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이 즐겁다] 전남 보성차밭

새벽, 자욱한 안개 속 차밭을 걸어보라

머리를 파르라니 깎은 비구니가 황톳길을 걸어간다. 자전거를 탄 어린 수녀가 내려온다. 수녀는 비구니를 스쳐 지나는 듯 하다가 자전거를 돌려 되돌아온다. 수녀는 비구니를 뒤에 태우고 황톳길을 내려간다. 2001년 TV에 자주 나와 잔잔한 감동을 주었던 모 통신회사의 방송 CF다. 이 CF의 무대가 보성차밭이다.

차밭하면 우선 전남 보성을 떠올리게 된다. 보성은 국내 차 생산량의 으뜸을 차지한다. 시중에 판매되는 수제차 가운데 절반은 보성에서 나는 것이다. 보성차밭이 자리한 곳은 득량면 활성산 기슭. 이곳에는 대한다원과 동양다원 등 수십만평에 달하는 차밭이 연이어 있다.

보성에 차밭이 조성된 것은 일제시대다. 보성은 대륙성 기후와 해양성 기후가 만나는 곳이라 안개가 자주 낀다. 날씨도 연중 따뜻하다. 차나무가 자라기에 적당한 조건이다. 차에 대한 각별한 애정을 가지고 있는 일본인들은 보성을 재배지로 정해 대규모 다원을 조성했다.

보성읍에서 율포로 가다 처음 만나게 되는 동양다원은 차밭이 5만평쯤 된다. 통나무로 지은 전통찻집에서 차를 시음할 수도 있고 차밭을 거닐 수도 있다. 차밭에는 4월 초순부터 새순이 돋는다. 한해 묵은 잎은 초록이 짙고, 새순은 연둣빛으로 밝다. 절기상 곡우를 전후로 해서 나는 찻잎으로 만든 차는 차 가운데서도 최고로 친다. 동양다원은 산책로를 따라 한바퀴 도는데 30분쯤 걸린다.

대한다원은 진입로에 늘어선 전나무숲길이 인상적이다. 전나무숲길은 차밭까지 이어진다. 하늘 높이 솟은 전나무는 차밭에 그늘을 만들어준다. 차는 햇볕에 노출되지 않을 수록 맛과 향이 뛰어나기 때문에 일부러 전나무를 심은 것이다. 차밭 사이로 난 산책로를 따라 오르면 진초록 고랑이 열 지어 산비탈을 차 오른다.

차밭 산책은 햇살이 사선으로 비껴드는 아침이나 저녁나절이 좋다. 아침에는 자욱하게 안개가 끼어 옷자락도 마음도 이슬에 촉촉하게 젖는다. 계절 구분 없이 진초록 이랑이 끝없이 이어진 차이랑.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머릿속이 개운해진다. 여기에 맑은 차 한 잔 곁들이면 세상사에 지친 영혼에도 평화가 찾아온다.


삼나무 숲길을 거닐면 '다른 세상' 착각

대한다원에서 율포 방향으로 봇재를 넘는다. 봇재에 올라서면 차 이랑이 산자락을 타넘으며 끝없이 펼쳐진다. 차밭 감상지는 다향각(茶香閣). ‘차의 향기를 맡는 정자’라는 이름처럼 정자에 올라서면 싱그러운 차밭의 향연을 맘껏 즐길 수 있다. 산자락부터 활성산 정상까지 온통 차밭이다. 차밭 너머로 득량만의 바다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봇재에서는 율포가 지척이다. 율포는 일제시대 일본인들이 자국으로 모래를 퍼갔을 정도로 고운 모래가 자랑이었다. 지금은 갯벌이 늘어나면서 많이 혼탁해졌다. 해변을 감싸고 솔밭이 있고, 앉아 쉴만한 벤치도 곳곳에 놓여 있다.

율포는 요즘 녹차향을 온몸으로 느끼려는 이들이 단골로 찾는다. 지난 1998년 개장한 율포해수녹차사우나는 득량만에서 퍼 올린 해수에 보성에서 나는 차를 넣어 목욕물을 데운다. 사우나를 하면서 통유리로 밀려오는 득량만의 아늑한 바다 풍경은 덤으로 즐긴다.

율포까지 갔다면 해안드라이브를 빼놓을 수 없다. 길은 두 갈래다. 오른쪽으로 가면 장흥군 수문포, 왼쪽으로 가면 보성군 득량면이다. 장흥 방향은 드라이브 코스가 짧지만 수문포에서 봄철이 제 맛인 바지락회를 맛볼 수 있다.

보성쪽은 인적이 뜸하다. 해안에 접한 고개를 넘고 조그만 포구도 지나친다. 아주 가끔 마주 오는 차가 있을 뿐이어서 호젓한 드라이브를 선사한다. 고갯마루에서 차를 세우고 득량만에 밀려오는 봄바람을 맘껏 들이키는 맛도 볼 수 있다.

드라이브는 득량만 방조제를 지나 조성면까지 이을 수 있다. 득량면에는 중부지방에서는 자취를 감춘 보리밭이 널려 있다. 보리밭은 4월말까지 차밭처럼 푸르다가 5월이 되면 황금빛으로 출렁인다.


▲ 길라잡이

서울에서 보성까지는 멀다. 적어도 1박2일은 투자해야 여유있게 차밭을 돌아볼 수 있다. 서울에서 경부와 천안~논산, 호남고속도로를 이용해 동광주IC로 나온다. 광주시내를 거쳐 15번 국도를 따라 화순까지 간 뒤, 화순에서 29번 국도를 따라 간다. 보성읍에서 18번 국도를 따라 율포 방면으로 8㎞ 가면 차밭이다. 서울 기준 5시간 소요.

서울역에서 보성으로 가는 무궁화호 기차는 오전 8시25분, 오후 5시25분(금ㆍ토ㆍ일) 운행한다. 2만1,300원. 서울 강남터미널 호남선에서 보성 가는 고속버스가 1일 2회(오전 8시10분, 오후 3시 10분) 운행된다. 보성에서는 오후 3시 20분이 막차다. 일반 1만6,600원, 우등 2만7,400원.


▲ 먹을거리와 숙박

율포에서 득량만에서 잡은 싱싱한 회와 어패류를 맛볼 수 있다. 봄에는 키조개나 바지락회(2~3만원)가 알아준다. 태백산맥(061-852-0303). 보성읍에 있는 수복식당(061-853-3032)은 전라도식 한정식으로 유명하다. 1인 기준 1만5,000원.

율포에는 로마모텔(061-852-9486)을 비롯해 최근에 신축한 깨끗한 민박집이 여럿 있다. 흑산도민박(061-852-8523), 봇재민박(061-853-1117).

김무진 여행칼럼니스트

입력시간 2003/04/25 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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