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타하리 치마폭에 놀아난 FBI


LA화교사회 '큰 손' 행세하던 천원잉 체포
FBI 중국담당자와 내연관계 맺으며 이중간첩 행위

4월9일, 로스앤젤레스(LA) 화교사회가 경악에 휩싸였다. 아메리칸 드림을 실현한 화교 여성이 LA 근교의 산 마리노 자택에서 돌연 미연방수사국(FBI) 요원들에 의해 체포됐기 때문이다. 이 여성의 이름은 천원잉(陳文英), 영어식 이름은 카트리나 륭(Katria Leung). LA 화교라면 이름만 들어도 아는 49세의 화교사회 지도자다.

그녀는 중국 광저우(廣州)에서 태어나 홍콩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고 11살 때 미국으로 건너와 시민권을 얻었다. 코넬대 건축과 졸업 뒤 다시 시카고대에서 경영학 석사(MBA) 학위를 받은 재원이다. 역시 화교로 이학박사 출신 사업가인 남편 량진훙(梁錦鴻)과 사이에 아들 하나를 두고 있다.

FBI가 그녀를 체포한 이유는 스파이 혐의. 1983년 FBI의 LA분실 첩보원으로 고용된 뒤 2002년까지 20년간 FBI를 위해 일하면서 동시에 FBI 기밀을 중국으로 빼돌리는 이중간첩 노릇을 해 왔다는 것이다.

그녀가 맡은 임무는 미국 화교사회의 동정과 LA주재 중국 총영사관 감시. FBI 내 그녀의 암호명은 ‘파럴메이드(parlormaid)’. 하녀, 또는 응접실 아가씨란 뜻이다. FBI에 고용됐을 때 그녀는 이미 결혼한 몸이었다. LA분실이 지금까지 활동비로 그녀에게 제공한 돈은 150만 달러에 이른다.


FBI 기밀 빼낸 무기는 육체

FBI와 LA사법당국에 따르면 그녀가 FBI의 기밀을 빼낸 무기는 육체였다. 자신을 스파이로 채용한 LA분실의 중국정보업무 전 책임자 제임스 J 스미스(59)와 지속적으로 내연의 관계를 유지하면서 그로부터 기밀을 빼냈다. 성 관계를 가진 후 스미스가 잠자는 틈을 이용해 그의 가방에서 기밀문서를 빼내 보거나 복사하는 방식이었다.

스미스는 퇴근시 자신의 업무관련 서류를 들고 와 집에서도 보는 습관을 갖고 있었다. 스미스 역시 그녀가 체포된 날 함께 체포됐다. 그의 혐의는 근무규정 위반 및 태만행위. 기밀서류를 무단으로 갖고 나오는 바람에 결과적으로 간첩행위에 노출되도록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스미스가 그녀의 스파이 행위를 일찌감치 인지하고 있었다는 증언도 있다. 조사에 따르면 한 FBI 요원이 그녀와 미국에서 활동하는 중국 첩보원간의 전화통화를 도청, 녹음 테이프를 스미스에게 건넸으나 그는 이를 문제 삼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 녹음 테이프에서 그녀는 중국측에 의해 ‘뤄(羅)’라는 암호명으로 불렸고, 중국 첩보원은 ‘마오(毛)’라는 암호명을 사용했다.

스미스가 이 사건을 묵살한 이유는 세 가지로 추측할 수 있다. 우선 그녀를 이중간첩으로 계속 활용하려는 의도, 또 하나는 그녀를 사랑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마지막은 스미스 역시 이중간첩일 가능성이다.

현재 FBI는 스미스가 이중간첩에 의해 이용당했을 뿐 아니라 의도적으로 정보를 누출한 것으로 보고 있다. 스미스는 99년 LA분실 문서 보관소에서 규정을 어기고 기밀문서 한 건을 갖고 나가 하루 뒤 제자리에 돌려놓은 혐의도 받고 있다.

최근 가트리나의 가택수색에서는 비밀해제가 되지 않은 97년의 FBI 비망록 및 LA분실 소속 일부 FBI 요원들의 명단과 전화번호가 발견됐다. FBI측은 스미스가 2000년 퇴직한 후에도 그녀에게 계속 정보를 유출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면 그녀가 스미스를 통해 정보를 빼냈다면 그 수준은 어느 정도일까. 이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스미스가 FBI에서 차지하는 위상을 봐야 한다. 스미스는 30년간의 FBI 생활 중 퇴직 전까지 22년간 대간첩 분야에서 일했다. 특히 중국관련 대간첩 업무 팀장으로 근무하면서 다량의 핵심기밀을 다뤘다. 그가 생산한 일부 정보는 백악관에 직보될 정도로 고급 기밀이었다.


미ㆍ중 관계 고급기밀 유출 가능성

FBI는 스미스를 통해 유출된 정보 중에는 미ㆍ중 관계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수준의 고급기밀도 포함돼 있을 것으로 본다. 90년대 중반 미국 대선과 상ㆍ하원 선거를 앞두고 행해진 중국의 대미 정치권 로비 관련 수사 상황이 중국측에 넘어갔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뉴욕 타임스는 4월15일자 관련기사에서 지난해 초 중국 정보당국이 장쩌민(江澤民) 당시 국가주석 전용기에서 도청장치를 발견한 것은 그녀가 제공한 정보 덕분일 가능성이 크다고 보도했다. 당시 중국은 미국에서 들여온 보잉 767 전용기에서 27개의 도청장치를 발견했다며 미국의 스파이 행위를 강력히 비난한 바 있다.

뉴욕 타임스는 정보 관계자의 말을 빌려 중국이 전용기 도입 후 단시일 내에 도청장치를 발견한 것은 미국 내부에서 정보가 유출됐기 때문이라고 보도했다. 정보유출의 진원지는 스미스이고 이를 중국측에 전달한 것은 카트리나 륭이라는 것이다. 스미스는 이미 퇴직했지만 관련 정보를 사전에 알고 있었고, 이 사실을 잠자리에서 그녀에게 이야기했다는 것이 이 신문의 설명이다.

FBI는 카트리나 륭 이중간첩 사건을 밝히기 위해 전문팀을 구성, 13개월에 걸친 조사를 해왔다. 두 사람의 가택에 대한 비밀수색과 전화도청, 팩스 및 이메일 체크는 물론이고 두 사람의 밀회장소인 호텔에는 도청장치와 몰래 카메라까지 설치됐다.

작년 11월 그녀가 베이징을 여행했을 때는 LA 국제공항 출발 직전과 귀국 직후 그녀의 트렁크를 조사했다. FBI는 출발 전 트렁크에는 스미스가 그녀에게 보낸 팩스와 FBI 요원 사진 6장이 숨겨져 있었으나 귀국할 때는 없었다며 그녀의 간첩행위 예로 제시했다.

그러나 두 사람 모두 변호인을 통해 “미국에 충성한 죄 밖에 없다”고 주장하고 있어 사건의 진실은 재판결과를 지켜봐야 알 수 있다. 하지만 중국계 언론들은 LA 화교사회가 큰 충격을 받고 있다고 전했다. 이것은 그녀가 미국 화교사회에서 차지하는 위치 때문이다.


화교사회 마당발, 중국 지도부와도 친분

그녀는 LA 역대 시장과 공화당 의원들을 위한 선거자금 모금에 앞장 서 백인 주류사회에서도 상당히 인정을 받고 있다. 20대 초반인 76년에 이미 워싱턴에서 전미 화교협회 창립 발기인으로 나서기도 했다. LA 지역 화교사회의 마당발로서 LA-광저우 도시우호협회를 만들어 회장을 맡고 있다.

중국 최고위 지도부와도 상당한 친분을 갖고 있다. 85년부터 그녀를 주축으로 LA 화교들이 맞아들인 중국 지도자에는 리시엔녠(李先念) 전 총리, 양상쿤(楊尙昆) 전 국가주석 등 원로와 장쩌민 전 국가주석, 주룽지(朱鎔基) 전 총리 등이 포함된다.

98년 LA를 방문한 주룽지 당시 총리는 그녀를 애칭인 “샤오 천(小陳)”으로 부르며 친근감을 표시했다. LA 화교들은 이번 사건으로 미국에 대한 재미 화교들의 충성심이 의심 받지나 않을까 걱정이다.

배연해 기자

입력시간 2003/04/25 10:33


배연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