 만기 도래하는 투신권 보유 카드채를 은행ㆍ보험사 등이 매입토록 하겠다는 의도였다.

여기에 정부의 수수료율(금리) 규제가 사실상 사라짐에 따라 신용카드사들은 앞을 다퉈 속속 현금서비스 수수료율 등 금리 인상에 나섰다.

결국 ‘벼랑 끝에 선 카드사’에 대한 해법은 카드사 대주주, 시중 은행, 카드 고객 등 3자가 부실의 책임을 동등하게 나눠 떠안는 것으로 마무리 될 조짐이다. 정작 카드 부실을 야기했던 당사자인 카드사, 그리고 금융 당국은 손에 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위기 돌파를 시도하고 있는 셈이다.

여론이 그대로 좌시할 리는 없었다. “더 이상 관치 금융의 망령을 좌시할 수는 없다”며 시민단체가 총대를 매고 나섰고, 정치권도 곧 공방에 가세하며 ‘카드 해법’을 둘러싼 논란은 갈수록 치열해지고 있다. 거칠 것 없는 상승 행진을 거듭하던 카드 주가도 11일을 기점으로 ‘여론의 눈치’를 살피며 숨 고르기에 들어갔다. 과연 정부의 카드 해법은 약(藥)이 될 것인가, 독(毒)이 될 것인가.


정부의 전방위 카드 대책

부실 떠 넘기기의 1차 대상은 카드 고객, 즉 서민들이었다. 정부는 3월17일 연체율 급등에 따라 카드사 경영 부실이 가속화하고 SK글로벌 분식회계 파문으로 유동성 위기까지 겹치자 부랴부랴 1차 신용카드 종합대책을 내놓았다. 대책의 초점은 카드사 대주주에게 2조원 가량의 증자를 요구하는 것과 함께 카드 경영난 해소를 위해 그동안 꽉꽉 짓눌러 왔던 각종 규제를 과감히 푸는데 맞춰졌다.

우선 보유 자산 대비 현금 대출 비중을 50%로 줄이도록 한 시한을 당초 올 연말에서 내년 이후로 1년간 연기해주기로 했고, 부실금융기관으로 지정해 제재를 가하는 적기시정조치의 연체율 기준도 대폭 완화하는 방향으로 가닥을 잡았다.

특히 주목할 만한 내용은 “각종 수수료를 시장 상황에 맞게 신축적으로 조정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것. 카드사의 방만한 경영을 막기 위해 지난해 정부가 마련했던 ‘수수료율 20% 상한 가이드라인’을 불과 수개월만에 사실상 포기하겠다고 선언한 셈이었다.

“수수료율을 1%포인트 인하했을 때 업계 전체로는 약 3,000억원의 수익이 줄어드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경영난 타개를 위해서는 수수료율 현실화가 불가피합니다.” 금융감독위원회 관계자는 수수료 규제 조항을 신설할 당시와 정 반대 논리로 규제 철회 배경을 설명했다.

정부의 지원 사격을 받은 카드사들은 조금의 머뭇거림도 없이 수수료 인상에 나섰다. 삼성카드는 현금서비스 수수료율을 기존 13.8~23.5%에서 16~27.5%로 최대 4%포인트 높였고, LG카드와 외환카드는 현금서비스 이용금액의 0.5~0.6%의 취급 수수료를 신설했다. 현대, 신한, 우리카드 등도 수수료 인상 대열에 합류했다.

특단의 대책에도 불구하고 카드채 불안이 좀처럼 해소될 기미를 보이지 않자 정부는 또 한번의 강수를 뒀다. 4월3일 정부가 내놓은 신용카드 추가 대책은 카드사 대주주와 은행들을 겨냥한 것이었다.

카드사 증자 규모를 당초 2조원에서 4조6,000억원으로 대폭 늘리고, 6월말까지 만기 도래하는 투신권 보유 카드채 10조4,000억원 중 절반인 5조2,000억원 어치를 은행 등이 매입토록 하겠다는 것이었다. 투신권의 환매 사태를 방지하고 채권 시장의 안정을 도모하겠다는 취지였다.


관치 금융 다시 재연됐나

금융 불안의 확산을 막기 위한 정부의 고육지책이었지만, 노무현 대통령 스스로도 “시장이 무너져 가고 있는 상황에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며 사실상 묵인한 명백한 ‘관치’였다는 점에서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가장 논란이 되고 있는 대목은 은행과 보험사 등을 통해 투신사가 보유한 카드채를 사실상 강제로 매입토록 한 것이었다.

특히 4월3일 이정재 금감위원장 주재로 명동 은행회관에서 열린 시중은행장 회의에서 금감위측이 은행별로 부담할 금액이 적힌 ‘노란 봉투’를 은행장들에게 돌렸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형식만 회의일 뿐 강제 할당을 위한 자리나 다름없었다”는 비판이 솟구치기 시작했다.

한 시중은행 여신 담당 임원은 씁쓸한 심정을 감추지 못했다.

“부실 기업에 대출을 해줬다는 이유로 징계를 받아야 했던 선배들을 지금껏 얼마나 많이 봐 왔습니까. 정부가 시키는 대로 마지 못해 대출을 해줬을 뿐인데 말이죠. 시대가 바뀌었는데도 관행은 변하지 않았는가 봅니다. 카드채 매입 서류에 남는 것은 은행장과 담당 임원의 도장 뿐입니다. 수개월, 아니 수년 뒤 카드채가 부실 덩어리로 전락하면 결국 도장을 찍은 이들에게만 은행에 손실을 입혔다는 이유로 정부가 징계를 내리겠죠.”

공방은 정치권으로도 확산됐다. 민주당 정세균 정책위의장은 4월 17일 국회 상임위에서 정부의 입장을 적극 대변했다. “관치금융이란 특정 집단의 이익을 위하거나 시장 원리를 무시해 관이 개입하는 것인데 이번엔 시장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은데 따른 조치였습니다. 카드사가 망하도록 그냥 두는 것은 정부의 적절한 대처가 아닙니다.”

한나라당 의원들의 반격은 거셌다. 한나라당 이상배 정책위의장은 “카드사 부실은 정부가 대선을 앞두고 경기 부양을 위해 무분별하게 규제를 풀자 카드사가 신용카드 발급을 남발했기 때문”이라며 “지금 정부가 카드사를 지원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며 시장에 맡겨야 한다”고 공격했다.


주주는 유한 책임? 무한 책임?

카드사 대주주의 증자에 대해서도 격론이 일고 있다. 소액 주주 운동을 주도해 온 참여연대는 정부 대책 발표 이후 삼성전자 측에 의견을 보내 삼성카드의 증자에 참여하지 말고 카드 사업에서 아예 철수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견해를 밝혔다.

“삼성카드의 의사 결정에 삼성전자가 직접 간여하지 않고 있는데 무턱대고 손실을 떠안는 것은 불합리하다. 증자 참여로 삼성전자가 손실을 입게 되면 결국 소액 주주들에게 고스란히 피해가 돌아갈 것이다”라는 취지였다. 삼성전자 뿐 아니라 국민은행, 현대자동차 등이 대주주 증자에 참여하는 것에 대해서도 반대 입장을 분명히 했다.

반대 시각도 표출됐다. 여론 일각에서는 “대기업의 소액 주주 입장에서만 사안을 보고 있다. 부실 경영에 대한 감시를 제대로 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 대주주가 당연히 책임을 져야 하는 것 아니냐”고 참여 연대에 곱지 않은 시선을 보냈다.

이에 대해 참여연대 김상조 경제개혁센터 소장(한성대 경영학부 교수)은 이렇게 설명했다.

“주식회사의 주주는 유한 책임입니다. 즉, 자신이 보유하고 있는 지분 만큼만 책임을 진다는 거죠. 만약 불가피한 상황이 돼서 대주주에게 부실 경영에 대한 무한 책임을 요구하려면 대주주인 법인의 지배주주, 즉 삼성전자의 최대 주주인 이건희 회장 등에 대해서도 함께 책임을 묻는 것이 마땅합니다. 주주의 책임을 법률적 절차에 따르지 않은 채 계열사의 부실을 메우는 도의적 책임 정도로 치부하려는 지금의 행태는 명백한 관치 금융의 전형입니다.”


극성 부리는 카드사 모럴 해저드

우여곡절 끝에 정부 지원으로 위기를 돌파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이 높아지면서 카드사에는 도덕적 해이(모럴 해저드)가 극성을 부리고 있다. 최근 A카드사는 유동성 마련을 위해 우량 자산을 담보로 자산유동화증권(ABS) 발행에 나섰다.

시장에서 제시한 금리 조건은 1년 짜리가 연 7%대 초반. 카드사의 경영 상태를 감안하면 비교적 괜찮은 조건이었다는 것이 대체적인 평가였다. 하지만 카드사의 눈은 너무 높아져 있었다. “이렇게 높은 금리로 ABS를 발행하느니 차라리 그만두겠다”며 ABS 발행을 포기한 것.

금융시장 한 관계자는 “사실 회사 상태를 감안하면 금리가 연 10%를 넘어도 감지덕지해야 할 판이었다”며 “굳이 무리해서 팔지 않아도 정부에서 지원해 줄 거라는 생각으로 버티기에 나선 것 같다”고 씁쓸해 했다.

금융 당국이 우량 카드사와 불량 카드사 간 옥석 가리기에 적극 나서지 않은 것도 카드사의 집단 모럴 해저드 현상을 부추겼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참여연대는 최근 성명에서 “금융감독원장은 경영 실태를 분석해 경영이 악화할 우려가 있는 카드사에 대해 적기시정조치를 내려야 함에도 불구하고 아예 손조차 쓰지 않았다”고 비판했다.

만약 일찌감치 부실 카드사에 적기시정조치를 내렸다면 몇몇 우량 카드사까지 동반 추락하지는 않았을 거라는 얘기였다.

선제적으로 옥석 가리기에 나섰어야 할 신용평가회사들 조차 시종일관 뒷짐만 진 채 수수방관했다. 연초부터 카드채 불안이 금융 시장을 강타했음에도 신용등급을 조정하지 않던 신용평가사들은 사태가 마무리 단계에 접어든 3월 말에야 겨우 신용등급을 1단계 정도씩 내렸을 뿐이었다. 채권시장 한 관계자는 “카드채 신용등급 하향 조정이 시장 불신만 키운다는 금융 당국의 압력이 상당 부분 작용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숱한 논란을 뒤로 하고 정부가 정면 돌파를 시도한다 해도 넘어야 할 산은 너무 높다. 당장 6월 말까지 시한부로 숨통을 열어 준 카드채 문제는 국내 경기가 가파른 상승 국면에 들어서지 않는 한 다시 불거질 가능성이 짙다. 규제가 대폭 해제됨에 따라 카드사의 방만한 경영 행태도 재연될 개연성이 농후하다.

더구나 연체율이 낮아지지 않는 한 대주주 증자 역시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 격이 될 수밖에 없다. “정부가 금융기관의 팔을 비틀어 투신사를 지원했던 1999년 대우채 처리 당시와 다를 게 뭐냐. 결국 악순환만 계속될 것이다”는 일각의 비판을 진지하게 되새겨봐야 할 때가 아닐는지.

이영태기자

입력시간 2003/04/23 15:30


이영태 ytle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