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의 LP여행] 윤복희(下)

격정의 세월로 채색된 진정한 대중스타의 면모

혼자가 된 윤복희는 더욱 열심히 음악활동을 했다. 그 결과 1962년 자신의 힘으로 불광동에 작은 집을 장만했다. 어느덧 그녀에게도 첫 사랑이 찾아왔다. 상대는 경기고, 서울대를 졸업한 엘리트 가수 유주용.

독일계 혼혈아인 그와의 첫 만남은 63년 미국 영화배우 셜리 맥크래인의 내한 기념 조선호텔 환영 파티장에서 MC와 가수로 이뤄졌다. 특별한 감정은 없었다. 그러나 유주용과 그의 누나 모니카 유, 최희준, 박형준, 위키 리 등으로 구성된 한국 최초의 음악동호회 ‘포 클로버스’의 객원멤버로 참가하면서 달라졌다.

윤복희는 또 민들레 악단과 함께 드라마센터의 재즈 페스티벌 등 일반무대에도 올랐다. 한번은 앙코르를 수 차례 받고 들어오는데 인기를 시샘한 한 단원이 “못 배워서 영어발음이 시원치 않다”고 비난했다. 가슴 속에 교육 콤플렉스가 있던 윤복희는 그날 바로 경복고에 다니던 사촌오빠를 찾아가 공부를 시작했다. 3개월 후 어머니의 성을 따 성복희란 이름으로 한양고 2학년에 편입했다.

그러나 배움의 길은 쉽지 않았다. 학교와 무대생활을 병행하다 보니 과로로 쓰러지기도 했고, 미8군 가수 김계자의 시민회관 귀국 쇼 무대에 게스트로 출연, 트위스트 춤을 추다가 완고한 교무주임으로부터 “예술계 학교로 옮기라”는 권유를 받았다.

그렇게 서라벌예대로 갔지만 학교 생활은 오래가지 못했다. 계기는 63년 워커힐 극장 개관무대였다. 특별히 초청된 세계적인 가수 루이 암스트롱이 공연 중 자신의 흉내를 잘 내는 한국의 꼬마 여가수를 찾았고 당시 17세의 윤복희는 대스타앞에서 전혀 기죽지 않고 흉내를 냈다.

그 사건(?)으로 유명해진 그녀는 63년 10월, 필리핀으로 첫 해외 공연에 올랐다. 당초 2주 예정이었으나 귀국일정이 얽히면서 6개월 동안 마닐라의 나이트 클럽에서 하루 6-7회씩 출연하는 고달픈 시절로 머리에 남았다.

윤복희는 “변성기였던 그 때 무리를 해서인지 맑았던 음색이 탁한 쉰 소리로 변했다”고 아쉬워한다. 결국 11명의 단원들 중 가수 윤복희와 무용수 서미선, 김미자, 이정자만이 남았는데, 이들이 훗날 <코리언 키튼즈>의 오리지널 멤버가 된다. 새롭게 팀을 구성한 이들은 내친 김에 태국, 싱가포르, 홍콩 등 동남아 순회공연을 벌였다.

그녀가 세계적으로 이름을 알리게 된 것은 바로 이때다. 64년 10월 싱가포르 공연을 본 영국인 쇼 프로모터 찰스 오우 마더씨가 4인조 여성보컬그룹 결성을 제의해온 것이다. 팬이었던 싱가폴라 호텔 사장 후레디 유는 팀 명을 <코리언 키튼즈>로 붙여주었다. 그 해 11월 <코리언 키튼즈>는 영국 런던으로 가 한복을 입고 BBC 방송 투나잇 쇼에 출연, 대단한 갈채를 이끌어 냈다. 당시 활약상은 외신을 타고 국내에 소개되었다.

66년 초 부푼 꿈을 안고 미국 라스베이거스로 갔으나 첫 반응은 냉담했다. 그러나 4개월 간의 피나는 연습 끝에 코파 카바나로 스카우트돼 TV 쇼에 출연하자 쫓겨나다시피 했던 라스베이거스 시저스 팰리스 호텔에서 다시 초청해 윤복희는 미국 무대에 성공적으로 데뷔했다. 그녀는 이후 유명 코미디언 봅 호프의 주선으로 CBS TV 특별 쇼에 출연하고 그의 월남 공연단에도 합류했다.

그녀의 일거수 일투족은 사회적으로 큰 반향을 불러왔다. 첫번째가 미니스커트 사건. 67년 1월 7일 그녀가 미니스커트를 입고 김포공항 트랩을 내려오자 난리가 났다.

뒤이어 디자이너 박테일러의 주선으로 미니스커트 패션쇼에 출연, 우리 사회에 미니스커트 유행에 불을 질렀다. 두번째는 유주용과 깜짝 약혼식. 시민회관에서 첫 개인 리사이틀을 갖던 도중 국제우편을 통해 사랑을 키워왔던 유주용과의 깜짝 약혼식을 올린 것이다.

이듬해 12월 결혼과 함께 <유&윤>이란 스페셜 쇼단을 구성, 활동을 하는데 옛 매니저 아더가 찾아와 재결합을 제의했다. 윤복희 부부와 윤항기, 강경숙, 김현아 등으로 이뤄진 <록&키> 쇼단은 그렇게 결성됐다. 하지만 채 몇 개월도 지나지 않은 69년 9월 오빠가 빠진 4인조로 2기 <코리언 키튼즈>로 바뀌었고, MBC TV 개국 기념 고별 쇼 녹화를 끝으로 유럽으로 떠났다.

1년 남짓 유럽 순회공연 후 70년 말 라스베이거스에 재입성했지만 이미 윤복희 부부는 의견충돌로 갈라선 뒤였다. 다시 귀국한 것은 75년 2월. 몇 개월 만에 당시 최고의 인기가수 남진과 깜짝 약혼식을 올려 또 한차례 화제를 몰고 왔다.

77년에는 뮤지컬배우로 변신해 ‘빠담 빠담’에서 에디뜨 피아프 역으로 백상예술대상을 받았으며 79년 서울국제가요제에서 그랑프리를 수상하면서 한국대중음악사에 영원히 잊혀지지 않을 명 장면들을 남겼다.

또 뮤지컬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에서 막달라 마리아 역만 20년 가까이 한 게 그녀의 자랑이다. 아직까지 그녀는 한국 뮤지컬의 대모로 추앙 받는다.

2001년 9월 윤복희는 세종문화회관에서 50년 노래 인생을 정리하는 기념공연을 열었고 그해 신보 <삶>을 발표하기도 했다. 그녀가 신세대들에게도 친숙한 것은 개그맨 김영철이 마치 우는 듯한 윤복희의 열창을 흉내내 인기를 끌었기 때문. 반세기가 넘도록 무대를 지켜오는 윤복희의 음악 인생은 스스로를 역경을 딛고 일어선 진정한 대중예술가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다.

최규성 가요칼럼니스트

입력시간 2003/04/25 1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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