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네마 타운] '별'

純白의 사랑 그린 詩같은 영화
한국적 사정성 담긴 아름답고 감동적인 휴먼멜로

■ 감독 : 장형익
■ 주연 : 유오성, 박진희, 공형진,
이호재, 김영애
■ 장르 : 드라마, 로맨스
■ 제작년도 : 2003
■ 개봉일 : 2003년 05월 01일
■ 국가 : 한국
■ 공식홈페이지 : www.byul2003.co.kr
■ 등급 : 12세 관람가

<별>은 학창시절 누구나 한 번쯤 이런 사랑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던 알퐁스 도데의 <별>을 모티브로 한 순백처럼 맑은 사랑을 그린 영화다. 매가폰을 잡은 장형익 감독은 한국외국어대에서 러시아어를 전공하고, 러시아 푸쉬킨 대학에서 러시아 문학을 전공한 문학도다.

독특한 문학적 상상력을 바탕으로 러시아 문학 특유의 내밀한 인간 심리를 영상으로 옮기는 특별한 감수성을 지녔다.

1995년 <용병이반> 연출부, 96년 <블랙 잭> 연출부, 98년 <기막힌 사내들> 조감독을 거쳐 2002년 상하이 영화제 각본상 수상작인 <동승>의 조감독으로 활약한 그는 시나리오를 쓸 때는 누구보다 오랜 시간에 걸쳐 완벽하게 다듬고, 감지하기 어려운 내밀한 심리까지 놓치지 않고 표현하는 섬세함을 보여준다.


한국멜로영화의 업그레이드

그런 그가 내놓은 첫번째 작품이 광활한 대자연과 눈부시게 빛나는 설원에서 펼쳐지는, ‘아름답고 가슴시린 감동’이라는 컨셉으로 만든 휴먼 멜로 <별>이다. 그는 톨스토이, 푸쉬킨 등 러시아 대문호들의 작품에서 나타나는 광활한 스케일에 한국적 서정성을 가미하는 새로운 시도를 통해 한국 멜로 영화의 기준 용량을 대폭 확장 시켰다.

장 감독은 연출의 변에서 “만일 한 번이라도 한 데서 밤을 세워 본 일이 있는 분이라면 인간이 모두 잠든 깊은 밤중에는 또 다른 신비의 세계가 고독과 적막 속에서 눈 뜬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겁니다. 누구에게나 보이는 별들이지만 누구나의 것은 아니기에 별은 보는 사람들만의 보화입니다. 밝은 별빛 아래서 사랑이 피어나고 다하는 이야기, 알퐁스 도테의 ‘별’과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의 서정성, 사랑은 소멸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한편의 시 같은 영화를 그려낼 것입니다”고 말한다.

전화국 통신회사 엔지니어 영우(유오성 분)는 누구보다도 성실하며, 인정받는 사원이지만 고아로 살아온 탓인지 누구에게도 쉽게 마음을 보여주지 못하는 소심하고 외로운 캐릭터다. 그가 작은 실수로 첫사랑 수연과 헤어지자 의기 소침, 의욕 상실, 자아 비판 등으로 스스로를 사정없이 내몰아 결국 겨울 산으로 들어가기로 결심하기에 이른다.

사랑에 상처 받고, 사람에 치여버린 영우. 그는 아무도 맡으려 하지 않는 첩첩산중 한직을 자청하고, 눈 덮힌 산 속으로 들어가 버리는데, 소백산 정상의 중계소에서 세상을 등진 채 살아가는 영우에게 광활한 설산(雪山)은 그의 심정을 대변해 주는 장소다.

별을 관찰하고 별자리에 담겨진 신화를 모두 외우는 그가 유일하게 마음을 터놓는 대상은 강아지 알퐁스 뿐이다.

알퐁스는 국내에 보급된 수가 거의 없는, 완벽한 품종의 희귀 애완견으로 나이는 5살이고 품종은 ‘보더 콜리’(양치기 견)이다. 배우들이 알퐁스의 스케줄을 맞춰야 할만큼 ‘귀한’ 견공이나 한번 연기에 몰입하면 완벽한 시선 처리와 애드 립으로 스태프들의 사랑을 독차지한, 영화 속 사랑의 매개체이자 주인공 영우의 절대 친구로 등장한다.

아침마다 ‘알퐁스’와 밥상을 마주하지만, 외로운 그의 마음은 한껏 잘 차린 밥상으로도 위로 받지 못한다. 그런 그에게 빛나는 별처럼 다가갈 수 없지만,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데, 다름아닌 알퐁스를 돌봐주는 수의사 수연이다. 그녀를 사랑하는 영우는 기회만 되면 동물병원에 가서 다 먹이지도 못할 강아지 밥을 사거나, 강아지들을 구경한다는 등의 핑계를 대고 그녀의 주위를 맴돈다.


안드로메다를 닮은 운명적 사랑

외로움에 짓눌려 용기를 내지 못해 자신의 사랑을 조금도 표현하지 못했던 영우. 드디어 수연에게 용기를 내서 데이트를 신청하지만 운명의 별은 약속 장소로 가던 영우와 수연의 발걸음을 엇갈라 놓는다.

매일 알퐁스를 핑계로 병원을 드나들며 수 십번을 지나쳐도 고백하나 못하던 영우의 첫사랑. 영우가 수줍게 내민 끈을 과감하게 잡아 당길 줄 아는 여자 수연. 빈틈없는 수술 실력을 자랑하는 수의사이지만 젓가락질이 서툴러 라면을 둘둘 말아 먹고 자신의 주위를 맴도는 영우를 짐짓 모르는 체하는 장난기로 가득한, 그러나 사랑을 찾아 눈덮힌 산을 오르는 용기를 가진 그녀.

자신의 손으로 운명에 맞서는 열정적인 수연은 가장 아름다운 결말을 가진 별자리 ‘안드로메다’ 를 닮았다. 영우에게 슬픈 운명을 점지해준 것이 그의 별자리라면, 수연은 그의 엇갈린 운명을 바로 잡아줄 또 하나의 별인 셈이다.

그리고 주목해야 할 또다른 남자가 있다. 어릴 적 잃어버린 아들과 함께 모든 사랑을 떠나보낸 듯 평생을 온기 없이 살아온 시골 노의사다. <별>의 또 한 축을 이루고 있는 슬픈 운명은 이 노의사 부부의 이야기와 얽힌다. 이호재, 박 웅, 김영애. 연기경력 30년 이상의 베테랑 배우들이 이 슬픈 운명의 한 축을 맡아 속 깊은 연기의 진수를 보여준다.

시골 노의사 부부인 이호재와 김영애. 어릴 적 하나뿐인 아들을 잃어버린 후, 불치병으로 죽어가는 아내에게 한마디 변명도 못하고 지켜볼 수 밖에 없는 이호재, 특유의 단아함과 애잔함으로 아들을 잃고 죽음을 앞둔 이중의 고통을 섬세하게 그려낸 김영애, 여동생의 죽음을 견디지 못해 절규하며 친구인 노의사를 다그치는 박 웅.

40년 연기 인생이 고스란히 나타나는 이호재 특유의 섬세한 내면 연기와 박 웅의 절규 속에 녹아있는 호소력, 그리고 김영애의 연기 전반에서 묻어나는 깊은 슬픔은 보는 이들을 감동시킨다.


베테랑들의 내면연기 돋보여

특히 그 동안 연극 무대에 집중하며 영화나 드라마 쪽의 활동이 적었던 이호재는 오랜만의 스크린 나들이에서 여타의 영화들에서는 볼 수 없었던 완벽한 내면 연기를 펼쳐 <별>의 슬픈 감동을 더 배가 시키고있다.

뿐만 아니라 이 영화를 보고 있노라면 유오성은 그간 강한 남성의 이미지로 그를 정의해 버리려는 세인들 때문에 감추어진 수많은 표정과 감정들을 내보일 기회를 가지지 못했구나 하는 느낌을 받게 된다. 거부할 수 없는 삶과 죽음 그리고 사랑의 운명, 마치 거짓처럼 이루어지는 사랑의 슬픈 기적 앞에 과장됨 없이 받아들이는 그들의 모습은 한동안 지속될 깊은 감동으로 기억될 것이다.

윤지환 영화평론가

입력시간 2003/05/02 1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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